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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청혼 (104/106)

104화. 청혼

“그게 무슨 뜻이죠? 단둘이 여행을 가자는 건가요?”

플로리아가 놀란 듯 제리헤이드를 바라봤다.

물론 그와 여행이라도 떠난다면 머리를 식힐 순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단순히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

“사실 루이스 황제 폐하와 처음부터 약속한 게 있었습니다.”

“……약속이요?”

“제가 모든 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에리튼 제국의 공작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게 해주겠다고요.”

의외의 이야기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플로리아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에리튼 제국으로 돌아가면 제가 다시 아루비스 공작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

“그러니 저와 함께 에리튼 제국으로 떠나지 않겠습니까?”

“……네?”

“타레트 제국의 황후로 지내는 게 이렇게 힘들다면, 제 곁에서 공작부인이 되어달라는 뜻입니다.”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한 손을 뻗어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지금은 비록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이지만, 에리튼 제국의 아루비스 공작부인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지금 제게 청혼을 하는 건가요?”

제리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난 무책임하게 타레트 제국을 떠날 순 없어요.”

플로리아가 조심스레 거절의 뜻을 비쳤다.

물론 그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의 청혼이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플로리아가 주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과 벨라.

갑자기 에리튼 제국으로 떠난다면, 남겨진 그들이 혹여나 상처를 받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 컸다.

“황후 폐하께서는 맡은 책임을 다하신 겁니다. 마음의 짐을 이제 좀 내려놓으세요.”

“마음의 짐이요?”

“어차피 황실은 곧 새 황제를 선임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곧 황후 폐하의 존재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많아지겠죠.”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제리헤이드를 통해 그 사실을 전해 듣자 마음이 아렸다.

타레트 제국을 위해 카르티스를 몰아낸 것이지만, 이제 이곳에서 플로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 버림받기 전에, 황후 폐하의 자유를 스스로 찾아 떠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제리헤이드가 내밀고 있던 손을 플로리아 쪽으로 더 가까이했다.

“……내가 그래도 될까요?”

그러자 플로리아가 저도 모르게 본심을 뱉어냈다.

“그럼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분입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듣고 싶던 대답이었다.

플로리아는 그 누군가가 제리헤이드여서 다행이라 여겼다.

“……진심인가요?”

“진심입니다.”

제리헤이드의 진지한 대답에 플로리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그때까지 고민만 하던 그녀가 제리헤이드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그대를 따르겠어요.”

“……황후 폐하.”

“가족들이 걱정되긴 하지만, 나도 이번만큼은 나를 위한 선택을 하고 싶어요. 그래도 되겠죠?”

“다들 분명 이해해 주실 겁니다.”

제리헤이드의 대답에 플로리아가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이미 그를 따라가겠다고 결정을 한 이상, 그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최대한 빨리 남은 일을 마무리 짓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럼 더 늦어지기 전에 우선 가족들을 먼저 만나고 와야겠어요.”

긴장한 게 역력한 플로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제리헤이드가 마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걱정할 거 없다는 그의 마음이 전달되기라도 한 듯, 덕분에 플로리아의 불안함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

다음 날, 플로리아는 날이 밝자마자 일정을 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아리안느 공작 영지에 다녀오기 위해서였다.

“……어머, 플로리아? 네가 갑자기 무슨 일이니?”

공작저로 들어서는 그녀를 발견한 라니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설마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지?”

라니에의 손끝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폭정을 일삼던 카르티스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그녀도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그 영향으로 플로리아까지 황궁에서 쫓겨난 건 아닐까 싶은 염려가 컸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잠시 찾아왔어요.”

“설마 황궁에서 쫓겨나기라도 한 거야?”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 무슨 일이라니?”

“아버지랑 벨라는요?”

“벨라는 잠시 외출했고, 공작님은 지금 서재에……,”

“무슨 일로 온 것이냐?”

플로리아가 라니에와 잠시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었다.

서재에서 나오던 파슈테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거기 계셨어요?”

“연락도 없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몇 달 전, 플로리아가 정부를 들이겠다고 선언했던 그 날처럼 파슈테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예상하기라도 하는 듯.

“일단 좀 앉아서 얘기해요. 플로리아 너도 앉거라. 어서요!”

라니에는 마주 서 있는 두 사람을 급히 응접실로 이끌었다.

결국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를 옮긴 파슈테는, 플로리아가 먼저 입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

그렇게 무거운 정적 끝에 플로리아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타레트 제국을 떠나려 합니다.”

“떠난다니?”

“이곳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에리튼 제국으로 가려 해요.”

“뭐라고?”

“…….”

“지금 맞닥뜨린 상황을 피하겠다는 게냐?”

“아니요. 제가 할 일은 이미 다 끝났기에, 이제 제 삶을 찾아보려는 거예요.”

“네 삶을 찾는다……?”

파슈테는 플로리아가 한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라는 건 알아요. 타레트 제국의 황후로서, 제국을 버리고 떠난다는 말에 두 분이 실망하셨을 수도 있고요.”

“…….”

“하지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네?”

갑자기 예상치 못한 파슈테의 반응에 플로리아가 급히 되물었다.

“난 네게 실망한 적 없다.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게다.”

“……아버지.”

“타레트 제국을 위해서 황제까지 쫓아낸 황후가 앞으로 또 있겠느냐?”

“절대 없지요. 우리 플로리아 같은 훌륭한 황후 폐하는 분명 더는 없을 거예요.”

“어머니.”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말을 주고받는 파슈테와 라니에의 모습에, 플로리아가 눈물을 글썽였다.

“사실 우린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이해하기로 했단다. 내가 플로리아 너였어도 황궁 안에 계속 머무르기 힘들었을 거야.”

라니에가 플로리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생각지도 못한 부모님의 찬성에, 그동안의 근심 걱정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만일 그 선택으로 너를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게다. 어디로 가든 네 스스로가 원하는 선택을 하거라.”

파슈테도 말투는 조금 무뚝뚝하지만, 적극적으로 플로리아의 선택에 지지를 보냈다.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신 가끔 안부는 전해주겠니?”

“그럼요, 어머니. 자주 편지 드릴게요.”

플로리아는 파슈테와 라니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아직 벨라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벨라가 많이 서운해할 것 같았다.

***

두 시간 후.

아리안느 공작저 2층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플로리아는 벨라와 만날 수 있었다.

“언니!”

벨라는 플로리아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왔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얘기나 좀 할까 해서.”

플로리아는 반가움과 걱정이 섞인 표정으로 벨라를 바라봤다.

“어디 아픈 데는 없지? 황궁에서 있었던 일은 전해 들었어. 언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그건 너무 과찬이야.”

“과찬이 아니야!”

“어차피 공식적으론 황제를 쫓아낸 매정한 황후로 알려지겠지.”

“……언니.”

벨라가 플로리아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서 떠나려는 거지?”

“어머니께 벌써 전해 들었어?”

“응.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벨라는 별다른 말 없이 플로리아를 끌어안았다.

몇 달 전, 이곳에서 처음 플로리아의 회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괜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면 괜히 서로 마음만 아플 걸 알기에,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언니가 없는 타레트 제국이 걱정이긴 하지만, 그곳에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랄게.”

“정말 고맙다, 벨라.”

“……그분이랑 함께 하는 거지?”

“응. 함께 떠나려고.”

“정말 잘 됐다. 좋은 사람이 언니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떠날 준비로 바쁠 텐데 그럼 어서 가봐. 나중에 내가 에리튼 제국으로 놀러 갈게.”

플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말로 나오지 않을 것 같기에, 그저 손만 흔들며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곤 더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서둘러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가족들을 만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면서도 한편으론 속상함이 교차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정적인 일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처리해야 할, 제일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

지하 감옥에 갇힌 이후, 카르티스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소란을 피우며,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방법을 궁리했다.

“카르티스 프로슈트에게 사형을 명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사형 선고뿐이었다.

“황후 폐하, 이렇게 빠른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폐위된 황제의 처형이 있기 전날.

회의실 상석에 앉은 플로리아가 참석한 귀족들에게 답했다.

고위 귀족들은 다들 카르티스를 조금이라도 빨리 처벌하길 원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가 흩트려놓은 민심을 수습해야 했고, 차기 황제 선정에 대한 고민도 필요했다.

“저기, 황후 폐하.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그럼 다음 황제 폐하를……,”

때마침 누군가가 차기 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던 때였다.

“내가 먼저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있겠나요?”

“그럼요, 황후 폐하. 말씀하십시오.”

그의 배려에 플로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 회의를 끝으로, 내 공식 일정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그만 황후 자리를 내려놓으려 합니다.”

“…….”

플로리아의 담담한 선언에 귀족들이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황궁에 계속 머무른다면 차기 황제 선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누군가 하던 말을 멈췄다. 아무도 아니라고 답하는 이는 없었다.

자리에 참석한 파슈테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 앞에 나서진 않았다.

“내가 없어도 그대들이 누구보다 현명한 황제 폐하를 찾을 거라 믿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플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회의실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제리헤이드가 어딘가로 플로리아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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