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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35화 (35/121)

# 35

#35화

하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꿈이었을 테지. 에이몬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으니 아닐 것이다.

“에이몬. 어제 혹시 무슨 소리 들은 거 없어?”

「몰라.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블론디나는 자박자박 흙길을 밟으며 식당을 찾아 떠났다. 어서 이 굶주린 작은 짐승의 배를 채워 주어야만 했다.

‘노르디는 그가 행한 악행을 돌려받은 것뿐이야.’

그를 향한 불행이 밀려오는 해일처럼 거세게 들이닥쳤다. 하지만 자신이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동정심으로 여관을 돌려주거나 선의를 베푸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비롯하여 그에게 당하고 짓밟혔던 많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좋은 식당으로 가기 위해 데이지를 타고 옆 마을까지 갔다.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가장 맛있는 메뉴를 시켰다. 식당의 대표 메뉴는 양고기 스테이크. 자신을 위해 하나. 에이몬을 위해 덜 익은 스테이크를 하나 시켰다.

에이몬 역시 포식했다. 블론디나의 품에 안겨 제 전용 접시까지 사용하며.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여관으로 돌아오며 블론디나는 생각했다. 황녀가 되어 가장 좋은 건 역시 돈을 죄책감 없이 쓸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보다 더욱 좋은 건, 황녀가 된 덕에 에이몬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다시 돌아온 여관은 손님 하나 없이 적막했다. 당연했다. 어중이떠중이야 아침 소동으로 모두 옆 마을로 떠나 버렸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손님을 맞이할 수 있을 리 없다.

어디서인가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블론디나는 텅 빈 여관을 둘러보다가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여인의 오열이 커졌다. 코너를 하나 돌고, 좁다란 복도를 지났다. 그 방을 지나야 3층으로 올라갈 수 있기에 가만히 발을 움직였다.

곧 여관 안쪽 커다란 방이 보였다. 여관 주인 부부가 기거하는 방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귀족의 방이라도 따라 한 듯 화려한 침대와 고풍스러운 가구가 그득한 방이 보였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마저 한눈에 보아도 퍽 비싼 것이다.

화려한 나무장식 침대 위에 노르디가 누워 있었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그는, 숨만 힘겹게 내쉴 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블론디나는 힐끔 안을 살피고는 한숨을 쉬며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블론디나의 인기척을 느낀 걸까. 리베라 부인이 벌떡 일어나 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 남편이 다쳤어요!”

블론디나는 우뚝 서서 가만히 리베라 부인을 응시하기만 했다.

리베라는 격한 숨을 몰아쉬며 치맛단으로 얼굴을 훔쳤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억지로 쫓아내시지는 않겠지요?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곧 만기일이 다가온다. 그들이 나가야 할 그날.

블론디나가 그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닌데, 리베라 부인의 눈에는 원망과 분노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블론디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담담하게 답했다.

“왜 날 향해 화를 내지? 내가 노르디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닌데.”

“당신이 와서! 네가 와서 모든 게 망했어!”

재수 없는 년! 입안으로 그리 단어를 짓물며 리베라 부인이 어금니를 맞물었다.

눈을 표독스레 뜨고는 블론디나를 노려본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하는 블론디나는 동요 하나 없었다.

리베라 부인의 저 무감정한 눈빛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노르디에게 맞아 피 흘리며 누워 있던 절 바라보던 눈빛이 저것과 같았다.

아직도 생생했다. 여관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노르디에게 요령 없이 얻어맞고 바닥에 엎드려만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올라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통 속에 누워 있다가 리베라 부인이 다가오자 손을 뻗으며 말했었다.

“너무 아파요.”

하지만 리베라 부인의 반응은 냉정했다.

“지금 네 꼴을 보면 들어오던 손님도 재수 없다며 나가겠다.”

그리고 팔을 끌어당겨 구석진 의자에 처박아 놓고는 그대로 나갔다. 어리고 작은 아이에게 주는 그 어떤 동정과 온정도 없었다.

그녀가 절 동정하지 않았듯 자신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리베라 부인이 치맛단을 휘어잡으며 이를 갈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년. 널 거둬 준 은혜를 이따위로 갚을 줄 알았더라면 절대 들이지 않았어.”

하, 하고 신음 같은 한숨이 나왔다.

“당신은 날 거둔 적 없어. 어린아이를 멋대로 이용했을 뿐이지.”

“우리 아니었다면 밥이나 먹을 수 있었을 줄 알아?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지도 모를 것을 거둬 준 은혜도 모르고!”

마지막 말이 그녀의 진심 같았다. 자신들의 폭행과 학대를 정의로 여기는 듯했다.

블론디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당신 정말 쓰레기구나.”

“뭐?”

“내가 당신에게서 받은 음식은 늘 썩기 직전의 것이었어. 심지어 주급 2실링조차 제때 준 적 없잖아.”

“……그, 그건 나중에 한 번에 주려고!”

“게다가 날 거두었다니. 당신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학대하고 이용했을 뿐이야.”

리베라 부인은 무어라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말을 흘리지 못하고 다시 닫았다. 블론디나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리베라. 내가 조금만 더 잔인했더라면 당신은 이미 죽었어. 여관 하나 빼앗고 너희를 길바닥에 내쫓는 일로 만족했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블론디나의 표정에서 감정이 지워졌다.

“네 싸구려 목숨을 이어 가고 싶다면 날 더 자극하지 말라는 뜻이야.”

블론디나는 손끝으로 에이몬의 턱을 쓰다듬었다. 아까부터 에이몬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 튀어 나가려는 제 몸을 가까스로 제어하는 것 같았다. 블론디나를 위하여.

그래서 평소처럼 그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저들이 쉬이 죽어서는 안 되니까.

저 둘은, 꼭 살아서 절망의 구렁텅이를 뒹굴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이 정체를 밝히지 않고 번거로운 방식으로 복수하는 이유였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팔뚝 안에 제 머리를 처박고는 흥분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르렁거리는 등을, 블론디나는 가만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리베라 부인은 블론디나를 노려만 보았다. 분노로 제 몸이 타오르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눈앞의 블론디나를 건드릴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다.

이제 블론디나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손가락 하나로 제 목숨 같은 건 좌지우지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눈앞의 블론디나가 제 빚을 쥐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만기일이 도래하면 이곳에서 내쫓기게 될 자신의 미래였다.

블론디나는 피가 배어날 정도로 입술을 물어뜯는 리베라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날 향한 원망은 네게 돌려. 모두 너희가 자초한 일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뒤돌았다. 걷는 등 뒤로 리베라 부인의 악에 찬 목소리가 꽂혔다.

“넌 악마야! 짐승도 절 거둬 준 은혜는 알아! 넌 짐승만도 못한 악마라고!”

블론디나의 발걸음이 굳었다. 블론디나는 경직된 고개를 돌려 리베라를 응시했다.

“네가 말하는 그 동정심. 어린 나에게도 한 번쯤 베풀어 주지 그랬어. 한 번이라도 날 구해 주고 불쌍해했다면.”

“…….”

블론디나는 입꼬리를 씁쓸하게 올렸다.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텐데.”

다시 뒤돌아 자리를 미련 없이 벗어났다. 리베라 부인이 허망한 시선으로 그녀의 모습을 좇을 뿐이다.

며칠 더 묵어 확실히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이쯤 하면 됐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떠나고 싶었다.

황궁으로 돌아가 믿음직한 하녀에게 뒤처리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선물로 여관을 넘겨주면 되겠지.

무슨 생각으로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선형 계단을 휘돌아 올라가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는 복도를 걸었다. 돌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3층에 올라와 방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가면처럼 유지하던 표정이 깨졌다.

에이몬을 내려놓고는 침대로 걸어가 쓰러지듯 누웠다.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가리자 울기 바로 전, 일그러진 표정이 숨어들었다.

곧 침대가 가볍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손등 위에 간지러운 털이 닿았다. 제 얼굴을 가린 블론디나의 손등에, 에이몬이 제 뺨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브리디.」

“응, 에이몬.”

블론디나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쏟아 낼 것 같았다.

비집어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눌렀다. 슬픈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았다.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제 속을 휘도는 감정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브리디.」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왔다. 그리고 블론디나의 손 아래로 제 얼굴을 슬며시 들이밀었다.

힘주어 쳐내면 그녀의 손을 밀어낼 수 있었으나 그저 혀로 손가락을 핥으며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에이몬의 행동에, 블론디나는 결국 제 얼굴에서 손을 떼어 냈다. 어느새 젖어 있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리자 보랏빛 눈동자가 절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표범을 마주한 순간 블론디나는 제 속을 헤집던 감정이 사르르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눅눅하게 깔린 우울한 그림자가 에이몬이라는 빛 속으로 증발했다.

「속이 후련해?」

“모르겠어. 그냥 죽여 버리는 편이 나았을까?”

「저들은 죽음보다 삶이 더욱 고통일 거야. 잘했어, 브리디.」

“정말?”

「정말. 그러니 후회하지 마.」

블론디나는 그제야 빙긋 웃었다. 에이몬이 잘했다니 정말 잘한 것 같았다.

“있잖아, 에이몬. 나 이제 노르디가 무섭지 않아.”

「…….」

“그가 누워 있는 걸 보았는데도, 전혀 두렵지 않았어. 이제 정말 끝인가 봐.”

에이몬이 가만히 다가와 그녀의 젖은 뺨에 제 뺨을 비볐다. 부드러운 털이 살갗을 스쳤다. 마치 응석 부리듯.

블론디나는 손을 들어 까만 털을 쓰다듬었다. 곧 에이몬의 응석이 다정한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끝이라니. 나는 이제 시작이야, 브리디.」

“응? 뭐가?”

「곧 이루어질 거야.」

형체 없이 모호하게, 새벽 안개처럼 두루뭉술한 말이었다.

블론디나는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그냥 침묵했다.

해가 저물어 가는지 창문 아래로 저녁 노을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환영처럼 반짝거리는 샹들리에를 응시하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에이몬. 자?”

대답 대신 차근한 고롱거림이 들려왔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꼬리를 매만지며 저 역시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는 끝, 에이몬에게는 시작이라는 하루가 천천히 기울었다. 새로운 날을 향해.

***

황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평탄했다.

데이지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에이몬과 며칠이나 떨어져 있던 덕이다.

일을 끝냈다는 후련함으로 블론디나 역시 기분이 퍽 괜찮았다. 다만, 에이몬 혼자 끙끙거리고 있을 뿐이다.

매일 밤. 숙소에 묵을 때마다 에이몬은 요구했다.

「방 두 개 잡아, 브리디.」

하지만 블론디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덧붙여 블론디나에게는 에이몬과 떨어져 자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발끝으로 작은 표범의 보송한 털을 헤집으며 자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기에 포기하기 싫었다.

그래서 에이몬은 매일 데이지의 갈기를 쥐어뜯었다. 어서 바람같이 달려 황궁으로 가라며. 더 이상 늘어지는 숙박은 사양이라며.

에이몬의 협박에 기인한 데이지의 달음박질에 힘입어, 셋은 수도까지 예상보다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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