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웠더니 짐승-20화 (20/121)

# 20

#20화

블론디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러다가 이내 진심으로 픽 웃고야 말았다.

‘에이몬이 지켜보고 있나 보네.’

걱정이라도 된 걸까. 혹여 저번처럼 무시당하거나 소외당할까 봐 신경 쓰였던 걸까.

자그마한 귀가 삐죽 나왔다가 사라지고 여기저기를 부산스레 돌아다니다가 다시 숨었다.

방금까지 치밀었던 미약한 우울함이 대번 사라졌다.

어쩜 저런 존재가 있는지.

있는 대로 신경질은 다 부리다가도 저렇게 남몰래 챙겨 준다. 그게 퍽 기특하고,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위대한 신수님을 귀엽게 여기는 건 꽤 불손하고도 불경한 태도겠으나 자신에게 에이몬은 그런 존재였다.

다시 고개를 들어 황제와 아델라이 황녀를 보았다. 아까처럼 속이 답답하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빳빳이 든 후 절 향해 말을 건네는 사신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고귀한 황녀답게. 누구보다 의젓하게.

아델라이를 다독이던 황제가 다시 시선을 돌려 블론디나를 응시했다.

흡족한 듯 그의 입꼬리가 다시 웃는다.

그의 마음속에서 블론디나를 향한 인상이 온전히 달라졌다. 어느새 신용과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황제는 미소 지었다. 제 팔에 매달리는 아델라이의 어깨를 대충 두드려 주며.

몇 시간 후. 별궁으로 돌아온 블론디나는 하녀를 내보내자마자 창밖을 향해 외쳤다.

“어디 있어?”

주어 하나 없는 질문이었다. 메아리처럼 큰 목소리가 울렸으나 답은 없었다. 하지만 블론디나는 씩 웃고는 다시 외쳤다.

“에이몬! 있는 거 다 알아! 잠깐만 나와 봐!”

확신으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제야 어둠에 물든 수풀이 들썩거렸다.

곧 어둠보다 더욱 까만 표범이 톡 튀어나왔다. 새까만 몸은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맹수의 눈동자는 아름다운 불빛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왜 몰라. 넌데.”

은밀한 잠행과 미행이 표범의 특기라더니. 비죽비죽 나온 귀도 숨기지 못하면서. 블론디나는 작게 키득거리며 에이몬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에이몬은 일말의 고민 없이 그녀의 품으로 쏙 뛰어들었다.

자그마한 새끼 표범을 꼭 껴안으며, 블론디나는 까만 털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 걱정했어? 그래서 또 따라온 거야?”

에이몬은 머쓱한 듯, 대답 없이 블론디나의 팔목만 앙앙 물었다.

간지러워, 라고 웃은 블론디나가 고개를 내려 에이몬의 털에 제 뺨을 비볐다.

“넌 꼭 내 호위 기사 같아. 그때 풀숲에서 널 만나기를 잘했어. 그렇지 않았다면 난 지금까지 혼자였을 텐데.”

「…….」

“사실 아까 파티장에서 조금 외로웠거든. 그런데 네 귀 보자마자 그 감정 싹 사라졌어. 다 네 덕이야.”

블론디나의 말이 작게 사그라들었다.

에이몬은, 제게 뺨을 비비는 블론디나를 앞발로 톡톡 두드리더니 이내 슬쩍 밀어냈다. 그리고 블론디나가 팔에서 힘을 풀자 그 품에서 벗어나 풀쩍 뛰어내렸다.

다시 어둠 속에 나타난 건, 작은 표범이 아닌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마치 방금 전 창가에서 블론디나가 그러했듯 제 품에 안기라며.

블론디나는 어색하게 굳은 모습으로 눈만 굴렸다. 거미줄에 꽁꽁 묶인 듯 발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에이몬이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온기가 담겼다.

“뭐 해. 이리 와.”

아……. 블론디나는 저도 모르게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소년의 품에 안겼다.

방금까지 제가 안아 주던 존재가, 지금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 간극이 생경하면서도 낯설어 자꾸만 숨이 찼다. 호흡이 힘들었다.

소년 주제에. 소년 주제에 짐승 출신이라고 품은 커서는.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게 어딜…….

머리가 어지러워, 블론디나는 괜히 말도 안 되는 생각만 머릿속으로 나열했다.

블론디나의 등을 위로하듯 쓸어 주며 에이몬이 잔잔히 말했다.

“잊지 마, 블론디나. 넌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강하고, 위대한 종족에게 무한한 애정을 받는 사람이란 걸.”

“……지금 네가 네 입으로 멋지고, 강하고, 위대하다고 말하는 거야?”

귓가에 에이몬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블론디나는 다시 생각했다. 어린 게! 자그마한 새끼 표범 주제에 왜 이렇게……!

블론디나를 두른 팔에 힘주어 끌어안으며 에이몬이 다시 속삭였다.

“외로워하지 마, 브리디. 넌 내게 유일한 존재니까.”

“…….”

블론디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꼭 감았다. 늘 자신이 품기만 했던 자그마한 온기였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커다랗고 따뜻한 걸까.

쏟아지는 달빛마저 따듯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

블론디나의 목에는 항상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가느다란 금빛 줄에 걸려 우아하게 늘어진 반지 펜던트.

제 아비인 황제가 어머니께 주었던 반지는 서랍 속 깊숙이 화석처럼 들어 있었으나, 에이몬이 준 반지는 늘 블론디나와 함께였다.

몇 년을 달고 다니자 이제는 떨어뜨리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제 곁에서 뒹굴뒹굴하는 작은 표범만큼이나 익숙해진 것이다.

스물. 이제 갓 성인이 된 나이. 블론디나는 이제 손가락에서 반지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성장한 블론디나는 아름다웠다.

우아한 낯빛과 침착한 음성. 은은하게 웃는 얼굴은 안개를 가로지르고 내리쬐는 햇살같이 아름답다고, 일각에서는 황홀한 얼굴로 칭송하고는 했다.

제 모친인 릴리를 무섭도록 닮은 모습이었다.

애초에 황제가 그 외모에 빠져 아이까지 낳았을 정도이니 굳이 반지르르한 묘사를 하지 않아도 ‘아름다우시다’라는 평 하나면 족할 정도였다.

자잘한 파티나 모임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늘 모임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아델라이 황녀와는 퍽 다른 양상이었다.

하지만 블론디나의 부재에도 사람들은 ‘비밀에 싸인 블론디나 황녀’에 대해 속살거리고는 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성장한 황녀는, 여전히 작고 조그마한 표범과 함께 뒹굴거리며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비밀에 싸인 아름다운 황녀라는 수식어와는 영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헝클어진 머리로.

“에이몬. 넌 언제 성장해?”

화려한 문양의 양탄자 위를 뒹굴거리며 블론디나가 물었다.

작은 표범이 흘려넘기듯 작게 답했다.

「뭐…… 언젠가는…….」

제대로 된 대꾸는 아니었다.

블론디나는 발가락으로 에이몬의 등을 문지르다가 옆에 누워 있는 루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따뜻한 볕이 노곤했는지 루시는 잠들어 있었다. 루시의 뺨을 톡톡 건드리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루시. 일어나. 이제 해가 지고 있어.”

블론디나가 일어나라며 건드린 이는 루시였는데, 잠에서 깬 건 다른 생명체였다. 바로, 루시 머리카락에 파묻혀 고롱고롱 자고 있던 작은 참새.

“네? 해가 졌어요? 벌써? 왜 나 안 깨웠어요? 나 아직 저녁도 안 먹었어!”

밥은 안 먹었지만 배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마제또는 억울한지 양탄자 위를 다다다 뛰어다녔다. 에이몬이 부산스럽다며 볼록 나온 배를 꾹 누를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꺅! 참새 살려! 못된 신수가 선량한 참새 죽이네! 아이고오-!”

마제또는 에이몬의 앞발에 눌린 채 작은 날개를 파닥거렸다.

몇 년을 함께하자, 에이몬에게 ‘못된 신수’라 짹짹거릴 수 있을 만큼 간이 부은 마제또였다. 신수에게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날짐승.

마제또의 엄살에 루시가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블론디나는 루시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상냥히 말했다.

“늦기 전에 가서 푹 쉬어, 루시. 피곤할 텐데.”

황녀가 시녀에게 보이는 태도치고는 너무도 다정했으나 애초에 둘의 관계가 그러했다. 시녀와 황녀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라 말하는 게 더욱 어울렸다.

루시가 머쓱하다는 듯 말을 늘이며 웃었다.

“제가 피곤할 게 뭐 있어요, 황녀님. 차 마시고 늘어지게 잔 게 다인데…….”

“그래도 요새 피곤할 거 아니야. 주말에도 못 쉬면서.”

최근 루시는 신부 수업을 시작했다. 밤새 자수를 놓고 휴일엔 집으로 돌아가 밤새 가문 집사에게 시달린다고 했다.

아직 신랑감은 없지만 나이가 찼으니 귀족 자제로서 해야 할 당연한 행보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블론디나는 일찍 루시를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블론디나 발치에서 뒹굴거리던 에이몬이 슬쩍 몸을 일으켰다.

「벌써…… 벌써 가, 루시?」

쭈삣쭈삣 말을 거는 것이 영 이상했다.

최근 에이몬은 늘 그랬다. 루시가 돌아가 블론디나와 단둘이 되기만 하면 초조한 표정으로 앞발을 꿈지럭거렸다.

부산스레 방 안을 혼자 빙빙 돌기도 했다. 블론디나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불안해 미치겠다는 듯.

그럴 때마다 블론디나는 생각했었다.

‘나랑 둘이 있기 불편한가……? 혹시 루시를 좋아하는 건가?’

에이몬과 가장 친한 건 늘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에이몬에게서 우선순위가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최근 에이몬의 언동으로 유추해 보건대 그건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라 사실인 것 같기도 했다.

음. 약간 서운해. 블론디나는 입을 삐죽였다.

“루시가 가는 게 그렇게 서운해? 내가 대신 놀아 줄게.”

에이몬의 작은 몸을 덥석 안아 뺨을 비볐다.

「으악!」

에이몬이 앞발로 블론디나의 두 뺨을 밀어냈다.

어라? 진짜 왜 이렇게 밀어내? 왠지 오기가 생긴 블론디나는 다시 억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결국, 우당탕퉁탕 난리가 났다.

꼬리로 손등을 내리치고 온몸을 뒤틀며 난리를 치던 에이몬은 블론디나를 아프지 않게 하는 선에서 바둥거리다가 어렵사리 탈출했다.

에이몬의 작은 몸이 창가로 후다닥 뛰어갔다. 커튼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 내민다.

초조한 기색으로 삐죽삐죽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블론디나는 내심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내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다니.’

요새 항상 저랬다. 저렇게 피하기만 한다.

예전에는 자신이 에이몬의 콧등에 뽀뽀하건, 그 작은 몸을 꼭 껴안건 축 늘어져 자포자기하더니. 요새는 왜 저렇게 빠져나가지 못해 안달일까.

이제 좀 컸다고 제 작은 표범이 늘 품 안을 벗어나 버린다.

곱고 예쁘게 잘 키운 소중한 것을 빼앗긴 듯한 느낌마저 드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 눈에는 아직 너무 귀여운 아기 표범인데.’

심지어 최근에는 인간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어여쁜 소년 모습을 보고 싶은데 도통 보여 주지를 않는 것이다.

같은 소년, 소녀 모습이었을 땐 설렘으로 인해 마주하기가 퍽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성장하고 소녀 티를 조금씩 벗어 가자 에이몬의 소년 모습에 흐뭇하기만 했다.

물론, 예쁜 속눈썹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나 정적인 얼굴로 차를 마시는 모습.

그런 에이몬을 마주하노라면 심장 깊숙한 곳이 저릿하게 울리곤 했으니 애써 외면한 것에 가깝기는 했다.

저 어린애를 상대로 무슨 기분이야, 라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