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황제의 인장 (1)
새 비서를 바라보는 카르티스의 표정은 곱지 않았다.
오랫동안 함께한 비서를 공개적으로 처형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폐하. 저는 드로이 헤이튼 백작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아버지께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습니다.”
드로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지만, 카르티스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했다.
이미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겨버린 터라, 벌써 2주가 넘도록 비서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그동안 그의 비서로 들어온 이는 몇 명 있었지만, 모두 성에 차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모르크 후작처럼 처형을 당한 이도 있었다.
“……비서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당장 나가시오.”
카르티스가 비웃음과 함께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드로이는 개의치 않는 듯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폐하,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 내게 말대꾸를 한 건가?”
카르티스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드로이를 노려봤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폐하의 비서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더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굳이 귀한 목숨까지 내걸면서까지 맡을 직책은 아니란 얘기겠지요.”
“방금 뭐라고 했소?”
카르티스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잔뜩 구겼다.
한마디만 더 거들었다간 당장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드로이는 대쪽 같은 태도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제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폐하의 비서로 온 이유는, 순전히 사명감 때문입니다.”
“……?”
카르티스가 그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노골적으로 드로이의 눈을 바라봤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셔도, 비서 없이 폐하 혼자서 해내기엔 어려운 일들이 많지 않으십니까?”
“…….”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서가 없는 동안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직접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아져 불편했다.
모르크 후작이 곁에 있을 땐 그가 하는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었지만, 정작 오랜 비서가 자리를 비우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폐하 곁에 있는 동안, 어떤 불편함도 없도록 제가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
“시끄럽소.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비서는 필요 없……,”
카르티스가 재차 거절의 뜻을 전하려던 순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음 달에 있을 연회도 준비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
드로이가 재빨리 ‘연회’라는 단어를 꺼냈다.
예로부터 타레트 제국의 황실에선 계절마다 큰 연회를 주최하고 있었다.
봄의 연회만큼 규모가 크진 않아도, 여름 연회도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큰일을 비서 없이 해내는 건 누가 봐도 무리였다.
“설마 연회의 전권을 황후 폐하께 모두 맡기실 건가요?”
드로이의 물음에 카르티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 당장 플로리아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황제의 권위가 추락해가는 이 시점에, 연회마저 제대로 주체하지 못한다면 남들의 비웃음을 살 것만 같았다.
“흐음. 그럼 일단 연회까지만 임시로 일하기로 하고, 정식 비서로 들일지는 추후에 고민해 보도록 하지.”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고민해 보겠다고 한 것이니 너무 기뻐하진 마시오.”
카르티스가 인심 쓰는 듯 말하자, 드로이가 고개를 숙이며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그에게 주어진 오늘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 냈기 때문이었다.
* * *
“어떻게 되었다고 하던가요?”
플로리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제리헤이드가 주저 없이 상황을 알렸다.
“다행히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이군요.”
카르티스의 새 비서로 온 드로이에 관한 얘기였다.
“폐하께 절대 들켜선 안 돼요. 혹여나 그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네. 철저히 일러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드로이 헤이튼은 애초에 타레트 제국 사람도, 백작도 아니었다.
물론 이름마저도 가짜였다.
플로리아의 부탁에 제리헤이드가 에리튼 제국에서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남작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에리튼 제국을 위한 일이라는 말에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제리헤이드가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드로이를 데려온 건 아니었다.
예전에 그와 한 번 에리튼 제국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드로이는 누구보다 루이스 황제를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고위 귀족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카르티스의 비서라는 역할이 딱히 빛나는 자리는 아니어도, 드로이라면 분명 제 몫을 다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황후 폐하.”
“네?”
“드로이 헤이튼을 굳이 비서로 심어두려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동안 궁금증을 참고 기다리던 제리헤이드가 물었다.
플로리아가 먼저 자세한 계획을 알려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으나 문득 궁금했다.
혹여나 너무 위험한 일을 벌이는 건 아닌지 말이다.
만일 그런 거라면 제 선에서 그녀를 막을 예정이었다.
플로리아가 아무리 제국의 황후라고 해도, 카르티스의 폭주를 막기 위해 그녀가 희생하는 건 원치 않았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해보려 합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요?”
“타레트 제국의 법을 바꿔볼까 해요.”
플로리아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멈칫했고,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말입니까?”
제리헤이드가 심각하게 되묻자, 플로리아가 자신의 계획을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레트 제국에선 법을 새로 만들거나 바꿀 때, 황제의 의견이 제일 지배적이에요.”
“…….”
“황제가 먼저 허락을 해야 귀족들의 의견을 들을 자격이 생기죠.”
“아.”
“그래서 그 첫 번째 과정을 건너뛰기 위해, 내가 미리 손을 좀 써두려고 합니다.”
“…….”
“우선 황제가 허락만 하면, 귀족 다수가 찬성한 안건이 최종 통과되는 구조란 말이죠.”
“그렇다는 건…….”
제리헤이드가 하던 말을 멈추자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 현 황제의 폐위 안건을 반대할 귀족은 없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그 안건을 상정하기 위해 폐하의 비서가 필요한 거고요.”
“비서를 통해 뭔가를 얻어내려 하시는 겁니까?”
“황제의 인장이요.”
플로리아의 마지막 대답에, 제리헤이드가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로이가 어떤 방식으로든 황제의 인장만 빼내 온다면, 플로리아는 가짜 서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서류를 통해 카르티스를 폐위시키는 게 최종 목표였다.
“이왕이면 여름 연회가 열리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할 생각이에요. 지금 상황에서 황제 폐하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고 싶진 않거든요.”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겠군요.”
제리헤이드가 탁자 위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앞으로 고작 2주 남짓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아마 기회는 단 한 번뿐일 테니,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요.”
플로리아가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그녀도 이 계획이 성공하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 황제의 인장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드로이뿐만 아니라 그를 데려온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카르티스와의 끈질긴 악연을 이제 끊어내야 할 때였다.
***
“폐하, 오늘 회의 일정과 연회 참석 예정자 명단입니다.”
드로이가 카르티스 옆쪽에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려놓자, 여태 다른 서류들을 훑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벌써 명단까지 정리한 것이오?”
모르크 후작도 일처리가 느린 편은 아니었지만, 드로이는 그에 비하면 세 배는 더 빨랐다.
“예. 그리고 다음 주에 있을 사냥 일정도 미리 정리해 두었으니, 시간 되실 때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카르티스는 별 대답 없이 그가 내려놓은 서류 더미를 바라봤다.
진작 이런 비서가 곁에 있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에 잠시 스쳤다.
사실 처음 드로이를 순순히 비서로 받아준 건, 어차피 잠깐 데리고 있다가 없애버릴 생각이 컸다.
귀찮은 여름 연회만 끝나면 말이다.
모르크 후작처럼 조금이라도 일 처리를 못 하는 경우가 생기면, 당장 감옥에 가둬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가 생소한 헤이튼 백작가 사람이라는 말에도 그러려니 넘겼던 거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드로이는 꼼꼼한 일 처리로 제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럼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드로이의 물음에 카르티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모두 해놓은 덕에 당장은 더 필요한 게 없었다.
“아! 그리고 이건 지금 바로 황후 폐하께 보내드려야 하는 서류입니다.”
드로이가 뭔가 생각난 듯, 내려놓은 서류 더미의 제일 위에 놓여있던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게 무엇이오?”
“다음 달 황실 예산에 대한 서류입니다.”
카르티스가 곧바로 그 서류를 집어 들었다. 플로리아에게서 온 것이었다.
“흐음.”
그는 잠시 내용을 훑는 듯하더니, 별 고민 없이 제일 아래 칸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곤 안쪽에 넣어둔 황제의 인장을 꺼내 도장을 꾹 찍었다.
어차피 플로리아가 알아서 해결할 예산 문제까지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는 지금 바로 황후 폐하께 서류를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그 순간, 카르티스가 인장을 제자리에 돌려두는 것까지 확인한 드로이는 곧바로 서류를 챙겨 집무실을 나섰다.
‘이제 위치는 확인해 두었으니 다음 일은 시간 문제겠군.’
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플로리아가 굳이 오늘 예산에 관한 서류를 보낸 건, 드로이에게 인장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유심히 카르티스의 행동을 살폈었다.
다행히 카르티스는 드로이의 시선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끝내야겠어.’
드로이의 입장에선 모든 계획이 빨리 진행될수록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되면 굳이 밤을 새워 가며 카르티스의 비서로 일할 필요도 없었다.
카르티스의 눈에 들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모든 서류를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며칠 후.
그런 드로이의 노력이 통한 건지, 그가 황제의 인장을 훔칠 기회는 생각보다 빠른 시기에 찾아왔다.
그날은 여름 연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