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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2화 (12/121)

# 12

#12화

***

활짝 핀 꽃 위로 노란 나비가 맴돌다 날아갔다.

화려한 후원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쬔다. 이곳 로드슨 공작가의 후원. 그 온화한 공간에 네 명의 아이가 모여 있었다.

아델라이 황녀와 라르트 황자, 후작가의 영애와 로드슨 공작가의 공자가 그 주인공이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필립 로드슨 공자가 아델라이 황녀를 향해 물었다.

“아델라이 황녀님, 블론디나 황녀님은 어디에 기거하시나요? 황궁에 갈 때마다 마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

“그깟 천한 피에 관심을 왜 가지는 거야, 필립?”

아델라이 황녀의 표정이 급속도로 식었다.

더군다나 ‘블론디나’라는 불쾌한 이름을 올린 이가 바로 필립이기에 더욱 그랬다.

블론디나는 ‘병세가 깊어 타국에서 요양하다가 최근 황궁으로 돌아온 황녀’라고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껍데기일 뿐인 변명이라는 사실을.

황가의 비공식적인 치부. 그것이 바로 블론디나의 위치였다.

“천한 피라고는 하나, 태도는 당당하던걸요.”

“당당하다니. 천박과 당당의 차이를 잘 모르는 거 아니야? 말을 한 번이라도 섞어 보면 알 거야. 얼마나 무식한지.”

“흐음.”

“그러니, 관심도 두지 마. 그깟 버려진 황녀 따위에게.”

아델라이 황녀가 억눌린 어조로 일갈했다.

하지만 필립은 웃는 얼굴로 생각에 잠겼을 따름이다.

파티장에서 보았던 블론디나를 떠올린다.

외톨이처럼 파티장에 홀로 섰으나 눈빛이 사뭇 곧았다. 모두가 절 무시하는 상황에서도 어깨를 당당히 펴고 고개를 들었다.

어린 여자아이 주제에 달관한 듯 올리는 표정이 여유로웠으며, 유치한 공격을 쉬이 넘기는 모습이 퍽 대범해 보였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산 걸까. 필립은 어쩐지 블론디나가 궁금해졌다.

***

여느 날과 같은 오후였다.

블론디나는 시녀 루시와 함께 체스를 뒀다.

체스는 최근 루시에게 처음으로 배운 놀이였는데 주사위 게임보다 머리를 쓰는 것이라 조금 복잡했으나 배우고 나니 꽤 재미있었다.

“루시. 지금처럼 퀸이 막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해?”

“음. 비기는 거지요.”

“절대 못 이겨?”

“네. 퀸 한 개로 킹을 잡을 수는 없으니까요.”

“흐음.”

고개를 갸웃한 블론디나가 체스판을 빤히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론디나 황녀님. 손님이 오셨어요. 로드슨 공작가의 필립 공자라고 합니다.”

“응? 누구라고?”

필립?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하지만 방문인의 이름은 처음 들었을지언정 로드슨 공작가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국을 떠받치는 네 개의 공작가 중 하나 아닌가.

개국공신 출신으로 황가를 뒤이어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가문이다.

“들어오라고 해.”

블론디나는 이내 문밖을 향해 간단히 답했다.

어쨌든 공작가 출신 방문인이라고 해보았자 자신은 황족이다. 반푼이기는 하나 이제 평민이 아닌 이상 움츠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긴장한 건 맞은편에 앉았던 루시였다.

그녀 역시 백작가 출신이었으나 고위 귀족인 공작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실 사석에서는 제대로 마주한 적도 없는 공자였으니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곧 문이 열리자, 성장기 소년치고 키가 훌쩍 큰 공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필립은 방문객답지 않게 당당한 모습으로 어깨를 펴고 들어왔다. 가히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가문 자제다운 자세였다.

블론디나는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소년을 한번 훑었다.

공작가에서 왔다 하여 어른이 왔을 줄 알았는데 저보다 두세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소년이 들어오자 조금 의문이 솟았다.

게다가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이미 익숙한 상대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다갈색 머리카락에 빛을 품은 듯한 푸른 눈. 영민한 분위기의 잘생긴 소년.

일전에 파티장에서 절 비웃었던 ‘아델라이 황녀 일당’ 중 한 명 아닌가.

‘혹시 내게 시비 걸러 온 걸까? 아델라이 황녀에게 지령이라도 받고.’

블론디나의 표정에 약간의 긴장이 맺혔다.

에이몬도 없는데 혼자 상대하기는 조금 벅찬 느낌이다, 눈앞의 소년은. 왠지 모를 분위기가 그랬다.

“제국의 위대한 황족을 뵙습니다. 필립 로드슨이라고 합니다.”

“그래. 필립 로드슨 공자.”

“일전에 파티장에서 뵈었을 때는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는데 이리 마주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소년이 침착하게 웃었다.

블론디나는 체스 말을 톡톡 두드리며 마주 웃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다지 반갑지 않다고 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야 없지. 이 황궁에서 문제없이 잘 살고 싶으니.

그런 블론디나의 거리낌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필립은 블론디나의 표정을 가만히 훑었다. 그녀의 낯에 새겨진 감정을 읽는다.

하기야 그렇다. 바보가 아니라야 절 비웃으려 했던 ‘일당’ 중 하나였던 자신을 환영할 리 없지 않은가.

늘 자신을 떠받들고 대우해 주는 이들만 상대하다가 마주한 블론디나라는 황녀는 퍽 생경한 존재였다.

그녀는 아델라이 황녀 말처럼 ‘무식하다’라거나 ‘천한 티’를 내는 이 같지는 않았다.

필립은 블론디나가 절 밀어내기 전에 본론부터 꺼내기로 했다.

품을 뒤적거려 자그마한 황금빛 상자를 하나 꺼낸다. 양각으로 장식된 것이 한눈에 보아도 값어치가 꽤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별다른 일이 아니라 이것을 드리려고.”

“이게 뭔데?”

블론디나가 상자를 열었다.

루비 브로치가 보였다. 오각형의 커다란 붉은 보석 주위를 분홍빛 핑크 다이아몬드가 자잘하게 감싸고 있는 꽃 모양의 브로치였다.

햇살을 받을 때마다 잘게 빛 잔상이 일었다.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였다.

“예쁘네.”

블론디나가 밋밋하게 답했다.

가뜩이나 ‘천한’ 핏줄이 섞였다 일컬어지는데 보석을 보고 천박한 반응을 보이기는 싫었다.

“이번에 저희 소유 광산에서 모처럼 커다란 보석이 발견됐기에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아델라이 황녀님께 드리기 위해 하나 만들었는데…… 생각해 보니 제국에는 황녀님이 한 분 더 계시지 않습니까.”

블론디나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이건 공작가가 제국의 황녀를 위해 만든 것인데, 나도 황녀이니 내게도 준다 이거지.

뭐랄까……. 조금 묘한 느낌이 들었다.

황녀임에도 늘 무시당하는 게 일상 아닌가. 한데 지금 자신이 이렇게 ‘두 명 중 하나인 황녀’ 대우를 받고 있다니.

받은 브로치 상자를 루시에게 건네주어 우선 치웠다.

필립은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자그마한 상자도 내밀었다. 꽃차가 들어 있는 유리병이 담긴 상자였다.

“타국 상회에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귀한 것이니 부디.”

상자를 건네받은 블론디나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할 때였다.

밖에서 무언가 우다다 뛰어와 창문 안으로 험하게 뛰쳐 들어왔다. 블론디나의 숙소 안에서 남자의 형체를 보고 달려온 에이몬이었다.

블론디나 곁에 있던 루시가,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갔다.

“캔디! 왔니? 산책은 잘했어?!”

호들갑 떨며 에이몬을 낚아챈 루시는 버둥거리는 에이몬의 머리에 억지로 모자를 씌웠다.

에이몬이 사람의 말을 하거나 신수 티를 내기 전에 미리 하는 방어였다.

신수가 황녀님 숙소를 오간다는 소문이 돌면 조금 곤란해지니 ‘캔디’라는 애완 고양이 취급하는 것이었다.

황녀님이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숙녀이다. 에이몬은 짐승이기는 하나 수컷이다.

귀족 호사가들의 입방아는 우아하면서도 동시에 몹시 천박하다는 걸, 귀족으로만 살아온 루시는 잘 알고 있었다.

신수의 보호를 받는다며 경외하다가도 천하게 몸을 놀리는 것 아니냐며 욕할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모시는 황녀님을 그런 취급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에이몬은 버둥거리며 야옹거리다가 털모자를 쓰고서야 블론디나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짐승의 본능을 발휘하여 눈치껏 사람의 언어는 말하지 않았다. 험하고 더러운 눈빛으로 필립을 노려보았을 뿐.

“왔어?”

블론디나는 손에 들었던 꽃차 상자를 테이블에 놓고는 반가운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에이몬은 대답 없이 테이블 위에 훌쩍 올라가 필립의 얼굴을 계속 주시했다.

그 눈빛을 받는 필립은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황녀님의 애완 고양이가 절 죽일 듯 노려보는데 왠지 목덜미가 오싹하다고나 할까.

생긴 건 너무도 귀여운 고양이인데 눈매는 몹시 날카롭다. 마치 작은 고양이가 아니라 육식 동물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고양이의 시선을 피한 필립이 다시 품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은 편지였다.

“이건 뭐야?”

편지를 받아 든 블론디나가 봉투를 열자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광택 나는 글자가 박힌 게 보였다.

“제 생일파티 초대장입니다.”

블론디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초대장을 응시했다.

공작가 자제의 생일파티 초대장이라. 이걸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이것 역시 혹 절 또 비웃기 위해 초대하는 계략은 아닐지.

필립이 빙긋 웃었다.

“블론디나 황녀님께서 와주시면 감사-.”

하지만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텅그렁! 데구루루…….

필립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 무언가가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앞발을 우아하게 든 에이몬이 보란 듯 턱을 치켜 올렸다.

에이몬은, 테이블 위에 있는 꽃차 상자를 툭 밀어 떨어뜨린 참이었다.

“에이모……, 캔디야. 이걸 떨어뜨리면 어떡해. 깨질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야옹.

고양이라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에이몬은 작게 한번 야옹거렸다.

필립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방해받은 대화를 잇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황녀님께서 와주시면, 크나큰 영광- 악!”

하지만 이번에도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온 에이몬이, 상자를 확 걷어찼기 때문이다.

위험한 속도로 날아온 상자가 필립의 정강이에 명중했다.

필립은 허리 숙여 무릎을 부여잡았다가 이내 다시 폈다. 얼굴이 민망함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강이는 아팠고, 앓는 소리를 낸 상황은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 무엇도 원망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이 한 짓 아닌가. 심지어 그 짐승은 황녀님의 애완 고양이다. 끙끙거리는 신음만 삼킬 뿐 차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블론디나가 발끝으로 에이몬을 툭툭 밀고는 미안한 듯 말했다.

“미안해. 오늘 내 고양이 기분이 별로 안 좋은가 봐.”

“아닙……니다.”

에이몬은 블론디나의 발을 두 앞발로 안은 채 대롱대롱 매달렸다. 발을 휙휙 내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블론디나는 에이몬을 무시하기로 했다.

“네 파티는 생각해 보고 참석하는 거로 할게.”

“감사합니다. 고귀하신 황녀님과 함께할 수 있기를.”

필립은 제 옷매무새를 다시 단장하더니 허리를 살짝 숙여 예를 보였다.

허리를 편 필립은 이내 절 빤히 올려다보는 작은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는데, 저도 모르게 다시 시선을 내렸다.

기분 탓일까. 고양이가 비웃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상자를 던진 행동에 악의가 담겨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의 무한한 영광이 있기를.”

“응. 잘 가.”

곧 필립이 방을 벗어났다.

블론디나는 필립이 사라지자마자 에이몬의 몸을 잡고 탈탈 털기 시작했다.

“왜 그래?!”

「내가 뭐. 왜.」

에이몬은 이리저리 앞뒤로 흔들리면서도 기분 좋다는 듯 꼬리를 저으며 냥냥거렸다. 불필요하게 당당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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