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화
***
황제가 턱 끝을 쓸었다. 손짓에 고민이 묻어 있었다.
최근 신수에게서 불쾌한 통보를 전해 들었다.
‘신수의 의식제가 있을 테니, 첫 번째 자식을 참관인으로 보내라.’
다짜고짜 던져진 제안 같은 명령이었다.
첫 번째 자식이라면, 블론디나를 말하는 것.
일전에도 황족과 신수족의 교류를 위하여 의식제의 참관인으로 간 경우가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처럼 서로가 데면데면해지기 전 일. 서로 친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지금은? 친분은커녕, 자신과 장로가 해마다 한 번씩 만나 침묵의 식사를 하는 것이 다였다.
속이 심란했다. 그런 황제의 속내를 읽은 것일까.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던 황후가 속삭였다.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폐하.”
“황족을 짐승의 참관인으로 보내는 것이 탐탁지 않소.”
“짐승이기는 하나 아직은 대적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우선 보내라면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
황제는 대답 대신 다시 턱을 쓸었다.
“그 짐승들의 숲에 ‘우리’ 아이를 집어넣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다행 아닙니까.”
그 말에 황제의 표정이 달라졌다.
“블론디나 륜 아테스 역시 ‘내’ 아이이오.”
황후의 표정이 찬물이 부어진 듯 굳었다.
처음 데려올 때와 달리 요 몇 년간 그 아이에게 신경 쓴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제 앞에서 ‘자신의 아이’라며 딱 잘라 선을 그을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폐하. 블론디나 황녀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문 너머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전에 오라 하였던 블론디나가 다다른 모양이다.
“안으로 들여라.”
곧 침착한 표정의 황녀가 들어섰다. 드레스를 들어 올리며 허리를 굽히는 인사가 사뭇 우아하고 정적이다.
이제는 걸음걸이부터 꽤 태가 나는 것이, 처음 만났던 비루하고 조악했던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위대한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 제국의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부르셨습니까.”
살며시 허리를 세우는 블론디나를 보며, 황제는 가타부타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곧 표범 신수 일족의 의식제가 있다고 한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널 참관인으로 세우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예?”
블론디나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황제는 이 상황이 탐탁지 않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위험한 장소이기는 하나, 애초에 권유한 것이 그쪽이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예.”
“가겠느냐.”
“예.”
블론디나는 다시 시선을 내리고 순종적으로 답했다. 일말의 거부 반응조차 없었다.
황제는 그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처음 저 황녀를 들여왔을 때부터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에 가까웠다. 주제 모르고 황궁을 휘젓고 다닌다면 다시 내칠 의향 역시 있었다.
하지만 죽은 듯 별궁에 박혀 살며 몸을 웅크렸다. 황제인 저의 관심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감히 휘두르지 않았다.
화단 구석에 핀 꽃처럼 조용히 제자리에 박혀 향기를 낼 따름이었다. 언제나 의연하고 당당했으며 조용하나 대범했다.
황제가 블론디나만 응시하며 아무 말이 없자, 황후가 대신 입을 열었다.
“거기 서서 뭘 하는 것이냐. 이만 돌아가 보아라.”
할 말은 모두 끝냈으니 남은 건 비천한 황녀를 내보내는 것뿐이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언제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블론디나는 허리 숙여 인사하며 늘 그랬듯 조용히 빠져나갔다.
문 뒤로 사라지는 드레스를 보며 황제는 다시 혀를 찼다. 위험한 곳으로 제 딸을 밀어넣기 싫으나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퍽 신경 쓰였다.
***
“-참관인? 그게 뭔데?”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앞발을 억지로 붙잡고 푸른 잉크 위에 발바닥을 꾹 눌렀다.
황제와 함께 있을 때 보였던 침착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직 소녀 티가 남아 있는 장난꾸러기 눈을 한 황녀가 있을 뿐이다.
「의식제 때 내 옆에 앉아서 고개 끄덕여 주고 도와주고 하는 거야.」
“그런 훌륭하고 중요한 일을 감히 내가 해도 돼?”
「훌륭하고 중요하긴. 다른 신수들도 다 하는 거.」
에이몬이 심드렁히 답했다.
블론디나는 잉크 묻은 에이몬의 앞발을 은빛 편지지 아래에 쿡 찍었다. 하단에 귀여운 발바닥 모양이 박혔다.
그 편지지 옆에는 몇 장의 편지지가 더 있었다. 에이몬의 발바닥 도장이 차례로 찍힐 편지지.
아무리 비밀스러운 황녀라 하더라도 이젠 친분 있는 몇몇 귀족 영애 정도는 있었다.
이건 그녀들에게 보낼 때 사용할 편지지였다.
“나한테 미리 말하지. 아까 폐하께 불려 가서 긴장했더니 다짜고짜 신수의 숲으로 가라고 하시기에 얼마나 놀랐는데.”
「말했어. 네가 내 목에 리본 달고 있어서 잘 못 들었나 보지.」
“그랬나? 내가 뭐 준비해야 할 건 없어? 중요한 일인데 실수하면 안 되잖아.”
「없어. 나만 믿고 몸만 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에이몬의 발을 들어 도장을 찍으며, 블론디나가 픽 웃었다.
“몸만 오고 네가 다 알아서 한다니 꼭 결혼하러 오라는 것 같네. 앗! 갑자기 움직이면 어떡해. 발바닥 도장 망가졌잖아.”
결혼하러 오라는 것 같네. 블론디나가 그 말을 하자마자 느른히 앉아 있던 에이몬이 풀쩍 뛰어올랐다.
덕분에 종이 위에 도장을 찍다가 잉크가 번져 버렸다.
블론디나는 진정하라는 듯 에이몬의 등을 쓱쓱 쓸어넘긴 후 다시 앞발을 들어 잉크에 푹 눌렀다.
아무래도 제 앞의 귀여운 짐승이 결혼이란 말에 퍽 놀란 모양이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어르신께 거위 여섯 마리와 소 두 마리, 밀가루 네 포대를 줄 테니 넌 몸만 와. 결혼하자.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농담한 건데. 보통 평민들은 그렇게 결혼하거든.”
「…….」
“넌 인간이 아니라 잘 모르나?”
에이몬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기어코 발바닥 도장 편지지를 다섯 개 만든 블론디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냥 여기저기 결혼 얘기가 나오니까 그냥 한 말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굳어 있어?”
「그냥…….」
그제야 에이몬이 겨우 입을 열었다.
“루시도 지금 신부 수업을 받고 있어. 신랑 후보는 아직 없지만.”
「루시? 루시가?!」
에이몬이 다시 펄쩍 뛰어올랐다.
루시는 오늘 집안 행사로 부재중이었다.
너 너무 극적으로 놀라는 거 아니야? 블론디나는 그리 물으려다가 참기로 했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번부터 루시를 향한 에이몬의 태도가 약간씩 이상해졌는데 그 때문인지 퍽 묘한 감정이 치밀어오르는 것이었다.
“응. 루시가…… 아무튼 그래.”
에이몬은 진지한 얼굴로 편지지를 노려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 새끼 표범의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심각한 표정을 한 채 편지지를 훑고, 블론디나의 손가락에 껴 있는 반지를 노려본다.
잠시 후 에이몬이 블론디나 손아귀에서 제 앞발을 비틀어 빼며 물었다.
「지금 너와 루시는 결혼적령기인 건가?」
“응.”
「지금?!」
“응. 지금.”
순간 새까만 아기 표범의 낯이 하얗게 질리는 것 같다고, 블론디나는 느꼈다.
곧 에이몬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블론디나에게 닿을 듯 말 듯 혼잣말처럼.
「지금 결혼적령기면…… 그럼 의식제 후에…….」
“뭐? 잘 안 들려, 에이몬.”
그제야 에이몬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 이리 결혼을 일찍 해?」
“일찍이라니. 성년이 됐으니 해야지.”
「우린 그렇게 일찍 짝을 맺지 않는단 말이야.」
“왜?”
에이몬이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은 후사를 보기 위해 하는 것에 가까우니…… 우선 발정기가 와야…… 물론 그 전에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브리디는 괜찮을까…….」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에이몬은 읊조렸다.
블론디나는 중얼거림이 잘 들리지 않아 귀를 가까이 댔다가 결국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편지지만 만지작거렸다.
열여덟이 되어 그런 걸까. 짐승도 감정이 출렁거리는 격동기를 겪는가 보지? 그리 생각할 따름이었다.
***
밤이 깊었다. 인간은 잠이 들고 짐승은 깨어날 시간이다.
보름달이 높다랗게 뜬 날.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둠에 싸인 적막한 숲속. 신수의 숲에서 에이몬의 의식제가 치러지고 있었다.
저 너머 숲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블론디나는 타오르는 화로 앞에 앉아 지금 이 순간의 열기와 분위기를 마음속에 담는 중이었다.
짐승들의 움직임에는 소리가 없었다. 그림자처럼 화로 주위를 천천히 돌며 낮게 그르렁거릴 따름이었다.
짐승의 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블론디나는 어깨를 흠칫 굳히다가 애써 침착하게 숨을 내쉬었다.
‘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다.’
낯설고 두려웠으나 에이몬의 소중한 날이니 담담하려 애쓰는 것이었다.
자신의 옆에 두 마리의 커다란 표범이. 맞은편에 자그마한 새끼 표범 세 마리가 일렬로 앉아 있었다.
표범의 눈동자에 붉은 화로 빛이 타오르듯 너울거렸다.
화로 주위를 일렬로 돌던 신수들은, 제 차례가 올 때마다 한 마리씩 무리에서 빠져나와 새끼 표범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로 제 앞발을 물어 피를 낸 후 새끼 표범의 이마에 문질렀다.
모든 신수의 피를 묻힌 새끼 표범은, 마지막 수장의 피를 받아 내서야 비로소 인정받았다. 당당히 성장하여 신수의 일원이 되었음을.
에이몬의 어미가 죽은 후 수장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번 의식제를 치른 새끼들이 모두 성체로 변하게 되면 새로운 수장을 뽑을 전투 의식을 치를 참이었다.
부재중인 수장 대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에이샤 대장로는, 입술을 질끈 물고 있는 블론디나를 응시했다.
‘에이몬의 참관자가 된 황족이라지.’
짐승의 본능으로 알 수 있다.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
하지만 애써 담담한 척 고개를 쳐들고 에이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든 걸 기억하겠다는 듯.
애초에 참관자의 역할이 그것이었다.
숲에는 어디에나 눈이 있다. 홀로 나무 아래를 지나가더라도 나뭇가지 위 산새가 저들을 지켜보았으며 들판을 뛰어다닐 때도 땅굴 속 뱀들이 행적을 좇았다.
참관자는 그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저들을 지켜보는 모든 생명체를 대표하여, 의식제 주인공의 모습을 머리에 담고, 의식제 끝에 비로소 신수 일족이 된 새로운 신수를 기억하라는.
어찌 되었든 저 블론디나라는 황족은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다.
에이샤 대장로는 흥미로운 듯 그녀를 주시했다가 떨리는 손끝에 시선을 박았다. 그런 후 자리에서 찬찬히 몸을 일으켰다.
화로 주위를 돌던 표범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모든 짐승의 고개가 돌아가자 에이몬을 주시하던 블론디나도 시선을 돌렸다. 단상 위에 있던 커다란 표범이 내려오자 분위기가 대번 달라졌기 때문이다.
‘저 큰 표범이 에이몬이 말했던 대장로일까? 이제 저 표범이 에이몬에게 피만 묻히면 이 의식제도 끝나겠지.’
아까 에이몬이 말해 주었던 설명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은밀하게 다가온 대장로는 에이몬과 두 마리의 새끼 표범 주위를 느긋이 돌았다.
곧 움직임을 멈춘 표범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콱. 날카로운 이빨이 손등과 발바닥에 박혔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달고, 장로는 커다란 앞발로 에이몬의 이마를 문질렀다.
「에이몬. 위대한 신수 일족이 된 것을 환영한다.」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맹수의 울음소리가 숲 안을 휘돌기 시작했다.
땅을 울리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지배자의 포효에 모든 동물은 웅크리고 몸을 숨겼다.
블론디나 역시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살짝 감았다. 본능적인 공포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식은땀이 저도 모르게 배어 이마에 한기가 스몄다.
지금, 이 순간. 제 옆에서 뒹굴던 에이몬이, 두렵고도 위대한 짐승의 일족이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