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34화
블론디나가 저당권 양도 증서를 내민 어제 이후부터, 현실은 지옥이 됐다. 부인은 온종일 실신해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 것이다. 있어야만 했다.
절 외면하는 블론디나를 무릎으로 쫓아다니며 두 손 모아 빌었다. 로브 자락을 움켜쥐고 다시 생각해 달라며 빌기도 했다.
하지만 조그마한 소녀는 잔인하고도 냉정했다.
“그냥 빚을 갚으면 되는 거잖아. 아직 시간은 있어.”
남 일 이야기하듯 그리 간단히 말하며 절 비웃었다.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땅에 이마를 박으며 토로할 일도 없겠지. 남의 불행을 즐기며 비웃다니. 마녀가 분명하다. 간악하고 비열한 계집애!
이렇게 된 이상 선택은 하나였다.
블론디나는 내일 이곳을 떠난다 했고, 조금 후 도래할 만기일에는 제 사람을 보내어 대신 처리한다고 했다.
그 이후 제 삶은 떠올리지 않아도 뻔하다. 모든 걸 다 잃고 흙바닥에서 절망과 함께 뒹굴겠지. 다른 곳에 일자리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넘겨받은 다른 빚을 또 갚아야 하지 않은가.
희망 없는 굴레였다.
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른 곳에 가서 정착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블론디나가 호위 기사를 대동하지 않고 온 지금이 기회였다.
어린 소녀의 어리석은 판단이 결국 화를 자초할 것이다.
자신이 바로 오늘, 죽여 버릴 테니까.
‘블론디나. 이 물정 모르는 것이 뒷배만 믿고 깝죽거렸겠다……?’
저 모질고 비정한 년을 죽여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걸 잃었을지언정 마음이라도 흐뭇할 테지.
물론, 쉽게 죽일 생각은 없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가 뜨기 전까지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번뜩이는 나이프를 고쳐 쥐고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텅 빈 눈동자 안에 증오만이 가득 찼다.
방문 앞에 다다르자 희열마저 샘솟았다. 건방진 계집애.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겠지. 오늘이 제 마지막 날인 줄도 모르고.
숨을 조용히 씨근덕거리며 방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어둑한 창가에서 낮은 저음이 들려왔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여유로우면서 은은히 여운을 남기듯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쩐지 고압적이고도 위험한 냄새가 풍긴다.
놀라 몸을 멈춰 세운 노르디가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누가 있었나.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곧 마주할 수 있었다. 창가에 느슨히 걸터앉아 있는 낯선 인영을.
눈이 마주치자, 맹수 앞에 선 듯 선득한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시린 달빛을 받는 환영처럼 아름다운 얼굴 위로 지배자 특유의 분위기가 맴돌았다. 보랏빛 시선 속에 타닥거리며 튀는 불꽃이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낯선 남자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지금이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브리디는 모를, 은밀한 복수의 시간.
***
새벽달이 뜰 무렵이었다. 몸을 뒤척이던 블론디나는 낯선 냄새에 살며시 몸을 뒤척였다. 창문이 열린 걸까. 차가운 밤공기에 옅은 피 냄새가 스며 있었다.
잠결에 몸을 뒤척거렸다. 누군가 끌어 올려 준 이불이 목 아래를 덮어 왔다.
따뜻하다. 블론디나는 메마른 천을 살포시 잡으며 꿈결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톡. 톡. 무언가 제 뺨을 살며시 건드렸다. 속눈썹을 움찔 떨자, 곧 커다란 손이 얼굴을 덮어 왔다.
“눈뜨지 마. 브리디. 착하지.”
동트기 전, 어둑한 새벽빛처럼 낮고 조용한 목소리. 조심스러우면서도 정감이 배어 있는 손길.
블론디나는 귓가에 흘러들어 오는 음색에 모든 의문을 놓아 버린 후 수마에 젖어 들었다.
잠시 후. 블론디나에게서 다시 잠에 빠진 숨소리가 들려왔다. 미지의 남자는 그녀를 매만지던 손을 천천히 움직여 머리를 쓸어올리기 시작했다.
공기마저 가라앉힐 것같이 고요한 분위기의 미청년이었다. 서늘한 안광이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반짝거렸다.
블론디나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쓸어올리던 그는 한참을 블론디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림자처럼 일어났다.
곧 욕실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몸에 휘감겼던 피내음이 씻겨 나갔다.
해가 뜨고 있었다.
***
「브리디. 일어나.」
“으음…….”
「일어나. 나 배고파.」
무어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귓불이 앙앙 물렸다. 블론디나는 귀찮은 솜덩이를 피해 몸을 뒤척거렸다.
하지만 까끌까끌한 혀가 목덜미를 핥아 오자 결국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 더 자고 싶은데…….”
헝클어진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에이몬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삭삭 빗겨 주는 척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침대 바닥으로 톡 떨어져 내려갔다.
「일어났으면 이제 씻고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배고프면 쥐라도 잡아먹어. 식당 뒤편에 많을 텐데.”
「그런 걸 먹는 건 표범의 수치야. 위대한 이 몸은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고.」
에이몬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앙칼진 에이몬의 목소리에, 블론디나는 이불을 걷어내며 픽 웃었다.
“오늘따라 왜 그렇게 배고파 해? 새벽에 운동이라도 다녀왔어?”
바닥을 탕탕 두드려 대던 앞발이 멈칫 굳었다.
에이몬은 대답 대신 까만 발로 괜히 얼굴을 문질렀다. 뾰족 솟아오른 귀가 쫑긋거렸다.
「얼른 씻기나 해.」
“응. 알겠어.”
「얼른.」
“알겠다니까.”
블론디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차박차박 걸어갔다.
평소라면 에이몬이 장난친답시고 걷는 다리 사이사이로 들어와 놀았을 터다. 한데 지금 작은 표범은 방 중앙에 웅크리고 앉아만 있었다.
욕실 문을 부여잡은 블론디나가 뒤돌며 물었다.
“그런데, 에이몬. 혹시 어제 누가 들어오지 않았어?”
「모르겠는데.」
“그래? 꿈인가.”
꿈결에 누군가 제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 같았는데. 비릿한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린 시절 뒷골목에서 맡곤 하던 참혹한 피 내음.
하지만 에이몬이 아니라면 아니겠지. 위대한 신수의 동물적 감각을 피해 몰래 잠입할 수 있는 생명체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블론디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욕실로 들어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에이몬은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잠시 후. 블론디나는 로비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이 꽤 소란스러웠다.
수비대 복장을 한 남자 네다섯 명이 보였다. 그들은 여관 1층 로비를 걸어 다니며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문 앞에 남은 발자국 모양을 살피고 덧문 위치도 탐색했으며 뒷문도 흔들어 보았다. 무언가 사건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로비에 선 리베라 부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엉겨 있었다.
“아침…… 아침에 보니까……. 그, 그이…… 피가…… 여기저기에…….”
리베라 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두서가 없었다. 목소리에 흐느낌이 많이 섞여 쉽게 알아듣기 힘들었다. 심각한 표정의 수비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블론디나는 어깨 위에 올라온 에이몬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밥을 먹으러 내려왔는데 이 무슨 소란인지 모르겠다.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것 같기는 한데.
곧 로비 테이블 아래 돈 통을 점검하던 수비대가 블론디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블론디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요?”
“예. 주인이 크게 다쳤습니다. 잔인한 사건이니 모르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고작해야 좀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했던 블론디나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네? 누가 그런.”
“강도의 소행인 듯싶으나, 확실히 밝혀진 건 없습니다.”
블론디나는 어깨를 떨었다. 참혹한 일을 당한 노르디에게 동정심이 치민 건 아니었다. 슬픈 것 또한 아니었다. 다만, 조금 놀라기는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어제만 해도 멀쩡하던 그가 밤사이에 이런 꼴이 되다니. 역시 업보란 게 있는 걸까.
흠칫 굳은 그녀의 목덜미 위에 에이몬의 보드라운 털이 닿아 왔다. 블론디나에게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에이몬이 속삭였다.
「그놈은 신경 쓰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리고 조금 시간을 두고 다시 되물어 왔다.
「브리디. 혹시 여관 주인 놈이 그렇게 되어서 슬퍼?」
블론디나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그냥 걱정될 뿐이야.”
「걱정된다고? 그놈이?」
“쉽게 죽을까 봐. 여관 망하는 건 보고 죽어야 할 텐데.”
노르디는 약자에게 무척이나 잔혹한 사내였다. 어린 시절 블론디나는 그에게 무수히 맞고 차였다.
만약 블론디나의 행동이 조금만 굼떴더라면, 그리하여 그의 자비 없는 매질을 요령껏 피하지 못했더라면 불구가 되어도 몇 번은 됐을 것이다.
어느 날은 그런 적이 있다. 노르디의 짐을 들고 골목길을 함께 걸어갈 때였는데 거지 소년이 그의 소맷단을 붙들었었다. 하필 그날은 노르디가 노름판에서 판돈을 많이 잃은 날이었다.
그 거지 소년을 향해, 노르디의 분풀이에 가까운 발길질이 이어졌고 소년의 발목은 반쯤 뒤틀렸었다.
상처를 치료할 여유가 없는 소년은 아마 지금 한쪽 다리를 절뚝이고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노르디의 악행은 밤새 읊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지금 노르디의 모습은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말미암은 업보라고 블론디나는 생각했다.
“노르디가 이렇게 쉽게 죽으면 아깝잖아. 자신도 고통이 무언지는 느껴 봐야지.”
나직한 블론디나의 말에 에이몬이 꼬리를 살랑거렸다.
「걱정 마, 안 죽어.」
“안 죽어?”
「그럼. 지독한 놈일수록 생명력이 질기거든.」
블론디나는 수비대를 향해 뒤돌아 어렴풋하게 의문을 꺼냈다.
“저기, 혹시 이곳 주인이 죽은 건 아니지요?”
고개 숙여 바닥을 살피던 수비대가 상체를 일으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지 않았습니다. 강도가 양심은 있는지 처치는 잘했더군요. 팔과 다리 하나씩은 사용할 수 없을 테지만 살 수는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
전혀 걱정한 적 없었으나 블론디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 않을 거라는 에이몬의 말이 맞았다. 신수의 감은 역시 달라도 뭐가 달랐다.
그래. 쉽게 죽으면 안 되지. 고통도 모른 채 그렇게 쉽게. 노르디의 생존은 다른 의미로 다행이었다.
근처 테이블을 한번 흔들어 본 수비대가 다시 블론디나를 향해 다가왔다.
“혹시 어젯밤 무얼 하셨습니까?”
심문이라기보다는 형식상 던지는 질문에 가까웠다.
“그냥 잤어요.”
간단한 블론디나의 답에, 수비대 역시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질문을 이어 갔다.
“혹시 낯선 소리를 듣거나 낯선 이를 보지는 못하셨습니까?”
“글쎄요. 들은 건 없었는데……. 푹 잤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걱정해 주어 고마워요.”
그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똑바로 올렸다.
싱겁게 끝난 대면이었다.
딱 보아도 고귀해 보이는 블론디나가 애완 고양이를 어깨에 올린 채 돌아다니는 모습은, 수비대의 시선으로 볼 때 범죄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블론디나는 곧 등 돌려 여관을 벗어났다.
일순 어제 새벽의 기묘한 꿈이 떠올랐다. 자신을 쓰다듬어 주던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