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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마지막 인사 (105/106)

105화. 마지막 인사

“황후 폐하, 이쪽입니다.”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를 데려간 곳엔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에리튼 제국에서 그와 함께 타고 온 제리헤이드 소유의 마차였다.

“이게 다 뭐죠?”

“내일 당장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내일 당장이라니요?”

플로리아는 당장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며칠 더 타레트 제국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카르티스의 처형도 확인하고, 모든 일을 끝맺음하기 위함이었다.

“내일 처형식이 있을 시각에 황궁 안에 머무는 게 힘드실 것 같아서요.”

“…….”

“그 전에 에리튼 제국으로 떠나려 합니다.”

“그렇지만…….”

물론 플로리아도 그의 뜻대로 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책임마저 저버릴 순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뒤처리는 드로이에게 맡겨두었으니 알아서 잘 마무리할 겁니다.”

“드로이에게요?”

“네. 일처리는 빠른 사람이니, 이제 아무 걱정 마십시오. 내일 아침에 떠날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를 품에 안고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정말 마지막 날이네요.”

그의 품에 안긴 플로리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군요.”

그녀가 잠시 제리헤이드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자, 그동안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늘 밤엔 부디 좋은 꿈만 꾸십시오.”

그의 다정한 속삭임 덕분에 오늘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러던 중, 플로리아가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그의 품을 벗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 깜빡 잊을 뻔했네요.”

플로리아가 서둘러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자, 제리헤이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플로리아는 곧바로 에이니를 만나러 별궁으로 향했다.

그녀에게만큼은 직접 작별 인사를 건네야 했다.

에이니의 침실로 향하는 길목에는 과거, 안젤리나와 헬렌의 침실도 있었다.

화려하고 복작복작했던 전과 다르게 그곳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플로리아는 다소 복잡한 마음으로 그곳을 지나쳐 에이니의 침실에 도착했다.

“……황후 폐하?”

잠시 후, 에이니가 놀람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플로리아를 불렀다.

“오랜만이구나, 에이니.”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뵈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에이니는 전보다 차분한 표정으로 플로리아를 마주했다.

“황후 폐하 덕분에 모든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해요.”

“내가 더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는 그저 제 몫만 했는 걸요.”

“그런데 안색이 어둡구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실 에이니는 악몽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원하던 복수를 해냈지만, 마지막으로 감옥에서 마주쳤던 카르티스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실은 잠시 황궁을 떠나있을까 해요. 이곳에선 편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에이니도 플로리아와 비슷한 상황인 듯했다.

“아주 멀리 가려는 것이냐?”

“아니요. 그냥 저희 부모님을 뵈러 갈까 합니다. 거기선 마음이 조금 편할 것 같아서요.”

“그래. 잘 생각했구나.”

“황후 폐하께서는요?”

에이니가 당연하다는 듯 플로리아의 거취를 물었다.

분명 자신처럼 플로리아도 마음이 온전히 편치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황궁 안에 계속 계실 건가요? 잠시 휴양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안 그래도 나도 떠나려던 참이다.”

“떠나신다면 어디로 가시나요?”

“에리튼 제국으로 갈 생각이란다.”

“아…….”

에이니가 자신의 입을 막으며 놀랐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플로리아가 다신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떠난다는 걸 짐작한 듯했다.

“황후 폐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잘된 일이네요. 이제 더는 못 뵌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긴 하지만요.”

“그동안 고생 많았다, 에이니. 언젠가 또 만나자꾸나.”

“멀리서나마 소식 전해 듣겠습니다. 행복하세요.”

에이니의 작별 인사에 플로리아가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가족들과 작별하는 것과는 결이 달랐지만, 그녀와 헤어지기도 쉽진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제리헤이드만큼 많이 의지했던 존재여서 그런 듯했다.

“후우…….”

하지만 아쉬워만 하고 있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녀가 오늘 밤 해결해야 할 일이 또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

“황후 폐하, 이렇게 헤어지다니 정말 아쉽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에르앙 백작 부인은 울먹이고 있었다.

플로리아의 마지막 짐을 챙기는 그녀의 손길이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저도 아쉬워요. 부인 같은 분은 다신 못 만날 거예요.”

에르앙 백작 부인은 딸린 가족이 있기에 에리튼 제국까지 플로리아를 따라갈 순 없었다.

“부디 건강하세요, 황후 폐하.”

“부인도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짐들을 전부 챙긴 플로리아가 이제 막 침실을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황후 폐하!”

에쉬가 급하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에리튼 제국으로 떠나신다면서요? 어떻게 저를 빼놓고 가려고 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플로리아가 당황스럽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에쉬의 가족 모도 타레트 제국에 있으니, 그녀도 당연히 남겨두고 떠날 생각이었다.

고작 하녀 일을 시키기 위해 에리튼 제국까지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그곳에서 새로 사람을 구하면 그만이었다.

“저는 무조건 황후 폐하를 따라갈 거예요. 앞으로 더 이상 황후 폐하가 아니라고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플로리아 님의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에쉬의 뜻은 확고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플로리아와 함께하겠다는 듯, 챙겨온 짐꾸러미를 품에 꼬옥 안은 채였다.

“정말 그래도 되겠느냐?”

“……물론 황후 폐하께서 거절하지만 않으신다면요.”

조금 전 당차던 모습과는 다르게 에쉬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나야 당연히 네가 필요하단다. 몇 년간 함께 하던 사람만큼 든든한 이는 없을 테니까.”

“정말이요?”

“그럼.”

플로리아가 해사하게 웃자, 에쉬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함께 떠날 생각이라면 어서 짐을 챙기는 걸 서두르거라.”

“네, 황후 폐하.”

플로리아는 마음이 급했다. 한 시간 후 카르티스의 처형식이 진행되기 전에 서둘러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저 그런데…….”

하지만 왜인지 에쉬는 곧바로 자리를 옮기지 않고 뭔가를 머뭇거렸다.

“왜 그러느냐?”

“황후 폐하, 혹시 저도 함께 가도 될까요?”

에쉬의 뒤편으로 나타난 건 헤미쉬였다.

“……헤미쉬?”

“에쉬에게 소식은 들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떠나신다고요.”

플로리아는 황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헤미쉬와 레너드 경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그가 먼저 찾아오자 난감해졌다.

“더 일찍 알리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갑작스럽게 결정된 거라…….”

“조금 놀라긴 했지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황후 폐하를 따를 생각이니까요.”

“나를 따른다니?”

“제 뜻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에쉬처럼 황후 폐하를 곁에서 돕고 싶습니다.”

“…….”

플로리아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제리헤이드가 공작의 지위를 되찾으면, 그녀는 공작부인으로 살 생각이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니, 정부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난 이제 더는 황후가 아니란다. 그러니 정부의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정부로 따라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하인이나 집사도 좋습니다. 그저 황후 폐하의 곁에서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게만 해주세요.”

“……헤미쉬.”

플로리아가 뭐라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이번엔 에쉬가 거들었다.

“황후 폐하, 에리튼 제국에 가게 되면 헤미쉬가 말썽을 부리는 일이 없도록 제가 잘 단속하겠습니다. 저를 믿고 이 아이도 일행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그가 평소 플로리아를 얼마나 좋아해 왔는지 알기에, 에쉬도 헤미쉬를 돕는 것이었다.

행여나 이대로 혼자서 플로리아를 따라가게 되기라도 하면, 헤미쉬에게 평생 원망의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었다.

“좋아. 둘 다 뜻이 그렇다면 함께 하자꾸나.”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헤미쉬는 두 손을 맞잡으며 기뻐했다.

“그럼 이제 갈 사람은 다 정리된 것 같으니, 정말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겠어요.”

플로리아가 마지막으로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어디로 가시려는 건가요?”

“레너드 경을 만나야죠.”

“정말 마지막이네요. 조심히 가세요, 황후 폐하.”

플로리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 없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고, 이별을 아쉬워할 여유도 없었다.

카르티스의 처형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저는 그럼 이곳에 남아 타레트 제국을 지키겠습니다.”

예상대로 레너드 경은 플로리아에게 담담한 인사를 건넸다.

그와 어울리는 담백한 작별 인사였다.

“그동안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저도 감사했습니다, 황후 폐하.”

“그럼 앞으로는 제국을 위하는 듬직한 기사단장이 되길 바라요.”

“……네? 기사단장이라니요?”

레너드 경이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플로리아가 챙겨온 임명장을 건넸다.

“내 마지막 선물이에요.”

그 안엔 레너드 체셔 경을 황실 기사단장으로 임명하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지난밤, 늦은 시각까지 잠들지 못하며 급히 준비한 것이었다.

“처음 약속했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이렇게 갑자기 전해주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제국에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레너드 경의 말에 플로리아가 흐뭇하게 미소를 건넸다.

“덕분에 걱정 없이 떠날 수 있겠군요. 잘 지내요.”

“행복하십시오.”

레너드 경을 마지막으로 플로리아는 소중한 이들에게 인사를 끝마쳤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자, 처형식까진 앞으로 10여 분 남짓 남아 있었다.

“이런, 서둘러야겠군요.”

레너드 경의 인사를 받으며, 플로리아는 급하게 발걸음을 옮겨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제리헤이드가 밝은 미소와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늦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렇게 와주셨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리헤이드가 마차의 문을 열어주며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플로리아가 편한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이제 이 황궁을 떠나는 순간부터, 더 이상 황후 폐하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그럼요?”

“그 순간부터는 제 아내이자 공작부인이십니다.”

제리헤이드의 말에 플로리아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때마침, 그들의 새 출발을 축하하듯 마차가 에리튼 제국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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