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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2화 (2/121)

# 2

#2화

블론디나는 찬찬히 눈을 떴다.

사방에서 향기로운 꽃내음이 밀려들었다.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마저 훈훈했다.

아이는 눈을 끔뻑이며 천장의 호화로운 문양을 살피고 화병의 우아한 장식을 응시했다. 그러다 곧 잠꼬대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 여기 황궁이지.”

낡은 여관 다락방에서 눈을 떴어야 했는데. 눈을 뜨자 보이는 게 번쩍거리는 장식이라니.

갑자기 운명이 바뀌어 버렸다.

시골 구석 촌것에서 제국의 고귀한 황족, 블론디나 륜 아테스가 된 것이다.

아버지. 제국의 황제라는 아버지를 만난 날, 블론디나는 은밀하게 황궁으로 이송됐다.

유일하게 그녀의 신분을 알던 보석점 주인과 영주는 황제의 명령에 입을 다물었고, 마을에서는 블론디나가 납치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신매매가 횡행하는 시대다. 곧 마을 사람 누구나 수긍했다. 슬프게도, 블론디나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누워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 일어나셨으면 들어가겠습니다.”

“응.”

곧 하녀가 들어왔다. 몸을 일으킨 블론디나가 기지개를 쭉 켰다.

황녀라고는 하나 호위 하나 없이 저 하녀 한 명만이 달랑 붙여졌다. 그건 아마도.

‘내 천한 출신 때문이겠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자신은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와 황제인 아비 사이의 하룻밤 인연으로 만들어진 사생아 같았다.

더불어 천한 핏줄이 섞인 황가의 치부이기도 했고.

그것만이 지금 알 수 있는 진실이다.

물컵에 새 물을 따른 하녀가 그것을 내밀었다.

“오늘 폐하께서 티파티에 초대하셨어요. 황후궁 후원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응. 알겠어.”

이상한 일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그리 기쁘지 않았다.

“블론디나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커다란 화원 문 앞에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문득 손끝에 한기가 밀려들었다.

평생을 평민으로 살다가 갑자기 가족이 되었다며 황족을 마주하는 데 의연할 수 있을 리 없다.

안에서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시종은 블론디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황녀님. 안으로.”

짧게 손질된 풀을 밟으며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입구에는 커다란 표범 석상이 있었는데 곰보다 훨씬 큰 크기로 제작된 석상이었다.

제국을 수호하는 신성한 표범 일족을 기리는 석상.

블론디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뜨렸다. 커다란 석상을 보자 절 때리던 식당 주인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다.

큰 체구의 동물이나 사람을 보면 그렇다. 경험으로 습득한 본능적인 공포였다.

“황녀님?”

걸음을 멈추자 시녀가 블론디나를 불러왔다. 블론디나는 다시 발을 놀려 ‘가족’을 향해 조심스레 걸어갔다.

햇살이 화사하게 들어차는 정원 안. 네 사람이 있었다.

제국의 황제와 황후, 블론디나의 배다른 여동생과 남동생이 바로 그들이었다. 살짝 든 턱 끝에서 오만함이 엿보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황제가 블론디나를 불렀다.

“가까이.”

블론디나는 주춤주춤 그를 향해 다가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가 아이에게 찬찬히 걸어왔다. 그런 후 곧 블론디나의 얼굴을 들어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닮은 두 눈동자가 허공 속에 얽혔다.

“눈도 머리카락 같은 황금색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황제가 블론디나의 머리카락을 대충 매만졌다. 곧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언뜻 상냥해 보이는 미소이나 메마른 느낌의 것이었다.

“명심하라, 황녀. 네 비천한 혈통이 섞였긴 하나 그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예?”

“그 누구에게도 네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

치부. 네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을 치부로 여기고 있는 건 아버지 본인 같았다.

블론디나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했다. 황제는 블론디나의 감정을 상관도 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넌 몸이 약하여 다른 왕국에서 요양하다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것이야.”

블론디나는 별다른 행동 없이 고개만 숙였다.

“예.”

“다른 이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이 진실이다. 알겠느냐.”

“예. 언행을 조심하고 죽은 듯 살겠습니다.”

“그래. 태생은 비천하나 멍청하지는 않은가 보구나.”

비천. 그에게 제 존재는 그쯤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의 삐죽삐죽한 말이 그리 상처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잔혹한 말보다 절 더 아프게 하는 건 제 뺨을 내리치던 식당 주인의 커다란 손바닥이다.

황제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블론디나를 데리고 나가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그런 후 뒤돌아 나가려던 아이의 등을 향해 마지막 말을 던졌다.

“아아, 이 말을 하지 않았지. 황궁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나의 딸.”

“감사합니다.”

블론디나는 뒤돌아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의 딸. 나의 딸이라 말해 오는 그의 고저 없는 음색만큼 냉랭한 것이 있을까.

블론디나는 막막히 잠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제 아비가 절 부른 이유는 무얼까.

고민하지 않아도 쉬이 나올 답이다. 식당 주인에게 맞아 가며 배운 눈치가 말해 주고 있었다.

경고. 아비인 황제가 말해 오는 건 명백한 경고였다.

황녀가 됐다며 설치고 다닌다면 곤란하다. 별궁에 처박혀 죽은 듯 살아라.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은 그의 비천한 치부였으니까.

아무 말 없이 절 바라보던 황후의 낯에 어렸던 감정을 상기한다. 그것은 불쾌를 넘어선 혐오와 경멸이었다.

블론디나는 ‘저쪽 가족’의 티파티 장소를 벗어나 제 별궁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봐, 천것.”

어디서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론디나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뒤돌았다. 블론디나의 동생이자 제국의 황자인 라르트가 서 있었다.

블론디나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가 황자 아닌가. 저 역시 황녀라 하더라도 아직 익숙지 않다.

눈앞의 어린아이가 가볍게 웃었다.

“이래서 천한 피가 흐르는 것들은.”

비록 배가 다르다고는 하나, 블론디나는 저보다 나이 많은 누이였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아이가 유념할 리 없다.

아이가 푸른 눈을 반짝이며 순수한 얼굴로 웃었다.

“너. 블론디나라고 했던가.”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빈 천것 주제에 예의는 잘 배워 왔구나. 넙죽넙죽 허리를 잘도 숙이는 것을 보니.”

“…….”

“어디서 배운 것이지? 빨래터? 아니면 헛간? 혹시 귀뚜라미가 네 선생님인 건가?”

웃음기 섞인 아이의 목소리에는 경멸과 조소가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블론디나는 생각했다.

왜 갑자기 다가와 이런 시비를 거는 거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 언동이다. 저 애의 입장에서 자신은 그저 지나가는 개미만도 못한 존재일 텐데.

그러다 그의 눈 속에 담긴 혐오를 발견하고 문득 깨달았다.

그래. 무조건적인 경멸에 기인한 행동이로구나.

아무래도 절 괴롭히려는 데 이유 따위는 없는 것 같기에 블론디나 역시 생각 없이 답하기로 했다.

“귀뚜라미는 인간을 가르칠 수 없어. 그것도 모르니?”

“…….”

라르트 황자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아 들었다.

블론디나의 답이 절 비웃는 농담인지, 무식한 것의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이 무표정했기에 더욱 속내를 읽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내 절 놀리는 거라 판단하고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뭐? 이 주제도 모르는 게!”

“알아. 내 주제. 그런데 왜 갑자기 화를 내?”

블론디나가 담담하게 물었다.

주제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얼마 전만 해도 더러운 거리를 나뒹굴다가 왔는데 이런 우아한 황궁과 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뒷골목에서 욕설과 폭력을 견디며 자랐던 블론디나다.

저런 어린아이의 시비 따위로는 그녀를 손톱만큼도 상처 입힐 수 없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라르트 황자는 왜 화를 내냐는 블론디나의 질문에 정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차라리 블론디나가 화를 내거나 수치스러워했다면 기분이 좋았을 거다.

절 애 취급하는 것 같은 얼굴을 보자 괜히 이상하게 제 쪽이 놀림당하는 것만 같았다.

“뒷골목에서 굴러먹던 천한 것이 감히 황족을 비웃어?”

“비웃은 적 없어.”

블론디나는 홀로 날뛰는 황자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무섭도록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천한 피가 섞인 너 따위가 황족이라고? 난 인정 못 해!”

라르트 황자가 발을 꽝꽝 굴렀다. 블론디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내가 오고 싶어서 왔나.’

여관 주인의 폭력에서 벗어나게 된 건 좋았으나, 그뿐이다.

절 혐오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갇혀 있느니 반지 판 돈으로 홀로 살아가는 쪽이 더 행복하리라고, 블론디나는 확신했다.

블론디나는 주변을 힐끗 살폈다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내 피가 천한 건 맞는데, 반은 황제 폐하의 것이야.”

“뭐?”

“네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거 황제 폐하를 부정하게 되는 건데, 그래도 돼?”

절 인정하지 않는 건 황제 폐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황제 폐하를 인정하지 않는 건 곧 반역을 뜻한다.

블론디나는 배우지 못했을지언정 마냥 멍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라르트 황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블론디나란 천한 것을 욕했더니 저보고 폐하를 부정하는 것이란다.

순진한 척하는 계집애! 능구렁이처럼 절 약올리고 비웃는 걸 보니 아무래도 보통이 아니다.

“폐하의 피가 섞였다 하여 황족의 일원이 되었다 착각하지 마!”

“황제 폐하께서 내게 황궁에 온 거 환영한다고 하셨는데.”

“주제 모르고 설치지 말란 말이야! 네가! 네가 만약 내 수치가 된다면 난 널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내 명예를 걸고 널……!”

라르트 황자의 부들거리는 손가락이 블론디나를 가리켰다.

꼬마 주제에 협박하는 본새가 제법 그럴듯했다. 가히 권력의 꼭대기에서 살아온 아이다운 태도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론디나는 아이의 분노를 지켜만 보았다.

이 어린 나이에도 제가 지킬 명예를 위해 저렇게까지 화를 내야 하다니. 그게 황족의 기본 태도인가 싶어 조금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나도 앞으로 별거 아닌 일에 화내고 찻잔 던지고 그래야 하나……?’

저 패악을 부리는 배다른 형제는 내버려 두고 제 숙소로 가고 싶을 뿐이다.

게다가 제 아비가 경고하지 않았나. 죽은 듯 처박혀 살라고.

“알겠어. 내가 다 미안해. 미안하니까 그만하자. 됐지?”

“뭐?”

“내가 오늘 좀 피곤해서…….”

이만 꺼지라는 말을 돌려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죽은 듯 살라 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살고 싶었고. 잘못한 게 없지만 먼저 사과까지 했는데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곤란하다.

아직은 쫓겨나기 싫었으니까.

무덤덤한 블론디나와 달리, 이제 라르트 황자의 얼굴은 새빨간 토마토같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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