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19화
시녀 루시가 들어오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황녀님. 날씨가 화창하지요?”
“응, 루시. 잘 잤어? 품 안의 그건 뭐야?”
루시는 푸른 이파리가 달린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품에 안고 들어온 참이었다.
“저희 가문 시종이 오늘 절 방문했는데, 저번에 부탁했던 걸 가지고 왔기에…….”
빙긋 웃은 루시가 에이몬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갔다. 그러곤 살며시 눈을 뜨는 에이몬에게 눈으로 인사했다.
“에이몬 님도 그간 잘 지내셨어요? 최근 안 보이셔서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에이몬은 대충 대꾸하고는 제 앞에 다가온 루시의 손등을 톡 쳤다. 나름의 인사였다.
그런 후 루시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냥냥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남자애 갔대.」
“네?”
「꺼졌대.」
“아, 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물어보았자 에이몬의 성격상 제대로 된 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아 상냥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루시는 곧 품에 있던 나뭇가지를 내려 에이몬의 앞에 스윽 밀어 넣었다.
「이게 뭐…….」
순간 에이몬의 동공이 커졌다.
눈을 끔뻑이며 제 앞에 있는 나뭇가지 향을 맡고 발바닥으로 툭툭 두드려 본다.
“고양이가 좋아하는 식물이래요. 혹시 몰라서 가지고 와봤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나뭇가지를 홀린 듯 바라보던 에이몬이 그것을 가슴팍에 껴안고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 경계했으나 밀려오는 충동을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앞발로 단단히 움켜쥐고 앙앙거리며 이빨로 물었다.
타각타각-. 날카로운 이빨이 나뭇가지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도 아니면서 고양이처럼 보이는 열렬한 반응이었다.
“에이몬. 송곳니 괜찮아?”
양탄자 위에 앉은 블론디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나뭇가지에 긁혀 이빨이 갈릴 수도 있지 않은가.
에이몬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술에 취한 고양이처럼 헤롱거리는 반응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대꾸도 없는 에이몬을 향해 짓궂게 다시 물었다.
“에이몬. 나야, 이 나뭇가지야?”
아까 에이몬이 건넸던 ‘나야, 걔야’라는 질문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물어보았다.
흥분 상태에 빠져 있던 에이몬이 고개를 들었다.
곧, 껴안고 뒹굴던 나뭇가지를 대충 내팽개친 에이몬이 잔바람에 휩싸였다. 그러자 보송한 솜뭉치 대신 아름다운 소년 한 명이 나타났다.
블론디나는 흠칫 몸을 들썩였다. 언제 보아도 인간 모습의 에이몬에게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마주하면 자꾸 심장이 쿵쿵거려서. 마음이 두근거려서.
에이몬은 스륵 몸을 떨궈 블론디나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블론디나의 몸이 더욱 굳었다.
제 무릎을 베고 절 가만히 올려다보는 에이몬의 얼굴이 오늘따라 참으로 말갛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 사이로 아름다운 자안이 사라졌다가 다시 반짝거렸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에이몬이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느릿하게 웃었다.
“당연히 너지, 브리디…….”
평소보다 나른하게 늘어진 듯한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속삭여졌다.
슬쩍슬쩍 닿는 에이몬의 손끝이 간지럽다. 인간보다 조금 뜨거운 체온 때문일까. 온기가 스칠 때마다 살갗이 불에 닿은 듯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조금 풀린 눈으로 절 올려다보는 에이몬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이따금 보는 인간 소년의 모습이 이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나뭇가지 따위가 에이몬을 이상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블론디나는 숨을 삼키며 목울대를 꿀꺽 울렸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올려 아래뺨까지 부드럽게 건드려 댔다.
간질간질. 어쩐지 으슬으슬한 감각이 블론디나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혼잣말하듯 목소리를 내리눌러 물었다.
“거, 거짓말. 아까 그거 엄청나게 좋아했으면서.”
처음으로 에이몬 앞에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야, 브리디, 너야. 너밖에 없어…….”
감겨 드는 목소리에 블론디나는 결국 눈을 꾹 감았다.
진짜 근질거려. 앞발로 만질 때는 털이 살랑거려서 간지러웠는데, 지금은 뭔가 많이 달랐다. 간지러움과는 다른 감각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에이몬의 붙어 오는 체온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낯설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느낌.
한동안 블론디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제 무릎에 누운 에이몬의 접촉을 견뎌 냈다.
눈치도 없는 마제또가 달려들어 훼방 놓을 때까지.
***
“제국의 빛나는 황족을 뵙습니다.”
절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보내는 사신을 향해, 블론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칠라 왕국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부디 평온히 지내다 가시기를.”
또랑또랑하고도 당당한 목소리로 인사를 전하며 손을 내밀었다. 사신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최근, 시칠라 왕국과 제국 사이에 무역 협정이 체결됐다. 그것을 기념하여 시칠라 왕국의 왕자와 대표 귀족 몇몇이 제국을 방문한 참이었다.
그다지 커다란 행사는 아니었으나, 황족 모두가 모여 그들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는 참이었다. 블론디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신을 향해 눈으로 웃으며 조용히 손을 뻗는 블론디나의 몸짓은 우아했다. 그 누구도 ‘황녀’라는 신분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기도 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몸짓, 걸음마다 달라붙는 차분함. 누가 보아도 황녀 그 자체였다.
이건 블론디나가 스스로 체득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시녀 루시 헤리브의 노력이라고 하는 게 맞았다.
소중한 황녀님이 누구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도록, 루시가 찰싹 달라붙어 손짓 하나, 눈짓 하나 교정해 댔던 것이다.
지금은 한미한 가문으로 격하되었으나, 헤리브 백작가는 대대로 유서 깊은 집안이었다.
루시의 모친인 헤리브 백작 부인은 한때 고위 귀족의 예절 선생님으로 가정교습을 다닌 전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루시가 블론디나의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블론디나, 아델라이 황녀, 라르트 황자의 인사를 차례차례 받은 사신이 황제를 향해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이며 호쾌하게 말했다.
“황자님과 황녀님들께서 이토록 우아하시니, 폐하는 늘 기쁨이시겠습니다.”
황제는 답 없이 사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떼었다.
슬쩍, 눈짓으로 블론디나를 훑는다. 고개를 살짝 든 채 허리를 펴고 서 있는 아이.
저 아이가 얼마 전만 해도 더러운 흙바닥을 구르던 평민이었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황제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비천한 무지렁이를 제 손으로 건져 내어 고귀한 보석으로 깎아 놓았다는 사실이 짐짓 자랑스러운 탓이다.
제 딸아이의 삶을 구원해 준 것이 마치 저같이 느껴져 흡족스럽기도 했다. 여기저기에 내보이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덧붙여…….
“어멋!”
커다란 뱀이 제 곁을 지나자 아델라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고야 말았다. 흠칫 움츠린 어깨로 주춤 물러섰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똑바로 섰다.
이번에 방문한 시칠라 왕국은 뱀을 고양이처럼 다루는 종족이었다. 세가 약함에도 그들을 쉬이 무시할 수 없는 건 그러한 특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뱀과 늘 한 몸처럼 다니는 그들이었기에 이번 방문 역시 목에, 어깨에, 손목에 뱀을 두른 채 왔는데 웬만큼 간이 크지 않은 이상 쉭쉭거리는 뱀을 보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영 힘들었다.
사신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아델라이 황녀에게 말했다.
“물지 않습니다. 웬만한 인간보다 영민하니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두려운 것이 아니다!”
아델라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파리하게 질린 입술은 숨기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낯에 두려움을 올리지 않은 이는 딱 둘이었다.
제국의 태양, 황제와 블론디나. 둘을 빼고는 의젓한 기사조차 조금 흠칫거리며 제가 든 검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뱀이 돌아다니건 말건, 제 발목을 타고 오르건 말건 흐트러짐 하나 없는 블론디나. 제 딸을 보며 황제는 더욱 흡족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무릇 위대한 황족이 가져야 할 태도가 그것이었다. 어느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는 대범함. 쉽게 동요하지 않는 의연함. 어느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배포.
그 모든 걸 지금 블론디나가 가장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한편, 블론디나는 제 무릎을 툭툭 건드리는 코브라의 머리를 귀찮다는 듯 툭 밀었다. 두려울 법하나 실상 그렇지도 않았다. 모든 건 에이몬 덕이었다.
에이몬이 아무리 귀여운 새끼 표범 모습이라고는 해도, 인간이라면 무릇 그에게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본능적인 공포로 몸을 움츠려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질리도록 에이몬을 마주한 블론디나는 맹수가 주는 공포에 너무도 익숙해졌다.
신수가 내뿜는 살기 따위를 ‘에이몬이 오늘따라 까칠하네…….’ 정도로 치부하며 지냈는데 이깟 일반 뱀에게 무서움을 느낄 리가.
가장 무서운 신수를 애완 고양이처럼 키우다 보니 누구보다 의연하고 대범해졌다. 에이몬이 준 위대한 선작용이었다.
블론디나 곁에 다가온 황제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삭였다.
“의연하구나, 블론디나. 이제 황족이 다 되었어.”
“감사합니다. 모두 폐하의 관심과 가르침 덕입니다.”
블론디나의 답에 흡족함을 느낀 듯, 황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순간 멀리 떨어진 아델라이의 눈이 뾰족해졌다. 황제와 블론디나, 둘 사이에 느껴지는 다정한 기류가 영 거슬린 탓이다.
심지어 블론디나는 뱀이 절 휘감는데도 공포 하나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는데, 그 사실에 더욱 불쾌해졌다.
‘억울해! 천하게 자라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이지!’
속으로 자기합리화의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어금니가 꽉 물렸다. 내심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 아비인 황제가 ‘황족의 자질’을 그 얼마나 중요히 생각하는지 잘 알았기에.
이러다 황제의 자질에 더욱 어울리는 이는 블론디나라고 할까 봐 무척이나 두려웠다.
천한 핏줄인 블론디나가 황제가 되는 건, 제국이 두 쪽 나는 것보다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알면서도.
블론디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아비인 황제에게 사랑받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칭찬이란 걸 받게 되자 살짝 마음이 떨려 온 것이다.
그가 인정하는 가족의 범위 안에 들어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다음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다시 고개를 살짝 떨구고 말았다.
“폐하……. 부끄러우나 저는 아직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아 무서워하고 말았습니다…….”
응석 부리듯 중얼거리는 아델라이 황녀를 황제가 꼭 안아 준 것이다.
“아델라이는 아직 더 커야겠구나. 아직은 짐의 품 안에서 보호받아도 좋다.”
블론디나는 못 본 척 고개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이제 황족이 다 되었어.”
제게 중얼거렸던 황제의 발언을 떠올려 본다. 동시에 아델라이를 향해 온화히 말하던 황제의 목소리 역시 상기한다.
“아직은 짐의 품 안에서 보호받아도 좋다.”
아비의 인정을 받은 것 같아 조금 기뻤으나 거기까지였다.
여전히 그의 딸은 아델라이 황녀였고 본인은 이제야 겨우 황족의 경계선에 발을 디민 불청객일 뿐이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는 가족의 존재는, 저에게 없었다. 아무리 칭찬받는다 한들 딱 거기까지였다.
그 현실이 퍽 씁쓸했다. 애써 고개를 내저으며 손끝을 꿈지럭거리는데, 금색 창틀 위로 까만 무언가가 삐죽삐죽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