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섬뜩한 경고
“……지금 뭐라고 했소?”
카르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동시에 그의 눈썹은 불쾌한 듯 꿈틀거렸다.
“수석 비서의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오갔다.
“제국의 황제를 모시는 자가, 그렇게 쉽게 자신의 자리를 버리겠다는 것이오?”
카르티스가 모르크 후작을 향해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가 지난 몇 년간 황제로 지내는 동안, 이번처럼 큰 고비를 겪은 적은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시기에 제 곁을 떠나겠다는 비서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원래 떠나려던 사람도 곁에 남는 게 정상일 것 같았다.
“애초부터 제가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모르크 후작은 단호했다.
사실 그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몸을 사리던 그였다.
그러나 이대로는 황제의 비서 자리는 근근이 유지할지 몰라도, 카르티스의 황좌가 위태로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분명 비서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죗값을 물게 될 게 뻔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카르티스와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의 비서라 할지라도 말이다.
“좋소. 그만두시오. 어차피 나도 급료만 축내는 쓸모없는 비서 따윈 필요 없던 차였으니.”
“…….”
카르티스의 말에 모르크 후작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가더라도 그는 여전히 타레트 제국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카르티스는 이 제국의 황제였다.
모르크 후작이 모든 불평을 다 내뱉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다만 이거 하나만 알아두시오. 그대는 오늘의 선택을 분명 후회하는 날이 있을 거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만두게 된 일은 죄송하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내가 장담하지. 후회하게 될 거요.”
“…….”
섬뜩한 미소와 함께 경고를 보내는 카르티스의 모습에, 순간 모르크 후작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분명 빈말은 아닌 것 같았기에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와 더 이상 마주 보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럼 새로운 비서를 뽑게 되면 인수인계를……,”
“됐으니 그만 가 보시오. 지금. 당장. 황궁 밖으로.”
카르티스는 정말로 당장 모르크 후작을 쫓아내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순식간에 그가 그만둔 게 아니라 마치 황제에게 잘린 것 같은 모양새가 됐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디 강녕하십시오, 폐하.”
그러자 모르크 후작은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남은 미련은 없는 듯했다.
“저런 무능력하고 책임감 없는 이를 여태 비서로 곁에 뒀었다니…….”
카르티스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모든 일마다 제대로 풀리지 않은 이유가 모르크 후작 때문이라 여겼다.
분명 처음에 그가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냈을 땐 아주 불쾌했었다.
하지만 이제 쓸모없는 비서도 사라졌으니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느낌이 나쁘지 않군.”
카르티스가 비어버린 옆자리를 바라봤다.
이제 더 이상 수석 비서는 없지만, 당분간 혼자서 해내더라도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며칠이 흘러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안젤리나를 감옥에만 가둬두고 제대로 처벌을 내리지 않는 그를 원망하는 이들이 늘었고, 귀족들은 대놓고 황제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들 날 비웃는다 이건가?”
카르티스는 분노했다.
하다못해 방을 청소하는 말단 하녀마저도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만 같았다.
“지금 왜 그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 거지?”
그는 이유 없이 하녀 하나를 몰아 붙었다.
“네? 저, 저는 폐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감히 황제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이냐?”
카르티스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지금 황궁 안의 상황이 그를 옥죄었고, 점점 내면의 불안감이 커졌다.
이대로 상황이 잦아들지 않는다면…….
어쩌면 안젤리나뿐만 아니라 헬렌까지도 처형해야 할 것 같았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하녀는 두 손을 모으며 무릎까지 꿇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카르티스는 하녀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을 불렀다.
“예, 폐하.”
그러자 시녀 몇 명과 호위 기사들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요즘 들어 부쩍 예민해져 있는 카르티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당장 이 하녀를 감옥에 가두거라.”
“예?”
“아니다. 지금 당장 처형해라!”
카르티스의 말투엔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살려달라는 하녀의 부르짖음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호위 기사들은 곧바로 그녀를 끌고 나갔다.
“……대체 다들 뭐가 문제인 거야!”
혼자 남겨진 카르티스는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했다.
평온하기만 하던 예전이 그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상황을 유발한 건 모르크 후작 같았다.
“그자 말대로 플로리아에게 정부 허가서만 써주지 않았어도, 지금 이렇게 상황이 꼬이진 않았을 텐데…….”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수석 비서 자리를 그만두었다고 해도, 본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은 받아야 했다.
“……적당한 죄명이 필요해.”
괜히 누명이라느니 억울하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으려면, 그의 가족들까지도 모조리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아주 큰 죄명이 필요할 듯했다.
모르크 후작의 목숨을 손아귀에 쥔 카르티스가, 또다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 *
“네? 황제 폐하께서요?”
카르티스가 이유 없이 하녀를 죽였다는 소문은 이미 황궁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고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플로리아가, 놀란 듯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떨어트렸다.
“황제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즉결 처형하신 모양인데, 주변 목격자들 말에 의하면 그날 특별한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엔 모르크 후작도 내쫓았다더니, 대체 무슨 짓을…….”
플로리아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그가 황제로서 자질이 없었다고 한들, 제국민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하다 하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그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괜찮으신가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걱정스레 플로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부인, 지금 당장 제리헤이드를 만나야겠어요.”
“네. 채비를 돕겠습니다.”
플로리아가 하던 업무도 미루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르앙 백작 부인이 서둘러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 * *
한시가 급한 상황에 플로리아는 곧바로 제리헤이드를 찾아갔다.
그에게만 부탁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후 폐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사실 제리헤이드는 이미 오늘 낮 플로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었다.
하지만 밀린 업무 탓에 플로리아가 먼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물론 마음은 함께하고 싶지만, 한동안 다른 일들을 신경 쓰느라 자신이 맡은 일들을 소홀했던 이유였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기에 급한 일들을 먼저 처리할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바쁠 거라던 말과 다르게 플로리아가 눈앞에 나타나자 그는 흠칫 놀란 듯했다.
평소보다 그녀의 안색이 부쩍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급히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제게 부탁하실 일이라면……?”
“혹시 에리튼 제국에서 믿을만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을까요?”
플로리아가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 필요하시다면 사람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그자를 카르티스 황제 폐하의 비서로 쓸 생각입니다.”
플로리아가 다급한 눈빛을 보냈다.
“내 뜻대로 움직여 줄 사람을 폐하의 측근으로 심어두려 해요.”
“그럼 타레트 제국 사람을 쓰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타레트 제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폐하의 비서 자리를 피할 테니까요. 모르크 후작처럼 될 게 뻔하니 말이죠.”
“…….”
제리헤이드도 모르크 후작이 황궁 밖으로 쫓겨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카르티스가 대외적으론 자신이 비서를 잘라버린 것처럼 알렸기 때문이었다.
“위험을 조금 무릅쓰고라도 우리를 도와줄 에리튼 제국 사람이 필요해요.”
플로리아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라면 제가 구해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사람을 보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적임자를 데려오겠습니다.”
“알겠어요. 단, 이번 일은 절대 들켜선 안 되니 비밀 유지에 각별하게 신경 쓰도록 해요.”
“네, 황후 폐하.”
제리헤이드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틀림없이 해낼 게 분명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제리헤이드가 에리튼 제국에서 사람을 구해오는 며칠 사이, 하루가 멀다하고 제국민들이 죽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황실 처형장엔 공허한 고요함이 맴돌았다.
“반역자인 모르크 후작을 당장 사형에 처하도록 하라!”
카르티스가 소리치자, 밧줄에 묶여있던 모르크 후작이 억울하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제가 왜 반역자입니까?”
모르크 후작의 곁엔 그의 가족들도 전부 함께였다. 아직 어린 그의 아들까지도.
“황제의 비서로 일하는 동안 국정을 어지럽히고, 제멋대로 군 것이야말로 반역에 버금가는 중죄인 걸 모르는 건가?”
“……폐하!”
모르크 후작의 부르짖음에도 카르티스는 꼿꼿했다.
안젤리나의 처벌을 고민하던 것과 다르게, 그의 결정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이미 지난 며칠간 그의 손에 죽어간 하녀와 하인들이 여럿이었고, 이제 전 비서인 모르크 후작의 가족들까지 죽이려 하고 있었다.
한 번 가벼이 여기기 시작한 사람의 목숨은, 행동이 거듭될수록 더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폐하, 이렇게 저를 처벌하신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닐 겁니다.”
“그 입 다무시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어……,”
“여봐라!”
카르티스는 그의 말을 단칼에 자르며 집행인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처형을 시작하거라!”
그의 말에 모르크 후작의 부인인 몰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했다.
모르크 후작은 힘없이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카르티스의 말이 법이고 규칙이었다.
“살려주십시오, 폐하!”
황제에게 애원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어진 모르크 후작이 소리쳤다.
하지만 카르티스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처형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후작의 어린 아들만이 멀뚱멀뚱 처형장을 둘러볼 뿐이었다.
“폐하!”
그리고 다음 순간, 모르크 후작의 외침을 따라 처형장엔 공허한 메아리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