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황제의 인장 (2)
플로리아가 긴장된 표정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자, 대회의실에 모인 모든 귀족들이 그녀를 주목했다.
제일 끝자리, 상석에 앉은 카르티스도 일단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이들 중엔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도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불안한 표정으로 플로리아의 입술을 주시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이유는, 112년 만에 타레트 제국의 국법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티스가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 안건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모아놓은 것인가? 황제의 허락도 없이 대체 무슨 국법을 바꾼다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폐하께서도 이미 허락하신 일이잖습니까?”
“내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플로리아의 태도에, 카르티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보도 아니고, 난 그런 허락을 한 적 없소. 귀족들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말하지 마시오.”
“그럼 이걸 보시지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의 카르티스에게, 플로리아가 더 당당한 모습으로 황금색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 내용은 귀족들 과반수가 찬성하는 경우, 황좌를 교체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종이에 내가 언제 허락을……,”
서류를 훑어보던 카르티스가 조소와 함께 플로리아에게 한소리 하려던 때였다.
돌연 그가 하던 말을 멈췄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서류의 끝자락엔 보란 듯이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카르티스 본인의 것이 분명했다.
“분명 폐하께서 찍어주신 인장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대체 지금 무슨 말을…….”
카르티스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를 교체하겠다는 서류를 인가하는 황제가 어디 있단 말이오!”
“여기 지금 제 앞에 계시는군요.”
플로리아가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카르티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납게 변했다.
“이건 분명 누군가 내 인장을 훔쳐 저지른 게 분명하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
분노에 찬 카르티스의 물음에도, 모여있던 귀족들 중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동안 폭정을 일삼는 황제에게 쌓인 불만으로 인해, 황권 교체를 누구보다 원하던 건 사실 그들이었다.
어쩌면 플로리아보다도 더 원하고 있었다. 황제의 폐위를.
“폐하, 그건 너무 억측이십니다.”
“폐하의 인장을 훔칠 만큼 정신 나간 사람은 이곳에 없습니다.”
“지금 다들 뭐라고 했소?”
뒤늦게 한마디씩 거드는 귀족들을 보고 있자니, 카르티스의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분명 그들도 지금 상황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르티스가 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자신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는 서류에 태연히 도장을 찍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 이상함을 모른 척해야만 모두가 사는 길이었다.
지금 이 순간, 누가 황제의 인장을 훔쳤는지는 아무도 관심 없었다.
지금 상황만 잘 넘기면 곧 카르티스 프로슈트 황제의 시대도 끝이 날 거라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
그리고 그 순간, 구석진 자리에서 지금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카르티스의 비서인 드로이 헤이튼이었다.
그는 플로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남들 모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건 이번 일도 거의 끝이 났다는 의미였다.
* * *
2일 전.
플로리아에게 황금색 인장이 전달됐다. 카르티스 황제의 것이었다.
“이걸 벌써 구한 건가요?”
“여기 이것도 있습니다.”
드로이는 플로리아에게 황금색 종이를 함께 내밀었다.
공식 서류를 작성할 때 사용하는, 황제 전용 종이였다.
“이게 필요한 건 어떻게 알았나요?”
“며칠간 폐하 곁에서 지켜보다 보니 그 종이의 위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마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고맙군요.”
“제가 더 도울 건 없습니까?”
“일단은요. 그럼 내가 서류를 만들 테니, 오늘 저녁에 다시 인장을 가지러 오도록 해요. 그때까지 폐하께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하고요.”
“예, 알겠습니다. 아마 오늘은 외부 일정이 많은 날이라 인장이 사라진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실 겁니다.”
드로이는 일부러 카르티스의 사냥 날짜에 맞춰서 계획을 실행했다.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의 인장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기에, 오늘 아침에 제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인 후라 위험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냥터도 꽤 먼 곳으로 정했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카르티스가 황궁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플로리아가 가짜 서류를 만들 시간도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알겠어요.”
그의 확신에 찬 대답에 플로리아가 안심한 눈빛을 보냈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긴 이르지만, 그래도 일단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결국 드로이의 도움으로, 플로리아는 카르티스 모르게 황금색 서류 위에 그의 인장을 꾹 눌러 찍었다.
***
“그럼 이제 황권 변경에 대한 공개투표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플로리아가 아직도 식식거리고 있는 카르티스를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그딴 투표는 집어치우시오!”
결국 참지 못한 카르티스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던졌다.
플로리아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바닥에 떨어져 깨진 잔을 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저는 찬성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무거운 정적을 깨고, 파슈테 아리안느 공작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모습은 플로리아의 뜻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플로리아가 감사의 눈빛을 담아 파슈테를 바라봤다.
“저도 찬성입니다.”
“저도입니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도 줄줄이 손을 들어 올리며 찬성의 의사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파슈테의 용기로 생긴 변화였다.
“이건 말도 안 돼! 다들 죽고 싶은 것이오?”
카르티스가 소리치자, 그의 근처에 있던 이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분명 매일 인장을 확인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냔 말이야!”
카르티스가 분개했다.
황제의 인장을 아무렇게나 방치했다면 그도 할 말이 없지만, 분명 매일 아침 인장이 잘 보관되어 있는지 꼬박꼬박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질서정연하게 놓아두었기에, 그 자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은 그런 기색 하나 없었다.
‘근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이지.’
그는 드로이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분석해 모든 걸 완벽하게 파악하곤, 조심스럽게 인장을 돌려놓았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카르티스에겐 그 정도의 이성과 차분함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 이제 결과는 정해졌군요.”
카르티스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공개투표는 계속 진행되었다.
결과를 확인한 플로리아가 입을 뗐다.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었으니 결과는 찬성으로 하겠습니다.”
그건 카르티스를 폐위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봐라! 저자를 당장 지하 감옥에 가두거라!”
플로리아가 회의실 문 앞을 지키던 호위기사들을 향해 소리쳤고, 잠시 갈팡질팡하던 이들은 곧 카르티스의 양쪽 팔을 붙잡았다.
“네 이놈들! 지금 뭐 하는 짓들이냐!”
카르티스가 소리치며 발버둥 치자, 호위 기사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플로리아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일부러 말단 기사들만 배치해 두었다.
혹여라도 고위 기사들 중에 카르티스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있다면 곤란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말단 기사들인 만큼,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황제를 강제로 연행했다가 괜히 후폭풍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뒷일은 제가 책임질 테니, 지금 당장 황후 폐하의 말씀대로 지하 감옥으로 가십시오.”
하지만 어디에선가 때마침 레너드 경이 나타났고, 그의 말이 끝나자 호위기사들은 더 이상의 고민도 없이 카르티스를 그대로 끌고 나갔다.
“이거 놓거라! 이보시오, 황후! 플로리아!”
카르티스가 울부짖는 소리가 회랑을 따라 울렸지만, 아무도 그를 불쌍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저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남들 모르게 미소를 짓는 이들도 있었다.
“…….”
그때, 모든 일이 끝난 후 긴장이 풀려 멍하니 서 있는 플로리아를 향해 누군가 걸어왔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주는 이는 파슈테였다.
“……아버지.”
“고생 많았다.”
그는 그 한마디만 남긴 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지만, 파슈테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말로 표현하진 않아도 그도 마음이 아프리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자신이 나서서 카르티스를 막지 않으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될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래. 이제 정말 끝이야.’
플로리아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급히 대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한편, 지하 감옥으로 끌려온 카르티스는 여전히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대로 물러날 것 같으냐?”
“…….”
하지만 그가 아무리 소리치고 발버둥 쳐도, 호위기사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를 감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이곳에서 나가면 네놈들은 당장 처형을 당하게 될 줄 알거라!”
맡은 일을 끝낸 다른 호위기사들은 서둘러 감옥을 빠져나가 버렸고, 마지막으로 남은 레너드 경이 카르티스를 바라봤다.
“다른 죄수들을 위해 조금 조용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곤 그도 이 말만을 남긴 채,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 버렸다.
“지금껏 저 무례한 놈들을 호위기사로 두었다니……. 이보시오! 황후를 불러오라!”
카르티스가 분노를 못 참고 마구 소리치던 순간이었다.
“아휴, 시끄러워! 우리 아기 자는데 누가 이렇게 떠드는 거야?”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카르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옆자리에 갇힌 안젤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안젤리나?”
“쉿! 우리 아기 잔다고 했잖아!”
그녀는 정말 정신을 놓아버린 듯, 한 손에 작은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것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티스는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