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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27화 (27/121)

# 27

#27화

지름길로 간답시고 산을 그냥 가로질렀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도 지났으며 위험한 길도 그냥 돌파했다.

지금 걷고 있는 길도 붉은색으로 표시된 숲이었다.

붉은색. 붉은색은 위험한 산짐승, 혹은 ‘신이 소멸할 때 떨어져 나온 힘’을 먹고 자란 마물들이 우글우글한 장소를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물이나 산짐승은커녕 토끼 한 마리 나오지 않았다. 에이몬의 기척을 느낀 짐승들이 자연스레 몸을 숨긴 탓이다.

물론 블론디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행이란 게 이렇게 평탄한 거구나. 이렇게 쾌적한 거로구나, 라고 생각하며 콧노래만 불렀을 뿐.

“에이몬, 간식이라도 먹고 가자.”

어느덧 저녁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녁이면 조금 후에 도착할 숙소에서 먹어도 되지만, 계속 말 위에 앉아 있었더니 찌뿌둥하기도 하고 목이 마르기도 했다.

버섯같이 생긴 널따란 바위 위에 앉아 손수건을 펼쳤다. 그 위에 사과며 물이며 쿠키 등을 꺼내 놓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손수건 끄트머리가 팔락거렸다.

“육포 먹을래?”

말라비틀어진 고기 조각을 꺼내자 에이몬은 질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걸 먹느니 차라리 사냥을 하고 오지.」

그런 후 고개 돌려 바위 옆에 서 있는 데이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냥감. 마치 커다란 고기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데이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코를 실룩거리더니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그런 후 곧 소리가 들릴 만큼 빠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피식 웃은 블론디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을 신경질적으로 꾹꾹 밟는 데이지에게 다가가 자른 사과를 내민다.

“먹어, 데이지. 간식이야.”

먹으랍시고 땅에 떨어뜨려 주워 먹으라는 건 좀 그렇고. 사과를 손끝으로 잡고 조심스레 내밀었다.

사실 여기까지 데이지를 잘 타고 왔기는 하지만 아직은 조금 무서웠다.

눈앞의 말은 ‘데이지’라는 어여쁜 이름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사실 위풍당당한 체구를 가진 커다란 짐승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건 두려움을 애써 외면하며 건네는 사과였다.

데이지는 킁킁거리며 블론디나의 손바닥 냄새를 맡더니 사과를 날름 받아먹었다.

아삭아삭. 데이지의 사과 씹는 소리를 들으며 블론디나는 나머지 사과를 내밀었다. 데이지는 그것마저 순하게 받아먹었다.

데이지가 사과를 말끔히 다 먹자 이번엔 각설탕을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이것도 먹어 봐.”

조금 무서웠는데 착하게 잘 받아먹는 데이지를 보니 약간 마음이 놓였다.

데이지는 설탕 역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고는 한입에 후룩 삼켜 버렸다.

아득아득 설탕 씹히는 소리가 울렸다. 설탕을 순식간에 해치운 데이지는 미련이 남는지 블론디나의 손바닥 위에 남은 설탕 가루마저 샅샅이 핥아 먹었다.

“앗, 축축해!”

블론디나의 웃음소리가 나무 위로 울렸다.

에이몬이 핥는 것과는 기분이 매우 달랐다.

에이몬이 핥아 줄 때는 간질간질 심장이 간지러운 기분인데 지금은 손바닥만 축축하다.

뭐랄까.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애매하게 찝찝한 묘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밀어낼 정도는 아니었고.

에이몬은 아까부터 같은 자세였다.

두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바위 위에 앉아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데이지가 블론디나의 손바닥을 핥고, 블론디나가 웃음을 터뜨리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연인의 외도라도 목격한 듯 얼굴이 사뭇 굳어 있었다.

블론디나는 늘어놓은 쿠키 부스러기를 털고 펼쳐 놓은 손수건을 접었다. 이제 슬슬 떠날 시간. 휴식의 끝이었다.

열심히 정리하고 있으려니 블론디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에이몬이 혼잣말같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데이지에게 너무 격 없이 행동하지 마.」

“응?”

구겨진 손수건을 쑤셔 넣으며 고개를 돌렸다. 앞발로 복숭아씨를 데굴데굴 굴리는 에이몬이 보였다.

「저놈도 수컷이라고.」

“짐승인데 굳이 성별을 신경 써야 해? 어차피 난 인간, 쟨 말. 수컷이든 암컷이든 상관없잖아.”

그 말에 에이몬이 복숭아씨를 툭 내던지며 고개를 들었다.

「나도 표범인데. 네가 말하는 짐승.」

“응?”

「나나 쟤나 너에겐 똑같은 존재야? 나도 상관없어?」

블론디나가 정리하느라 대답도 하지 않자 에이몬은 다시 데이지에게 다가갔다.

「말이면 풀이나 뜯지 왜 인간이 주는 걸 좋다고 다 받아먹어? 배알도 없는 놈 같으니.」

블론디나에게 화를 낼 수 없으니 대신 데이지에게 시비를 거는 모양이다.

데이지가 코 평수를 훅 넓혔다.

인간이 주는 걸 가장 잘 좋다고 먹어 대는 것이 저 작은 표범 새끼 아닌가.

‘너도 저 인간 여자가 주는 쿠키 좋다고 먹은 주제에.’

데이지는 그리 말하는 듯 힝힝대며 앞발로 풀을 쿵쿵 짓이겼다. 새끼 표범은 낙엽을 내리쳤고 말은 앞발을 타각거렸다.

둘의 대치를 마무리 지은 건 짐을 다 정리한 블론디나였다.

“네가 참아.”

데이지의 안장을 만지작거리며 블론디나가 말했다. 물론 데이지를 향해 건네는 말이었다.

“에이몬이 성격이 좀 그렇지?”

동의의 표현인지 데이지의 꼬리가 흔들 움직였다.

“그래도 애는 착해. 그렇게 막 나쁘지는 않아. 친해지면 상냥해질 거야.”

끝으로 에이몬을 변호하는 듯한 말이 나왔다. 데이지의 꼬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콧김을 푹 내뿜었다. 불인정의 표현 같았다.

블론디나는 마지막으로 말의 목덜미를 슥슥 쓰다듬고는 다시 위에 올라탔다.

에이몬 역시 풀쩍 올라와 자연스레 블론디나의 품에 자리를 잡았다.

타각타각. 어둑해져 가는 숲길을, 데이지는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달렸다. 해가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게 하라는 에이몬의 발언 때문이었다.

블론디나는 애써 중심을 잡으며 데이지의 휘날리는 갈기를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그마한 새끼 표범 주제에 커다란 말을 부려 먹다니. 데이지가 뒷발로 꾹 누르면 납작해질 것 같은데.

하지만 동물의 세계는 서열이 다라고 하니까.

‘그런데 정말 에이몬이 데이지보다 강하단 말이야?’

제아무리 신수라고는 해도 체격 차이가 이렇게 큰데.

동물의 세계는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손끝으로 에이몬의 털을 헤집었다.

제 품의 작은 짐승이 대륙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둑해질 때 즈음 마을에 도착했다. 작고 평범한 소규모 영지였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작은 집들 사이를 지나 허름과 평범 사이로 보이는 여관에 도착했다.

한쪽 귀퉁이가 찢겨 나간 간판에는 ‘휴고의 여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블론디나는 데이지의 등에서 내려 기지개를 쭉 켰다. 온몸이 삐걱거려 어서 쉬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에이몬이 데이지의 갈기를 휙휙 문지르며 말했다.

「쉬다가 내일 아침에 와.」

마구간이 그리 청결하지 못하니 다른 곳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에이몬의 배려 섞인 발언에 데이지는 의외라는 듯 코 평수를 넓혔다.

하지만 곧 에이몬은 데이지의 감동을 아주 쉽게 짓밟았다.

「네 냄새 맡아 놨어. 튀면…….」

튀면 죽어. 그런 뜻이었다.

물론 그 말을 듣는 블론디나는 그 속에 내포된 뜻을 쉽게 알아들었다.

‘우리 에이몬, 진짜 악당 같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설레설레 내었다.

「브리디. 데이지 저놈이 날 처음 만나자마자 뒷발로 밟으려 했어.」

“응.”

「내가 만약 새끼 표범이었다면 꽉 눌렸을걸. 죽었을지도 몰라.」

“알겠어.”

「진짜라니까? 내가 쟬 험하게 대하는 게 아니야. 말하자면 첫 만남부터 잘못된 거지. 물론 잘못은 쟤가 했고.」

“알겠다니까, 너희 둘의 잘못된 만남.”

여관 주인에게 열쇠를 받고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에이몬은 자기변호를 했다.

에이몬이 변명의 말을 주절거리게 된 계기는 크지 않았다.

“데이지에게 심술 그만 부리고 착하게 좀 대해 줘. 우리 태워 주잖아.”

라고 웃으며 말한 게 다였다.

그것을 무슨 큰 변고처럼 받아들인 에이몬이 냥냥거리며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을 뿐.

블론디나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으며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말하는 고양이’를 누군가 볼까 두려워서였다.

다행히 이 낡은 여관에 묵는 이는 본인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혼자 열심히 떠들어 대는 에이몬에게 대충 대꾸하며 비틀려 닫힌 문을 억지로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허름하고 누추하리라 예상했건만 생각보다 정갈한 방이 나왔다.

오늘, 에이몬과 둘만이 묵을 방이었다.

로브를 벗은 블론디나가 까만 옷을 의자 위에 대충 걸었다.

에이몬은 소파 위에서 모자를 신경질적으로 물어 대는 중이었다.

제 귀여운 모습을 더욱 귀엽게 해주는 모자의 존재를 잊고 있다가, 이제야 깨닫고는 화풀이하고 있는 듯 싶었다.

블론디나는 허리를 휙휙 돌렸다.

“으. 쑤셔…….”

데이지가 아무리 신경 써서 달린다고 하더라도 처음 한 승마, 오랜 시간 탄 말 등은 낯설었다.

좁은 벽장 안에 처박혀 있다가 온몸이 쪼그라든 느낌이다. 허리를 돌리고 목도 돌리고 어깨도 두드리다가 욕실 문을 열어 안을 살폈다.

“생각보다 깨끗하네.”

물론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자신이 어린 시절 자랐던 집에 비해서는 천국 같았다.

“에이몬. 나 먼저 씻을게.”

늘어지게 누워 있는 에이몬을 향해 말하곤 안으로 들어섰다.

욕실 창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들이치는 저녁 공기에 사뭇 서늘했지만, 곧 따뜻한 물이 나와 훈훈해졌다.

뜨거운 물 아래 몸을 적시니 온몸이 적당히 녹녹해졌다.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이 발그레 분홍빛이 됐다.

블론디나는 한참을 씻은 후 커다란 천으로 몸을 닦고는 포댓자루같이 커다랗고 풍성한 잠옷을 입었다.

거친 천. 오는 길에 대충 산 것이라 황궁에서 입던 것과는 물론 다르다.

‘황궁에 오기 전에는 지겹도록 입었던 거친 잠옷인데…….’

이상하게도, 새삼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달칵. 문을 열고 나오자 훈기가 좁은 방에 들어찼다. 그리고 증기가 스며드는 방 안에서, 에이몬은 홀로 방황하고 있었다.

무어가 불안한지 우왕좌왕 딱딱한 나무 바닥을 삐걱거리며 밟고 창가로 훌쩍 올라가 난간을 긁었다.

“에이몬, 뭐 해?”

젖은 머리를 닦으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그냥. 그냥 있어.」

에이몬에게서 초조한 음색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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