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지금 이 순간을 즐길 뿐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공작의 저택은 예상보다도 매우 넓고 평화로웠다.
공작가에서 태어난 만큼 플로리아도 결혼 전 호화로운 저택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아리안느 공작저보다도 이곳 아루비스 공작저가 훨씬 규모가 큰 듯했다.
아무래도 제리헤이드가 다른 이들보다 황궁 출입이 적고, 집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저택에 더 많은 정성을 들인 것 같았다.
“에리튼 제국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들어요?”
“네. 이렇게 여유롭게 지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그의 배려 덕분에, 갑작스럽게 결정한 에리튼 제국에서의 생활임에도 큰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지난 며칠간 이곳에서 지낸 플로리아에겐 마치 휴양지 같았다.
그녀가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아침 신문을 집어 들었다.
지난 몇 년간 황후로 지내던 때의 습관이 남아있는 탓이었다.
“오늘 아침은 무슨 기사가 실렸나요?”
몇 분 후. 옆자리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제리헤이드가 물었고, 신문을 찬찬히 훑어보던 플로리아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가 풀어졌다.
“왜 그래요?”
“아직 카르티스 황제에 대한 이야기뿐이네요.”
타레트 제국의 신문이 아님에도 그랬다.
에리튼에서도 카르티스의 최후에 대해선 여러 말이 많았다.
그가 처형을 당한 이후 아직 비어있는 황좌에 대해서도 다들 큰 관심을 갖는 듯했다.
“이런, 괜한 걸 물었군요.”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사실이었다. 에리튼 제국에 온 이후로 플로리아는 정말 마음이 평안해진 상태였다.
이제 더 이상 카르티스를 떠올리는 게 힘들지 않았다.
아마 이곳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지금보다도 더 편안해지는 날이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리헤이드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함께 황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던 플로리아가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네?”
“분명 황궁에 발걸음 하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리헤이드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자, 플로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려워할 거 없어요. 당신이 언제쯤 함께 가자고 얘기해줄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순식간에 제리헤이드의 동공이 커졌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낼 거란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럼요. 당연히 함께 가야 하는 일인걸요.”
창가에서 몸을 뗀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회복되길 기다려주는 제리헤이드의 배려를 눈치채고 있었다.
말은 안 해도 당장 루이스 황제의 장례에도 참석하고, 신시아 황후도 만나고 싶었으리란 걸 알았다.
단지 플로리아에겐 그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번 황궁 방문이 끝나고 나면, 우리의 결혼식도 준비하도록 할 예정이에요. 루이스 폐하의 장례가 완전히 끝나고 나면 그때 식을 올리려고요.”
“아.”
그리고 갑작스럽게 결혼식이라는 말을 듣자, 플로리아는 뭔가 낯선 기분이었다.
긴장감이 몰려오자, 카르티스와 했던 결혼식은 어땠는지도 기억이 안 날 지경이었다.
“성대한 결혼식을 원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그럼 원하는 결혼식이 있으십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요.”
어느새 플로리아는 긴장을 풀고 대화에 집중했다.
아직 모든 짐을 내려놓을 순 없겠지만, 이렇게 그와 나누는 소소한 대화들이 그녀를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플로리아는 행복한 표정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다시 집어 들었다.
***
다음 날. 예정대로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는 에리튼 황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오늘 황후 폐하께도 우리의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드릴 생각입니다.”
“혹시 반대하진 않으실까요?”
플로리아는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에, 신시아가 혼란스러워하진 않을까 염려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제리헤이드의 예상대로 신시아는 오랜만의 만남에도 플로리아를 반겼다.
“오랜만이군요. 와 줘서 고마워요.”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만났을 땐 두 사람이 분명 황후와 황후로서 만났던 사이이기에, 지금의 상황이 조금 어색하긴 했다.
“장례에 참석하러 오신 건가요?”
“예. 그곳에 먼저 다녀오는 길입니다.”
“두 사람의 얘기는 이전에 폐하께 전해 들었습니다. 결국 어려운 일을 해냈군요.”
신시아가 힘든 상황임에도, 가벼운 미소를 띠며 플로리아와 제리헤이드에게 칭찬을 건넸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난 아루비스 공을 늘 믿었으니까요.”
제리헤이드도 그녀에게 화답하듯 미소를 건넸다.
“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든 물어보십시오.”
“혹시 앞으로 루이스 폐하의 뒤를 이을 생각이 있는 건가요?”
“……네?”
“그런 뜻으로 두 사람이 함께 돌아온 건가 해서요.”
날카로운 물음을 건넸지만, 신시아의 눈빛은 그들을 경계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궁금증인 듯했다.
“아닙니다. 엄연히 황후 폐하와 황자 칸이 계시니까요.”
“아루비스 공……. 실은 그대가 황좌에 앉아야 한다는 말들도 많아요. 아직 칸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엔 많이 어리니까요.”
“죄송하지만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 정치엔 뜻이 없습니다. 오히려 앞으론 더 조용히 살고 싶은 생각입니다.”
제리헤이드는 대답과 함께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그녀도 같은 뜻일 거란 의미를 담은 눈빛이었다.
“……진심인가요?”
신시아가 다시 물었다. 제리헤이드가 그저 예의상 물러나진 않길 바랐다.
그가 황권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 자리를 양보하는 게 제국을 위해서도 칸의 안위를 위해서도 최선의 선택일 거라 생각했다.
“네. 변함없이 진심입니다. 제가 없더라도 황후 폐하께서 잘 이끌어나가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리헤이드는 진심으로 황좌엔 관심이 없다는 듯 단호히 대답했다.
그러자 신시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그녀의 상황은 플로리아와는 달랐다.
황제가 죽은 이후 자식이 없던 플로리아는 자신의 자리를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신시아는 아니었다.
황제의 친동생인 제리헤이드가 황위 계승을 포기한 상황이기에, 앞으로 아들 칸에게 이 제국을 물려주기 위해선 본인이 더 단단해져야 했다.
“대신 칸이 성인이 될 때까진 저도 곁에서 돕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정말 고마워요, 아루비스 공.”
신시아의 눈엔 약간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도 지금 상황이 버겁긴 마찬가지일 듯했다.
그 마음을 아는 플로리아가 안쓰러운 눈빛을 담아 신시아를 바라봤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꼭 또 만나죠.”
“그때까지 몸 건강하십시오.”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는 신시아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늘 이 일정을 끝으로, 더 이상 정치적인 일과 엮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루비스 공작저에 찾아온 의외의 인물을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
그날 저녁. 아루비스 공작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아직 잠들지 못한 플로리아가 복도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그러자 여전히 그녀의 하녀로 일하고 있던 에쉬가 서둘러 대답했다.
“지금 밖에 벨라 공녀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벨라가?”
플로리아는 쌀쌀해진 밤바람에도 겉옷도 걸치지 않은 채 문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벨라가 공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
“벨라? 정말 너구나.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게…….”
벨라는 어쩐 일인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게 뭔가 곤란한 눈치였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뭔데 그래?”
“……벨라 공녀님? 무슨 일입니까?”
그때, 제리헤이드도 마침 서재에서 나오며 그들과 마주했다.
“오랜만이에요, 공작님.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정말 죄송하지만……. 두 분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벨라는 먼 길을 왔음에도 피곤한 기색도 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리헤이드가 벨라를 응접실 쪽으로 이끌었고, 세 사람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벨라, 대체 무슨 일이니? 괜찮으니까 어서 말해 봐.”
자리에 앉자마자 플로리아가 재촉했고, 벨라가 그제야 입을 떼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언니가 다시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와 주면 좋겠어.”
***
타레트 제국의 황궁에선 카르티스의 처형 이후 귀족들의 회의가 매일 같이 열렸다.
황위를 계승할 황족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 다음 황위를 이을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난 절대 그럴 생각이 없소.”
황실 법도대로라면, 다음 황위를 이을 사람은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이었다.
그는 플로리아 황후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제국의 공작이었다.
황제가 갑자기 승하하는 일이 생길 경우, 황위 계승 서열상 제일 높은 위치에 있다는 뜻이었다.
“계승권자에서 나를 배제해 주시오.”
하지만 파슈테의 생각은 확고했고, 그의 고집은 완강했다.
플로리아가 떠나고 비어있는 황궁에 자신이 자리를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카르티스의 뒤를 이은 황제라니.
자신의 딸에게 끔찍한 기억만을 남긴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뒤틀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리안느 공작 각하만큼 적합한 분은 없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맞아요!”
하지만 귀족들은 파슈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생각인 듯 물러서지 않았다.
그처럼 인품과 능력을 고루 갖춘 인물을 다시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를 비워두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귀족들의 마음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공작 자리에서 물러나겠소.”
결국 부담감을 느낀 파슈테는, 자신의 자리를 벨라에게 넘기겠다는 선언까지 해버렸다.
그리고 얼떨결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어린 나이에 공작이 될 상황에 처한 벨라는 난감했다.
그래서 결국 급히 플로리아에게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이런 부탁을 하게 돼서 정말 미안해.”
벨라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플로리아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렇지만 모든 상황을 전해들은 그녀는 벨라에게 뭐라 질책할 순 없었다.
그녀의 현재 상황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벨라.”
“그럼 타레트 제국으로 다시 돌아와 주는 거야?”
“…….”
“물론 영원히 있어 달라는 건 아냐. 그냥 다음 황좌의 주인이 정해질 때까지만 언니가 황궁을 지켜주면 좋을 것 같아서…….”
벨라는 자신이 얼마나 플로리아에게 큰 부담을 주는 건지 알고 있기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후우. 미안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정말 미안해, 벨라.”
하지만 플로리아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마음 같아선 벨라를 도와주고 싶었다.
벨라의 성격을 잘 알기에 더 그랬다.
절대 남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아이가 아닌데, 얼마나 곤란한 처지에 놓였기에 여기까지 왔을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플로리아에겐 타레트 제국의 황궁을 잠시 이끌어 나가는 게 벨라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리튼 제국의 사람이 되겠다고 이곳까지 온 상황에 다시 타레트 제국에 돌아갈 순 없었다.
제리헤이드에게도 그건 예의가 아닐 듯했다.
“아니야,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해해줘서 고마워. 대신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도록 하렴. 며칠 쉬다 가도 좋고.”
“그래. 그럴게.”
벨라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미소가 진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건 플로리아뿐만 아니라 제리헤이드까지도 이미 알 정도였다.
그건 분명 플로리아에게 미안함을 담은 억지 미소였다.
“그럼 내일 아침에 만나.”
벨라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에쉬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벨라가 나가자마자 제리헤이드가 물었다.
멍하니 응접실 문만 응시하고 있던 플로리아에게 향한 것이었다.
“후회라뇨?”
“타레트 제국에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언제든 다시 이곳으로 오면 되니까요.”
“그건 싫어요. 당신이 여기 있잖아요.”
플로리아가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얘기했다.
“이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녀의 말투엔 약간의 화가 담겨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지도 몰랐다.
“플로리아.”
제리헤이드가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플로리아가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이야말로 그에겐 큰 고통이었다.
“내가 함께 한다면,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곳에 얼마나 머물게 될지는 몰라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정부가 되겠습니다.”
“……제드.”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플로리아의 눈빛이 떨렸다.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시 정부가 돼도 상관없어요.”
“정말이에요?”
제리헤이드는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해사한 미소로 플로리아를 응시했다.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난 괜찮으니 힘들어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 미소 덕분에 플로리아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정리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타레트 제국으로 향하기로 말이다.
***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아는 벨라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그녀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벨라, 너랑 같이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가려 해.”
“정말이야?”
벨라는 들고 있던 스푼까지 떨어트릴 정도로 놀란 듯했다.
이미 혼자서 돌아가기로 체념한 상태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곳에서 얼마나 머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드가 함께 해주기로 했거든.”
플로리아의 설명을 듣고 있던 제리헤이드가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감사해요, 공작님! 공작님 덕분이에요.”
벨라는 정말 기쁜 듯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옆엔 에쉬와 헤미쉬가 다행이라는 듯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동시에 플로리아도 그들을 바라봤다.
시선을 옮겨, 함께 기뻐하는 제리헤이드도 바라봤다.
자신을 믿어주고 곁에 있어주는 이들이 있기에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 만찬을 시작해 볼까요?”
플로리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타레트 제국으로 향하기 전, 그들은 소중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또 벌어질 지는 미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즐길 뿐.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