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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21화 (21/121)

# 21

#21화

아무튼, 이제야 아름다운 미소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됐는데 아예 보여 주지도 않는다니.

나 요새 서운해. 그렇게 입 밖으로 투정 섞인 말을 하려다 참았다.

이제 자신은 스무 살이었고 열여덟 자그마한 표범에게 어리광을 부릴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유치한 질투심과 서운함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부아가 치밀어 틱틱 양탄자 숄만 튕기는데, 어느새 커튼에서 빠져나온 에이몬이 마제또에게 명령했다.

「넌 가지 마.」

“왜요?”

마제또는 블론디나의 치마 위를 뛰어다니다가 갸웃 고개를 기울이며 반문했다.

「저녁 먹고 가. 내가 노루 잡아 줄게.」

“저 요새 채식해요, 에이몬 님!”

「……사과 따줄게.」

마제또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다시 기울이며 에이몬의 까만 앞발을 응시했다. 그 발로? 사과를?

곧 마제또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싫어요! 갈 거야!”

「왜!」

“나 여자 친구 생겼단 말이에요!”

「뭐?」

그 말에 블론디나와 루시, 에이몬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모였다.

마제또는 모두의 관심이 흡족한듯 날개깃을 착 펼치고는 고개를 든 채 당당하게 말했다.

“달이 한가운데 뜨면 미루나무 아래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미루나무?”

“오늘 뽀뽀하기로 약속했어!”

“아하하하하.”

결국 블론디나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뽀뽀라니. 부리로 서로 콕콕 찍기라도 할 텐가.

마제또는 기분이 상했는지 블론디나에게 포르르 날아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뭐가 웃겨요! 뭐가 웃겨! 왜! 왜 웃어!”

블론디나는 웃음을 멈출 수 없어 계속 웃기만 했다.

“황녀님, 미워!”

결국 마제또는 블론디나의 손등을 부리로 콕 찍고는 창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퍽 기분이 상한 듯싶었다.

멀어지는 작은 날개를 향해 블론디나가 외쳤다.

“마제또, 놀려서 미안해! 내일 오면 체리 줄 테니까, 화 풀고 꼭 와! 알았지?”

마제또는 대답 대신 짹짹짹 세 번 지저귀고는 먼 숲으로 사라졌다. 피앙세가 기다리고 있을 미루나무를 향해.

여전히 키득거리며 등을 돌리자, 루시 역시 소리 내어 웃느라 어깨를 들썩이며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 역시 곧 돌아가려는 것 같았다.

“황녀님,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 내일 봐.”

웃음을 머금은 루시가 사라지자, 이제 커다란 방 안에 남은 건 계속 미소를 지우지 못한 블론디나와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에이몬뿐이었다.

블론디나는 창문을 닫으며 까만 표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넌 안 웃겨, 에이몬? 마제또가 여자 친구랑 뽀뽀하기로 했대. 쪼그만 게.”

동시에 에이몬의 꼬리가 바짝 올라갔다.

「왜. 작으면 하면 안 돼?」

“응?”

신경질적으로 반문하는 에이몬의 반응에, 블론디나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

에이몬이 앞발로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그리고 나는 안 작아. 넌 모르겠지만 나 요새…….」

“어?”

「됐어!」

에이몬은 괜히 짜증을 부렸다. 새까만 털이 부스스 일어났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블론디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빗은 후 침대에 누웠다.

‘음…… 에이몬 요새 이상하네.’

하기야 나이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자신은 이제 스물이 되었지만 에이몬은 아직 질풍노도인 십 대다. 하루에도 감정이 몇 번이나 변한다는 열여덟 아닌가.

이불을 들어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며 에이몬을 불렀다.

“이리 와, 에이몬.”

에이몬은 대답 대신 꼬리만 힘없이 흔들었다.

“안 자?”

여전히 에이몬은 대답이 없었다. 블론디나는 이불을 천천히 내리며 서운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혹시 나와 단둘이 있는 게 싫어?”

아까부터 느꼈던 서운함을 조용히 풀어냈다. 에이몬은 예쁜 눈동자를 끔뻑거리더니 이내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게 아니라…….」

블론디나는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기분이 좀 이상하단 말이야. 너랑 있으면 막 심장이…….

앞발로 얼굴을 꾹꾹 누르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블론디나를 향해 하는 말인지 모를 것을 읊조렸다.

블론디나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몬이 요새 정말 이상해졌어. 서운해, 라고 섭섭해하며.

***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랗게 자라난 나무가 숲 안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풋풋한 풀 냄새와 고요한 흙냄새가 뒤섞이는 곳. 신비하게 얽혀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볕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이곳은 에이몬의 영역, ‘신수의 숲’이었다.

꽃내음이 환상처럼 피어올랐다. 꽃 덤불 안에서 낮잠 자던 에이몬은,

「에이몬.」

절 부르는 소리에 가만히 눈을 떴다.

사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챘다. 그것이 누구인지까지 알아챘으나 귀찮아 모른 척한 것이었다.

실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점박이 표범이 보였다.

표범족 신수 장로였다. 눈빛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륜이 배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에이샤 대장로님.」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고는 했지만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 목소리로 에이몬이 인사했다.

장로는 맞인사의 표현으로 앞발로 에이몬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가 뗐다.

「의식제에 누구를 참관자로 세울지 정하였느냐.」

본론이 바로 나왔다.

에이몬은 귀를 쫑긋거리며 뒹굴뒹굴했다. 나이 많은 장로 앞에서 보이기에 그리 예의 바른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에이몬도, 장로도, 표범 신수 그 누구도 에이몬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꼬리를 잡고 패대기치며 혼내도 변하지 않으니 포기한 것에 가까웠다.

애초에 저리 생겨 먹은 놈을 어찌 고치겠는가. 에이샤는 에이몬의 버릇 단속을 진즉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혹 여의치 않다면 내가 대신 서주려 하는데.」

보통 의식제 참관자는 부모 중 하나가 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에이몬은 거의 날 때부터 혼자였던지라 부모가 없었다.

그것이 퍽 염려스러워 의식제가 가까워지니 장로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황족으로 세우려 해요.」

「황족?」

의외라는 듯 표범의 꼬리가 슬쩍 움직이다가 멈췄다.

「네. 인간에게 축하받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에이몬은 대수롭지 않은 척 목소리를 꾸미며 장로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제 의도는 파악하지 못한 눈치다.

이렇게 되면 정말 블론디나를 제 참관인으로 세울 수 있을 것 같아 흡족해졌다.

「아예 없었던 일은 아니다만…… 그 귀중한 날을 황족에게 주어도 되겠느냐.」

「네. 전 딱히 그날에 의미를 두지도 않으니까요.」

「…….」

「게다가 황족들이 우리를 짐승이라며 은근히 무시하는데, 황족을 신수의 숲에 억지로 데려다 놓는 상황을 만들어 위아래를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죠.」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렇다. 최근 인간들은 저들에게 복종하는 법을 잊은 이들처럼 굴었다.

귀찮은 사태, 예를 들면 충돌이나 전쟁 같은 일이 발발하는 건 귀찮아 대충 넘어가고는 있으나 이쯤에서 한번 짚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아예 황제에게 참여하라고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아뇨. 그자 말고 황제의 첫째 자식에게 부탁할래요. 저도 신수 수장의 첫째 아들이었으니까.」

「……그래.」

장로의 눈동자에 사뭇 씁쓸함이 고였다. 에이몬의 부모를 생각하니 절로 딸려 오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러건 말건 에이몬은 이제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다시 꽃덤불 안에서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할라와 샨티. 그리고 네 의식제가 끝나면 수장을 정할 것이다, 에이몬.」

「네.」

수장의 자리는 10년이 넘도록 비어 있었다. 수장이었던 에이몬의 어미가 죽은 이후로 쭉 공석이었다.

그리고 아마 에이몬과 같은 시기에 태어난 표범들이 성장하면 수장이 될 결투를 할 참이었으나…….

심드렁히 답하는 에이몬을 보며 장로가 묵직하게 말을 이었다.

「상대를 죽이지는 마라.」

「제가 왜요. 제가 흑표범이라 ‘그 짐승’처럼 미쳐 버릴까 걱정하시는 거예요?」

「…….」

장로는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죽일 것 같으면 그냥 발랑 엎드려서 패배했다고 꼬리 흔들 테니 안심하세요.」

살랑거리는 풀잎을 짓이겨 물며 에이몬은 대충 답했다.

진심이었다. 자신은 색만 까맣지 다른 표범과 다를 바 없다. 피만 보면 미치는 짐승일 리 없다.

광기에 사로잡혀 살육을 저지를 생각 역시 전혀 없었다.

장로는 뒹굴거리는 에이몬을 한참 응시하다가 던지듯 물었다.

「그런데 넌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있을 생각이냐. 어째서 계속…….」

에이몬은 뒹굴뒹굴 몸을 굴리며 심드렁히 답했다.

「귀여워 보이려고요. 작은 편이 움직이기도 편하고.」

“…….”

장로는, 까만 털에 꽃잎을 잔뜩 묻힌 에이몬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는 저 자그마한 표범이 이해할 만한 행동을 했던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여전히 늘어져 있는 에이몬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이만 가보겠다는 신호였다.

「잘 자라, 꼬마 표범.」

「예예, 귀엽고 깜찍한 꼬마 표범은 이만 푹 쉬겠습니다.」

귀찮다는 듯 대충 답하는 에이몬의 말에 코를 찡그리며 웃던 장로는 이내 장소를 떠났다.

에이몬은 다시 혼자가 됐다. 느지막이 기울던 해가 온전히 산등성이 너머로 숨어 버렸다.

사방에서 풋풋한 저녁 내음이 밀려왔다. 꽃덤불 너머에 있는 집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훈풍이 기분 좋아 그대로 있기로 했다.

미동 없는 꽃과 일체가 된 듯 누워 다가오는 의식제를 떠올려 본다.

표범 신수가 성체가 되기 위해 으레 통과하는 의식.

그 의식을 거쳐야만 비로소 작고 귀여운 꼬마 표범이 주변을 압도할 거대한 표범으로 성장하고 성인 인간형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이몬은 제 자그마한 앞발을 응시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난 어째서.’

어디서인가 찌륵찌륵 풀벌레 소리가 울려 왔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던 검푸른 하늘 역시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둡게 잠겨 있었다.

에이몬은 하던 생각을 멈추곤 몸을 작게 웅크렸다.

일족의 발정기는 대부분 같은 시기에 찾아오기에 아이도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다.

할라와 샨티는 저와 같은 시기에 태어난 제 또래였다. 그랬기에 의식제 역시 셋이 함께 치르게 될 터.

할라와 샨티는 아마 그들의 부모가 참관인이 되어 축하해 줄 게 분명했다.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블론디나가 꼭 와주었으면 좋겠다.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숲에 데려올 날을 상상했다.

표범 신수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짐승이기에 아이들끼리 훈련하거나 신수 일족의 정기모임이 있는 날 외에는 이 드넓은 숲에 띄엄띄엄 떨어져 살았다.

에이몬이 황궁을 드나들며 블론디나와 노닥거려도 들키지 않은 이유가 그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이었다.

꽃덤불 뒤에 신전 모양의 에이몬 집이 있었다.

아름다운 숲 한가운데서 달빛을 오롯이 받는 고요하고 신비로운 장소.

전엔 초대하지 못했으나 참관자로 한번 얽히면 그 핑계로 친분이 생겼다며 데려와도 괜찮겠지.

에이몬은 눈을 감고 몸을 더욱 웅크렸다. 커다란 숲이 더욱 크게만 느껴졌다.

한참을 홀로 누워 있다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덤불 속에서 몸을 일으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을 보아 시간을 가늠해 본다.

잠시 후 작은 짐승이 숲을 떠났다.

***

새벽 특유의 시린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루시는 소리 나지 않게 바닥을 밟으며 블론디나 방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다. 주위는 적막했다.

블론디나의 기상 시간은 보통 정오에 가까울 때였으나 약속한 바가 있어 미리 깨우러 가는 것이었다.

‘새벽이 되자마자 황녀님과 사냥터에 가기로 했지.’

저번에 사냥터 근처에서 보았던 야광 버섯을 떠올려 본다. 잠이 오지 않는 밤, 함께 밖을 서성이다 발견한 그것을 오늘 새벽에 다시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두 여자아이가 무료한 황궁 생활 안에서 얻은 작은 흥밋거리였다.

“황녀님…….”

어느새 문 앞에 다다랐다.

루시는 저조차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블론디나를 불렀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문을 두드릴까 하다가 그냥 열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자그마한 탁자를 지나, 소파를 지나 가림막을 돌았다. 곧 블론디나의 침대가 나왔다. 침대 옆 열린 창문 아래, 푸른 달빛이 평온히 흐르고 있었다.

루시는 소리 죽여 블론디나에게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헉.”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그 자리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놀라움과 두려움에 범벅되어 미친 듯 요동쳤다. 누군지 모를 이가 블론디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남자의 커다란 손이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쓸어올리다가 떨어졌다.

단단해 보이는 너른 어깨. 앉아 있음에도 느껴지는 체구와 키.

하지만 큰 체구임에도 둔탁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민첩한 맹수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루시는 소리 질러 옆 방 하녀에게 침입을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문과 공포가 새겨진 눈동자만이 불안하게 흔들릴 따름이었다.

누구야. 누구지. 누구기에.

저와 황녀님을 해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몸이 벌벌 떨렸다.

아니,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저 정적인 얼굴로 앉아 있는 남자의 위압감으로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것이었다. 마치 피에 새겨진 본능처럼.

블론디나를 응시하던 남자가 시선을 들어 고개를 돌렸다.

곧 적막한 고요 틈으로 루시와 낯선 남자의 눈빛이 마주했다.

남자의 아름다운 낯은 무감정했고 표정은 차분했다. 누군가 있다는 걸 애초에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불꽃이 튀는 듯 빛나는 눈동자 안에는 마치 짐승 같은 날 것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루시는 입술을 달싹였다. 불안함이 피어오르는 지금, 저와 눈을 마주하는 사내의 낯에서 누군가를 떠올린 탓이다.

선명한 자안.

너무도 낯설었으나 묘하게 익숙했다.

“저…….”

얕은 호흡을 내뱉고는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었다.

동시에 남자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쉬……. 블론디나가 깨지 않게 조용히 하라는 소리 없는 신호였다.

루시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고개를 가까스로 끄덕였다.

남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요요히 빛나는 달빛 아래 비치는 황홀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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