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제일 필요로 하는 그날
카르티스는 잠시 조용히 안젤리나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가 어쩌면 또다시 미친 척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지금 뭘 보는 거예요?”
“…….”
“미안하지만 저는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라고요.”
하지만 안젤리나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어느새 낯선 목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매일 화려한 차림으로만 있던 과거와는 다르게 소탈한 차림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범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 기르는 평민으로 알 것 같았다.
“안젤리나…….”
“제 이름을 아시나요? 아, 혹시 트리스탄이 어디에 간 건지 아세요?”
“……트리스탄?”
“네. 그이가 올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지? 우리 아기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는 품에 안긴 베개만 만지작거리며 감옥 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때때로 정말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감옥 입구를 바라보기도 했다.
“내, 내가 널 이렇게 만들다니…….”
카르티스의 시선에도, 안젤리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눈만 끔뻑거리며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건 말도 안 돼! 안젤리나! 정신 차려 보거라!”
그러나 카르티스가 무슨 말을 해도, 안젤리나는 자신의 아이라고 믿고 있는 품 안의 베개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완전히 바보가 되어버린 그녀의 모습에 카르티스가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안젤리나 사이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얼마 후면 태어날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모든 게 다 사라져 있었다.
황제의 자리까지 잃고 감옥에 갇힌 스스로의 모습을 보자, 뒤늦은 허탈함이 밀려왔다.
입고 있던 화려한 옷차림도 전부 허황된 꿈처럼 느껴졌다.
“……대체 어쩌다 내가 이 지경이 된 것인가.”
듣는 이 없는 질문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때였다. 누군가 급히 지하 감옥을 내려오며 카르티스를 불렀다.
“……에이니?”
보라색 드레스를 아름답게 차려입은 이는, 에이니 시슬리였다.
***
같은 날 아침, 에이니는 플로리아를 통해 오늘 카르티스가 폐위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계획대로라면 그는 곧바로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게 될 거라고 했다.
“……폐하가 나를 제일 필요로 하는 그때.”
혼자서 중얼거리던 에이니는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티스가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순간, 그를 버리기로 결심한 바로 그때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철저히 준비했다.
수많은 보석이 박힌 제일 화려한 드레스를 꺼내입고, 높은 구두도 신었다.
카르티스가 이런 자신에게 매달리길 바랐다.
그만큼 더 매정하게 그를 쳐낼 수 있도록 말이다.
“에이니, 이곳까지 와주었구나.”
그녀가 바라던 대로 카르티스는 애절하게 쇠창살에 매달려 에이니를 바라봤다.
평소 호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에이니가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그녀를 놓칠세라 다급한 모습이었다.
“폐하께서 갇히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오는 길입니다.”
“……너라도 와주어서 정말 다행이다.”
카르티스가 불안한 눈빛을 거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니가 나타난 만큼 뭐라도 해결이 될거란 믿음이 있었다.
“정말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지금? 중요하게 할 말이라는 게 무엇이냐?”
“……폐하.”
에이니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에이니. 그보다 어서 나를 이곳에서 꺼내다오. 당장 황제의 자리를 되찾긴 어려울지 몰라도, 너와 함께라면 언젠가 다시 내 자리를……,”
“죄송하지만, 뭔가 착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에이니가 냉정하게 카르티스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저는 앞으로 폐하의 곁에서 함께할 생각이 없습니다.”
“……에이니?”
“오늘은 그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것뿐이니 오해하진 말아 주세요.”
에이니가 그 말과 함께 카르티스의 옆자리를 힐끔 바라봤다.
거기엔 정신을 놓은 안젤리나가 있었다.
“서, 설마 내게 서운한 게 있어서 그런 것이냐?”
“…….”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를 두고 다른 이들을 정부로 들인 걸 매우 후회하고 있단다.”
카르티스가 에이니의 말을 부정하려는 듯, 서둘러 변명 아닌 변명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라고.”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에이니가 무겁게 운을 뗐다.
그동안 카르티스에게 수백 번 수천 번 하고 싶었지만 마음 속에 묻어두어야만 했던 말들이었다.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한 사람이 새로이 바뀌는 건 어렵다는 뜻이지요.”
“그래, 맞는 말이다. 철없던 안젤리나가 아이를 낳고 나면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될 거라 믿은 내가 바보였지.”
“누군가를 온전히 믿는다는 건 참 어리석은 일이었어요.”
“후우, 안젤리나를 너무나도 믿었던 나를 원망해도 할 말이 없구나. 난 이제 너만 믿는다, 에이니.”
카르티스는 에이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이렇게 하면, 잠시 흔들리고 있는 에이니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미 안젤리나는 정신을 놓았고 플로리아도 마음이 돌아선 지금, 카르티스에게 남은 건 에이니 뿐이었다.
그러나 에이니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제 제가 믿는 사람은 폐하가 아닙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뜻하지 않은 대답에 카르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조금 전, 분명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
“폐하는 과거, 저를 버리셨던 분입니다. 아주 매몰차게요.”
“그건……. 이미 지난 과거일 뿐이다.”
“폐하께는 그럴지 몰라도 제겐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입니다.”
“분명 사과도 하지 않았느냐? 이제 앞으로 다신 그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카르티스가 근엄하게 말하자, 에이니가 이번엔 정말 웃긴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제가 정부로 들어왔던 날, 폐하는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억하시나요?”
“…….”
카르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는 게 전혀 없었다.
마음에 담아둔 적 없는 빈말들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가 과거 에이니에게 건넸던 말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네가 내 마지막 정부일 것이다. 다시 정부를 들이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거라.”
그 순간, 에이니가 그때의 카르티스에게 빙의라도 된 듯 중얼거렸다.
“네 번째 정부로 들어와서 누구보다 불안해하던 제게 그러셨지요.”
“…….”
“저는 그 말만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배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에이니.”
“폐하는 제 삶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분이에요.”
“그만하거라!”
카르티스가 더 이상 참기 어렵다는 듯 버럭 화를 내뱉었다.
“그깟 과거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지금 내가 널 신뢰한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
“때늦은 신뢰 따위 바란 적 없습니다. 그 믿음은 안젤리나에게나 주시죠.”
에이니가 차갑게 말하곤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카르티스와의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에이니!”
카르티스가 소리치자 에이니가 움찔했다.
태연한 척 대담하게 카르티스에게 맞섰지만, 그녀의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니의 입장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무슨 일이 있어도 카르티스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주고 싶었다.
자신이 당했던 것보다 더 큰 배신감을.
“이제 보니 폐하 곁에 남은 건 안젤리나뿐인 것 같네요.”
에이니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안젤리나를 가리켰다.
“그 입 닥치거라!”
카르티스가 소리치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기사들이 감옥으로 들어오더니 안젤리나가 갇힌 곳의 문을 열었다.
“이거 놔! 뭐 하는 짓들이야?”
그들이 안젤리나를 끌어내기 시작하자, 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놓칠세라 다섯 손가락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안젤리나 페일, 지금 당장 처형을 집행하라는 황후 폐하의 명이다.”
호위기사의 말에도 안젤리나는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모른 채, 베개만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요란스럽게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안젤리나!”
카르티스가 울부짖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이니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은 채 비소를 띠었다.
“이런. 이제 곁에 안젤리나조차 없겠군요, 폐하.”
“…….”
“부디 이곳에서 외롭고 괴롭길 바랍니다.”
“…….”
그녀가 마지막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혼자 남겨진 카르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에이니가 감옥을 빠져나가자, 뒤늦게 정신이 든 카르티스의 쇠창살이 흔들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
그날 저녁. 플로리아는 오랜만에 독한 와인을 꺼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맨정신으론 잠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제리헤이드가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지난 몇 달간, 오늘만을 생각하며 달려왔는데…….”
벌써 몇 시간째 침묵을 유지하던 플로리아가 무겁게 입을 뗐다.
“막상 모든 게 끝나고 나니 허무하군요.”
카르티스가 감옥에 끌려간 이후, 황궁 안은 어느 때보다도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자신의 황후 자리가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 곁에 다가가며 다정히 대답했다.
맡은 일에 버거움을 느낀다는 게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과거의 자신도 그 부담감이 싫어서 황궁을 박차고 나왔으니까.
“황제도 없는 텅 빈 황궁 안에서, 내가 황후로 지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플로리아의 심각한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난 황제를 쫓아낸 비정한 황후일 뿐이에요.”
그 말이 끝난 후, 플로리아가 와인을 들이켰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약한 모습이었다.
“황후 폐하, 지금의 삶이 힘드신가요?”
“아마도요.”
플로리아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러자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제리헤이드가 조심스레 플로리아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렇다면…….”
그리곤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후의 자리를 내려놓고 저와 함께 에리튼 제국으로 떠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