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마지막 할 말
다음 날은 이른 아침부터 황궁 안이 시끌벅적했다.
“……황후 폐하, 알고 계셨습니까?”
평소처럼 아침 신문을 챙겨오던 에르앙 백작 부인이 놀란 눈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 커피 한 잔을 머금던 플로리아가 시선을 돌려 신문을 확인했다.
별다른 수고를 들이지 않았으나, 신문의 1면에 커다랗게 안젤리나의 이름이 박힌 게 보였다.
“전부 사실입니다. 내가 제보한 내용이니까요.”
“네? 황후 폐하께서요? 대체 언제요?”
“어젯밤에요.”
플로리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네며 지난밤 일을 떠올렸다.
제리헤이드가 카르티스를 만나러 간 직후, 불안해하던 플로리아는 레너드 경을 직접 만나러 갔었다.
자신의 방에서 서류 하나를 챙겨서 말이다.
“황후 폐하께서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레너드 경은 갑작스럽게 남궁까지 찾아온 그녀를 보고 당황한 것 같았다.
“……남들 모르게 급히 부탁할 게 있어서요.”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가 듬직하게 대답하자 플로리아는 지체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지금 당장 마튼 신문사로 가서 기사를 하나 실어줘요. 내일 아침 1면에 나올 수 있도록요.”
“알겠습니다.”
“내용은 여기 다 적어두었어요.”
플로리아가 미리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으나, 레너드 경은 별다른 이유를 묻진 않았다.
그녀의 행동에 일말의 의심도 없다는 듯, 그는 그대로 신문사로 향했다.
최대한 서둘렀음에도 시간이 촉박했다.
더 늦어지게 되면 내일 아침 기사를 다 마감해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가 명령 수행에 성공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신문엔 플로리아가 원하던 기사가 실려있었다.
[안젤리나 페일, 황제의 정부가 저지른 만행들… 카르티스 황제의 책임은 어디에?]
“내가 정했지만 기사 제목이 마음에 드는군요.”
플로리아가 웃으며 신문을 훑자, 에르앙 백작 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조마조마합니다.”
“걱정 말아요. 익명으로 한 제보라 별일은 없을 테니까요.”
플로리아의 말대로 신문 기사 어디에도 그녀와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황실 관계자에게서 전해 들은 사실을 신문에 실었다는 내용뿐이었다.
어차피 마튼 신문사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거라곤, 레너드 경이 황실 호위 기사란 것뿐일 테니까.
“그런데 기사는 어떤 내용인가요? 놀란 마음에 제가 제목만 확인해서요.”
에르앙 백작 부인의 물음에 플로리아가 천천히 기사를 정독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제대로 실렸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안젤라나가 흑마법을 부리고 제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한 내용이에요. 그녀가 타레트 제국의 위상과 권위를 추락시킨 것에 대해, 황제 폐하의 책임은 없는지 말이죠.”
“어머나, 그런 기사를 실어도 그 신문사는 괜찮을까요?”
“귀족들 사이에서 큰 신임을 얻은 곳이라 괜찮을 거예요.”
마튼처럼 규모가 큰 신문사는 황제도 쉽게 건드리기 어려운 그들만의 힘을 갖고 있었다.
언론이 갖고 있는 그 힘은, 때론 황족에게 공포가 되고 위협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요?”
그리고 애초에 플로리아가 굳이 그곳에만 기사를 실은 이유는 하나였다.
귀족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마튼 신문사 정도면 제국의 실세인 귀족들에게 신뢰감을 주기엔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귀족들의 황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야 카르티스의 직위를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더 이상 제리헤이드와 함께하는 이 황궁 생활에 위협도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제드는 어떻게 된 거지.”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르앙 백작 부인에게 플로리아가 손을 내저었다.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탓이었다.
사실 지난밤 레너드 경을 만나고 온 후,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인지 밤이 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조차 없는 걸 보면, 카르티스와의 만남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몰랐다.
‘어제 기분이 찝찝했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던 걸까.’
일단 플로리아는 정해진 공식 일정을 수행한 후에 카르티스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그가 제리헤이드의 발목을 묶어둔 게 아니라면, 섣불리 움직였다가 괜히 일이 더 커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시기에 무작정 성급하게 행동할 순 없었다.
그저 제리헤이드에게 별일이 없길 바라는 것밖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 *
같은 날 아침, 카르티스는 정례 회의부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정말 폐하께서 명령하신 겁니까?”
“분명 정부의 잘못은 황제의 잘못이기도 하죠.”
“정확한 입장표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저마다 불만 섞인 표정으로 한마디씩 내뱉었다.
마튼 신문사의 기사 하나가 주는 파급력은 플로리아의 예상보다 컸다.
소문은 몇 시간 만에 눈덩이처럼 부풀었고, 심지어 카르티스가 안젤리나를 꼭두각시로 세웠다는 이야기까지 퍼졌다.
그가 안젤리나를 통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몰래 죽여온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다들 입조심 하시오. 나는 그대들의 신하가 아닌 황제란 걸 명심하란 말이오.”
“폐하.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고 하셔도 살인은 명백한 살인입니다.”
카르티스의 엄포에도 귀족들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이미 헬렌과 안젤리나의 가벼운 처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던 상황에서, 이런 기사까지 터지자 상황은 누구도 걷잡을 수 없어진 상태였다.
“다들 알다시피 나는 이번 일엔 전혀 관계가 없소. 정부는 어디까지나 정부일 뿐.”
“…….”
“황후도 아닌 이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내가 직접 관여하는 건, 당연히 한계가 있다는 건 다들 알지 않소?”
“…….”
카르티스는 지금껏 그래왔듯 이번 일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했다.
제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귀족들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잠잠해질 거라 생각했다.
“만일 이번에도 안젤리나 페일에게 제대로 처벌을 내리지 않으신다면, 다들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저희 타레트 제국의 명예를 더 이상 떨어뜨리진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귀족들의 불만은 전과 달랐다.
그들은 카르티스에 대한 신임을 잃은 듯, 잠잠해질 줄 몰랐다.
“걱정 마시오. 안젤리나는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될 테니 말이오.”
결국 궁지에 몰린 카르티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에게 대체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할지 고민됐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이미 처형을 당하고도 남았을 죄목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는 날이 올까 봐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손으로 안젤리나를 처형하게 되는 건, 정말이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흐른 거지?’
카르티스가 지난 밤을 떠올렸다.
분명 제리헤이드에게 대회의실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는 기쁨에 젖어있었다.
곧 모든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내키진 않지만 플로리아와의 관계도 제대로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 제리헤이드가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모르크 후작을 비롯해 아무에게도 내 계획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거냔 말이야.’
애초에 누설한 적이 없는 계획을 제리헤이드가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
“…….”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고, 귀족들의 분노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 회의 내내 상황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자, 카르티스의 미간엔 깊은 주름만 패고 있었다.
* * *
같은 날 오후. 제리헤이드는 더 늦기 전에 플로리아를 찾아갔다.
그녀가 집무실에서 막 나오던 차였다.
“……황후 폐하.”
“제드? 어떻게 된 거예요? 아무 일 없는 건가요?”
밤새 그를 걱정했던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의 몸을 여기저기 살피며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황후 폐하 덕분에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제리헤이드는 남들 눈을 살피며, 플로리아를 다시 집무실 안으로 이끌었다.
“대회의실 앞엔 이상하게도 호위 기사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는 플로리아에게 지난밤 자신이 겪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황후 폐하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 귓가를 맴돌았어요. 때론 직감이 제일 정확한 법이니까요.”
“역시 황제 폐하께서 뭔가 일을 꾸민 게 분명하군요.”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플로리아는 카르티스가 제리헤이드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저를 아마 유인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여태 어디에 있던 건가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별실까지 노리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때마침 기사를 내주셨더군요. 덕분에 관심이 그쪽으로 쏠릴 수 있었습니다.”
“……그게 나라는 걸 어떻게 알았나요?”
플로리아가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제가 위험한 때에 맞춰 그런 기사를 낼 사람은 황후 폐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동안 나를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두죠. 무엇보다 그대가 이렇게 무사하니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아마 폐하께서도 지금 당장은 그대에게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을 거예요. 귀족들의 반발이 심할 테니 말이죠.”
“그럴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조금 기다리려고 합니다. 귀족들이 황제 폐하를 벼랑 끝까지 몰아넣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려고요.”
플로리아는 이미 마지막 계획을 세워둔 듯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제리헤이드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무엇이든 함께하겠다는 뜻을 담아 그도 플로리아의 눈을 바라봤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눈빛을 주고받으며, 지금 이 혼란스러운 시기가 얼른 지나기만을 바랐다.
* * *
한편, 모르크 후작은 카르티스에게 참고 참던 불만이 터졌다.
그동안 자신의 비서직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불의를 보더라도 참아내며, 사소한 심부름도 도맡아 하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 안젤리나의 일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황제의 수석 비서이기 전에 그도 타레트 제국의 귀족이었다.
더 이상 이 제국이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폐하, 이번엔 정말 안젤리나 님을 처형하셔야 합니다.”
모르크 후작이 두 눈을 질끈 감고 뱉기 힘든 말을 내뱉었다.
이번에도 은근슬쩍 안젤리나에 대한 처벌을 미루려는 카르티스를 더는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의 수석 비서로서 마지막 도리를 할 생각이었다.
“모르크 후작, 그 일이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조용히 하시오.”
“저는 폐하의 최측근입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만큼은 폐하를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보시오. 그동안 그대가 한 말들이 내게 큰 도움이 된 게 있다고 생각하나?”
“…….”
모르크 후작이 입을 닫았다.
물론 그가 카르티스를 위해 계획했던 일들엔 잔실수가 많았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거나, 플로리아와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분명 카르티스를 위한 것이었다.
“이미 비서 자리에서 잘렸어야 할 사람을 지금껏 데리고 있어 줬더니……. 고마운 줄을 모르는군.”
“폐하…….”
모르크 후작이 쥐고 있던 주먹을 부르르떨었다.
“시끄러우니 더 할 말 없다면 이만 나가보시오.”
“아니요. 마지막으로 할 말이 남았습니다.”
모르크 후작이 전과 다른 원망 섞인 눈빛으로 카르티스를 바라봤다.
그리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저는 이만 폐하의 수석 비서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