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13화
블론디나는 꽃차 상자를 내동댕이치고, 필립의 정강이에 상자를 던진 에이몬의 행태를 꼬집으려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뭐, 언제는 저 제멋대로인 신수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던가.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아 신경질 좀 부린 것일 터.
어느새 초콜릿 쿠키를 들고 나온 루시가 접시를 에이몬 앞에 밀어 주었다. 에이몬은 쿠키를 먹는 대신 앞발로 꽃차 병을 딩굴딩굴 굴릴 따름이었다.
「이딴 풀 쪼가리를 선물이라고.」
그 말에 대답한 건 루시였다.
“에이몬 님. 그거 꽤 비싸요. 희귀한 꽃을 말린 거라서.”
「뭐? 이까짓 게. 내 화단에 핀 꽃이 더 예쁘겠네.」
에이몬이 앞발로 병을 눌러 그대로 깨뜨려 버렸다.
파창! 양탄자 위에 떨어져도 깨지지 않았던 두꺼운 유리병이 마치 설탕 과자처럼 깨졌다.
보아도 보아도 놀라운 힘이건만, 블론디나는 놀라는 대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다.
“에이몬. 앞발 괜찮아? 안 다쳤어?”
병보다는 에이몬의 발바닥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귀여운 발바닥에 상처라도 나면 곤란하니까.
에이몬은 제 앞발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는 블론디나에게 마구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인간 남자는 왜 온 건데? 초대장은 왜 주는 거야? 이깟 꽃차는 왜 주는 거냐고.」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입술만 달싹였다.
쏟아지는 에이몬의 질문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무엇부터 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루시가 웃는 얼굴로 에이몬을 말렸다.
“에이몬 님. 차근차근 물으셔야 황녀님께서 대답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에이몬의 신경질은 풀릴 줄을 몰랐다.
「인간은 원래 생일파티 초대를 직접 해?」
“나도 잘 모르겠어. 난 황녀니까 더 예의를 차린 건 아닐까?”
「꽃차는 왜 주는데?!」
“방문 선물로?”
브로치도 받았다고 하면 그것마저 부술까 봐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왜! 왜 그러는 건데! 이렇게 직접 찾아오고!」
“……글쎄.”
내가 그 속마음을 어찌 알겠어? 블론디나는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왜인지 알고 싶은 건 에이몬보다 자신이다. 필립이라는 공자가 아델라이와 작당하고 절 놀리려는 건지, 아니면 정말 단순한 호의인 건지.
에이몬이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험하게 되물었다.
「네가 그걸 모르면 어떡해!」
앞발을 휙휙 휘두르자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체스 말이 위로 험하게 날아갔다.
상아로 만들어진 체스 말이 텅그렁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체스 말에 폭력적인 에이몬.
하지만 동네 건달처럼 행패를 부리는 모습조차 깜찍하다. 귀여운 외모가 주는 긍정적 효과였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성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차박차박 다가가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에이몬은 화내던 그 표정 그대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품으로 폴짝 뛰어 들어갔다. 말하자면 습관에 따른 본능적 행동이었다.
그리고 블론디나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낭패라는 듯 예쁜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이상하다. 화를 내고 있었는데 왜 블론디나의 품에 안겨 있는 걸까. 이 빌어먹을 습관 같으니!
위대한 표범 신수 일족이 지금 이 인간 소녀의 애완 고양이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기분이 좋아져 자신도 모르게 자꾸 꼬리를 흔들게 된다.
성내던 걸 잊고 인간에게 폭 안겨 버리다니! 심지어 이 품을 떠나고 싶지 않아 자꾸만 고개를 인간 여자의 팔목에 기대게 되다니!
이건 치욕이었다.
블론디나가 픽 웃으며 품 안의 에이몬을 쓰다듬었다.
블론디나의 손길이 가만가만 닿을 때마다 신경질적이었던 작은 표범의 표정이 노곤노곤 풀렸다.
“에이몬. 진정해. 갑자기 왜 그렇게 화를 내.”
에이몬은 결국 블론디나의 가슴팍에 제 콧잔등을 느릿하게 비비며 한숨같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내가 왜 화를 냈지?」
“나도 모르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이몬이 물끄러미 블론디나를 올려다봤다.
「파티 갈 거야?」
“생각해 보고. 어쨌든 난 황녀잖아. 애써 그런 자리를 계속 피하는 것도 조금 그래.”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음에도 당분간 파티는 불참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번 일이 마음에 걸렸다.
다시 아델라이 황녀 일당이 찾아와 고대어를 쓰며 절 무시하면 정말 상처받을지도 모르니까.
고대어는 고귀함의 상징이니 귀족이나 황족끼리 구전으로만 교육한다고 들었다.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 혹은 황족 남매에게 알려 달라 할 수 없으니 자신은 평생 가도 고대어는 모를 거다.
언제까지나 피할 수만은 없을 텐데.
속이 조금 씁쓸해졌다. 앞으로 어찌하면 좋으려나. 무시당하는 거 더는 싫은데.
그런 블론디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에이몬이 앞발로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브리디.」
“응?”
「고대어 배울래?」
블론디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신수라서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있는 걸까?
저번 파티장에서 따라왔다가, 고대어로 봉변당하는 걸 보고 이렇게 배려해 주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고대어는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그거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운대. 책도 없어서.”
「내가 가르쳐 줄게.」
“에이몬, 고대어도 할 줄 알아?”
블론디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에이몬은 턱을 살짝 들며 뻐기는 듯한 얼굴로 귀를 쫑긋거렸다.
「당연하지. 난 위대한 표범 신수 일족이라고. 고대부터 고귀한 피가 이어진.」
“세상에! 응! 응! 좋아! 고마워!”
이내 활짝 웃은 블론디나가 에이몬을 꽉 껴안았다.
순간 깜짝 놀란 에이몬이 꼬리를 바짝 세웠으나 이내 블론디나가 절 빙글빙글 돌리고 주물럭거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맡겼다.
그래. 이런 취급이 한두 번이냐. 게다가 아까는 자의로 안겨 버렸는데.
잠시 후, 별궁 소속 하녀는 조금 바빠졌다. 예쁜 깃털 펜과 종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생각난 김에 당장 한다는 듯, 에이몬이 이것저것을 가져오라며 시켰기 때문이다.
어딘가를 다녀온 하녀가 품에 잉크와 깃털 펜, 그리고 고급스러운 종이를 한아름 가져왔다.
에이몬은 테이블 위에 와르르 쌓여 있는 종이 뭉치와 깃털 펜을 앞발로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며 블론디나는 호쾌하게 웃었다.
저 앙증맞은 앞발로 펜을 쥘 수나 있을까.
에이몬이 깃털 펜을 입에 물고 종이 위를 걸어 다닐 상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귀여웠다. 혹시 발바닥에 잉크라도 묻으면 그 앙증맞은 발바닥이 종이 위에 점점이 찍히겠지.
‘어떡해. 너무 귀여워.’
꼭 보고 싶었다. 종이 위에 꾹 찍힌 새끼 표범의 발자국 모양을. 평생 간직해야 할 그림일 터다.
자그마한 표범이 우아하게 앉아 깃펜을 앞발에 꾹 쥐고 있는 모습 역시 떠올렸다.
‘얼른 보고 싶다.’
깜찍하고 사랑스럽고 깨물어 주고 싶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블론디나의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미풍에 얇은 커튼 천이 하늘하늘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테이블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작은 표범이 어느새 인간의 발로 양탄자를 밟고 섰다.
“…….”
블론디나와 루시는 저들 앞에 선 아름다운 소년을 꿈결같이 응시했다. 방금까지 귀여운 표범 새끼였던 에이몬을.
에이몬은 하얀 종이를 천천히 쥐어 들어 정적인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소년의 내리깐 속눈썹 끝으로 볕이 우아하게 걸렸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의 얼굴 위에 드리운 섬세한 속눈썹 그림자와 예쁜 입술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화사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아까부터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이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에이몬이 종이를 내리며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사뭇 다정함을 품고 있다.
“자, 브리디. 이제 날 마음껏 부려 먹어 봐.”
에이몬의 음색이 달콤하게 속삭여졌다.
블론디나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목소리에 홀려 알고 있던 제국어마저 잊어버릴 판이었다.
어디서인가 부드러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지금 둘은 고대어 공부를 위해 창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참이었다.
어디서 놀다 들어왔는지 깃에 민들레 씨를 잔뜩 묻히고 온 마제또가 외쳤다.
“와! 에이몬 님! 잘생겼어! 멋있어! 예뻐!”
“…….”
“왜 이렇게 잘생겼어요? 네? 네? 난 인간이고 표범이고 잘생긴 게 좋더라!”
호들갑 떨며 테이블 위를 쫑쫑 뛰어다니던 마제또는 기어코 에이몬 손등에 제 뺨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계속 인간 모습으로 있으면 안 돼요? 네? 네?”
에이몬은 귀찮다는 듯 제 손가락 사이에 엉기는 마제또를 손끝으로 툭툭 밀었다.
“가. 브리디랑 공부해야 돼.”
하지만 마제또가 도통 떨어지지 않자 손으로 작은 새를 꽉 움켜쥐었다. 어금니를 꽉 문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꽥! 하고 소리 지른 마제또가 다급하게 외쳤다.
“잘못했어요! 먹지 마세요! 살려 주세요!”
“…….”
에이몬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마제또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창문 밖으로 휙 던져 버렸다. 멀어지는 마제또의 외침이 허공 속에 울렸다.
“에이몬 니이임-!”
“시끄러운 놈.”
쯧, 하고 혀를 찬 에이몬이 다시 깃펜을 들었다. 다시 조용해졌으니 공부를 시작하자는 의미 같았다.
블론디나는 바람과 함께 코 아래로 스며드는 에이몬의 향기로운 내음을 느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왜지.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아무튼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에이몬. 왜 갑자기 인간으로 변했어? 그냥 표범으로 있지.”
“내가 인간형이면 싫어?”
마제또는 엄-청 좋아하는데. 에이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질린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건 아니고 이상하게 좀 부끄러워서. 블론디나는 할 수 없는 말을 삼켰다.
보라색 예쁜 눈동자로 절 빤히 주시하는 건 아기 표범일 때나 소년일 때나 똑같은데, 왜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든 것인지 모르겠다.
에이몬이 고개를 기울이며 절 들여다볼 때마다, 예쁜 손가락으로 깃털 펜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심장에 파동이 생겼다.
“내가 표범으로 있으면 펜을 쥘 수가 없잖아.”
“그렇기는 하지…….”
블론디나는 가물가물 답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반응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펜 끝을 잉크에 담갔다가 종이 위에 구불구불 유려한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제국어였다.
고대문자는 상실됐어도 제국어로 발음 정도는 표기할 수 있었다.
“문법은 우선 뒤로하고 간단한 단어부터 외워 봐.”
“…….”
“자, 이건 찻잔. 이건 접시. 이건 나이프. 그리고 마지막 이건 포크야.”
눈을 내리깐 에이몬이 종이 위 단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단정한 손을 보며 블론디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를 어쩌지. 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네가 고대어를 쓸 장소가 티파티나 파티장일 게 분명하니 실용적인 것부터 시작하자.”
블론디나는 대답 없이 잉크병만 만지작거리다가 입술을 꾹 베어 물었다.
“왜 그래?”
“나 몰라.”
“뭘?”
“글자.”
블론디나의 입에서 날숨이 저절로 나왔다.
뒷골목을 전전하며 돈 없는 평민으로만 지내지 않았나. 글자를 배우기는커녕, 어린 소녀의 몸으로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조차 힘겨운 삶이었다.
“무식해서 미안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블론디나를 바라보던 에이몬이 이내 고개를 가만히 내저었다.
“글자야 차근차근 배우면 되는 거지.”
“그래도.”
블론디나는 풀이 죽어 고개를 쭉 내렸다.
에이몬은 나직이 웃고는 블론디나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괜찮아.”
그 나름의 상냥한 위로였다.
블론디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저 소년의 손가락 하나 닿은 것뿐인데 몸이 경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