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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웠더니 짐승-1화 (1/121)

# 1

#1화

앵무새에게 모이를 주던 금발 남자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조심스레 다가선 이는 금발 남자에게 허리를 푹 숙이며 다급히 외쳤다.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손에 올라왔던 앵무새를 날려 보낸 남자가 시종을 향해 찬찬히 뒤를 돌았다. 손끝에 묻은 모이를 털며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인다. 아름다운 낯 위로 햇살이 찬란히 부서졌다.

“반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반지. 순간 그 단어를 들은 남자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

“이런 쓸모없는 계집애 같으니!”

코피가 멈추지 않았다. 귀에 꽂히는 음성이 오늘따라 유난히 험악하다.

아이는 입술을 꾹 베어 물며 더러워진 소맷자락으로 코피를 닦았다.

“괘씸한 년! 불쌍하다고 거둬 주었으면 제대로 일을 해야 할 것 아니야!”

떡떡거리는 목소리가 여관 뒷마당에 울렸다. 아이는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고 속으로 비웃었다.

불쌍하다고 거두어 주긴. 달랑 주급 2실링 주고 부려 먹는 주제에. 나 말고는 쓸 사람도 없으면서.

그가 다시 손을 추어올렸다. 블론디나는 이를 악문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머리가 울리는 타격감이 느껴졌다. 코피가 턱을 타고 흘러내려 꾀죄죄한 옷깃에 스며들었다.

남자가 다시 손을 올렸을 때, 다가올 폭력을 피해 아이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이의 이름은 블론디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쭉 여관에서 일하는 어린 점원이었다.

여관 일은 고되었다. 궂은일에 손이 부르트고 행동이 굼뜨다며 엉덩이를 차였으나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소아성애자에게 팔려 가지 않는 이상 어린 고아가 삶을 꾸려 갈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쌕쌕거리는 가쁜 호흡이 샜다.

마을 어귀에 다다라서야 블론디나는 자리에 멈춰 섰다.

“하아, 하아, 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걸이를 꼭 쥔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블론디나. 네 아버지가 주신 거야. 소중히 간직하렴.”

헝겊 주머니가 달린 목걸이.

그 더럽고 초라한 헝겊 안에는 빛나는 반지가 하나 들어 있다. 이름도 모른다는 아버지가 선물로 남긴 것이었다.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바람같이 떠나간 아비가 준 것이라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호흡이 잦아들자 눈물과 함께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입술을 꾹 내리누르며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자존심이 있지. 이까짓 고통은 날 울릴 수 없어.

블론디나는 헝겊 안 반지 형체를 더듬으며 떨리는 입꼬리를 내렸다.

목걸이. 엄마가 남겨 준 소중한 유산.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 미안해.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이제는 한계였다.

절 버린 아비가 남긴 반지를 소중히 지키는 것보다, 이 불우한 삶을 돌파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블론디나는 다시 달렸다. 지금 당장 반지를 팔 생각이었다.

귀금속점은 골목 끄트머리에 있었다.

두꺼운 나무문을 힘겹게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건조한 공기와 함께 향수 내음이 스쳤다. 귀한 이들이 많이 오는 곳다운 향기다.

블론디나의 작은 심장이 콩콩 뛰었다. 어머니의 유산을 팔아야 한다는 죄책감에 기인한 떨림이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테이블에는 수염이 가느다랗게 난 사내가 돋보기를 닦고 있었다. 귀금속점 주인이었다.

“무슨 일이냐?”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래. 노르디가 뭐라도 팔고 오라 한 게로구나. 손목을 자르기 전에는 그놈의 노름판을 못 끊겠지.”

여관 주인, 노르디는 노름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블론디나를 시켜 보석을 팔고 오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블론디나는 목에 건 목걸이를 풀었다. 탁. 헝겊 안 보석이 유리 테이블 위에 맞닿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저, 오늘은 제 걸 팔러 왔어요, 아저씨.”

“네 것?”

“네. 저희 어머니께서 남겨 주신 건데…….”

뒷말은 차마 잇기가 힘겨워 대충 흘렸다.

들고 있던 돋보기를 내려놓은 주인이 헝겊을 손끝으로 살짝 잡았다.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듯.

그러곤 미간을 불쾌하다는 듯 찌푸리더니 다시 블론디나 앞에 그것을 툭 던졌다.

“네가 풀어라. 그건 그렇고 네 어머니, 릴리가 죽은 지도 벌써 3년이나 흘렀구나. 떠나간 사내만 기다리다가…… 불쌍한 계집 같으니.”

블론디나의 모친은 근방 영지에서도 알아주는 미인이었다.

평민 중에서, 아니 귀족 중에서도 그녀처럼 탐스러운 금발과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를 가진 이는 없었으리라.

블론디나는 담담한 얼굴로 안에 있는 반지를 꺼냈다.

반지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조명 빛에 반짝이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블론디나가 반지를 건네자 주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지를 집어 들고는 대충 살피기 시작했다.

“뭐, 네 부탁이니 봐주기는 하는데 큰 기대는 하지 마라.”

“네.”

“이건 보나 마나 싸구려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순간, 그의 말끝이 연기처럼 흐트러졌다. 무엇에 놀라기라도 한 듯 눈이 크게 확장된다.

주인은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블론디나의 눈동자도 천천히 이동했다.

그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주인은 테이블 위를 더듬거려 돋보기를 굳게 쥐고는 반지 이곳저곳을 자세히 살펴 대기 시작했다.

파리하게 질린 낯 위로 처음엔 놀라움이, 다음엔 의심이, 마지막엔 경악이 가득 찼다.

헉. 숨을 크게 들이켠 그가 반지를 꽉 쥐었다.

“이, 이것을 어디서 훔친 게냐! 이 생쥐 같은 년!”

블론디나는 여러 해 습득한 눈치로 분위기를 대번 알아차렸다. 지금 주인은 절 의심하여 타박하고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다시 뺨이라도 맞을지 모른다. 고개를 강하게 휘저으며 크게 부정했다.

“훔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네가 감히, 감히, 이런 것을 어디서……!”

“엄마가 주신 거예요. 제 아버지께서 남겨 주신 유일한 물품이라 하셨단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이 문양은…….”

주인이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던 주인이, 그것을 품에 챙기고는 블론디나를 의자에 앉혔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라! 내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블론디나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눈만 끔뻑였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뒤쫓기는 사람처럼 홀로 다급해하던 주인은 가게 문을 잠그고 ‘영업 종료’ 표지판을 내건 후 커튼까지 쳤다.

뒷문을 통해 황급히 뛰쳐 나가는 주인을 보며 블론디나는 작게 읊조렸다.

“아저씨?”

영문 모를 상황이다.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홀로 남겨진 블론디나는 멍하니 닫힌 문만 응시했다. 어둑한 가게 안에 은은한 조명빛만이 너울거렸다.

***

영주의 성 꼭대기 방. 블론디나는 고급스러운 양탄자를 밟으며 안을 서성이다가 침대에 조심스레 누웠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천한 자신이 감히 영주님의 성에 묵게 되다니.

이틀 전. 밖으로 뛰쳐나갔던 귀금속점 주인은 오래지 않아 영주님과 함께 돌아왔었다.

깜짝 놀란 블론디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었다. 먼발치에서나 보던 고귀한 분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는 복잡한 표정으로 블론디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그녀를 마차에 태워 성으로 갔다.

“황가의 문양입니다. 게다가 보석을 장식하고 있는 황금과 정교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 역시 진품이었습니다.”

귀금속점 주인에게 들은 말의 무게가 워낙에 무거웠기에, 저 정체 모를 아이를 안전하고도 귀하게 보호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블론디나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영주님의 성 맨 꼭대기방에 묵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오늘이 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블론디나는 품 안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지평선 아래, 해가 뉘엿뉘엿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들판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하늘이 어둡게 물들어 간다.

동시에 블론디나의 의식도 어둠 속에 꺼져 가듯 아득해지고 있었다.

어느새 별이 차고 달이 올랐다. 블론디나의 눈꺼풀이 움찔 움직였다. 나무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열리지 않았던 문이다.

누구지?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몸을 휘돌았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촛대를 집어 들었다. 제 몸을 지키기 위한 미약한 준비였다.

끼익. 나무문이 소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블론디나는 힘없이 촛대를 내려놓았다. 문이 꽉 찰 만큼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내들이 줄을 이어 들어오고 있던 탓이다.

저 정도 규모라면 반항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들의 피부는 깨끗했으며 걸음걸이는 당당했다. 한눈에 보아도 예사 사람들은 아니었다.

거구의 사내들이 모두 들어온 후 마지막으로 들어선 이는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그는 뒤따라 오는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한 발, 한 발 우아하게 발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그의 꿀 같은 금발이 횃불 아래 은은히 빛났다.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뒷짐을 진 채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더니 곧 블론디나에게 시선을 박았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절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블론디나는 이불을 꼭 쥐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누구세요?”

블론디나는 대답 대신 반문했다. 남자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갔다.

그는 탐탁지 않다는 듯 혀를 한번 차더니 조금 짜증이 밴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어미 이름이 릴리가 맞는가.”

“제 어머니를 아세요?”

블론디나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어 올렸다.

남자가 옆에 선 시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종은 그의 손에 초를 쥐여 주었다. 남자는 장난감을 관찰하듯 블론디나의 턱을 들어 올려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똑 떨어진 촛농이 블론디나의 쇄골 위로 떨어졌다.

“앗!”

화끈한 고통에 소리를 내질렀으나 그는 그다지 상관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블론디나의 얼굴을 확인한 남자의 표정이 그제야 살짝 달라졌다.

“꽤 닮았군.”

감정을 배제한 듯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미남자의 투명한 눈동자가 블론디나를 헤집을 듯 쏘아졌다.

남자를 향해 블론디나는 힘주어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남자는 대답 대신 턱을 매만졌다. 당돌한 것을 본다는 듯 그가 블론디나의 얼굴을 훑었다.

아이의 금발, 그리고 예쁘게 반짝거리는 눈동자까지. 잿빛이나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아이의 올곧은 성품을 그대로 찍어 내고 있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그는 곧 유쾌함인지 흥미인지 모를 웃음을 얼굴 가득 올렸다. 그런 후 블론디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했다.

“난 트리제 륜 하베르티 아테스. 네 아비이자…… 아테스 제국의 황제이지.”

블론디나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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