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불안하고 불길한
카르티스에겐 지난 며칠이 몇 년처럼 느껴졌다.
황궁 안은 고요했고, 어느 때보다 외로움이 짙게 느껴졌다.
그의 곁에 남은 정부는 이제 에이니 한 명이었다.
처음에 들였던 세 명의 정부들은, 황궁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다가 외로움에 지쳐 출궁한 지 오래였다.
카르티스도 딱히 그들을 막지 않았다. 당장 곁에 둘 다른 정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말 헬렌도 안젤리나도 곁에 없는 건가.”
여섯 명의 정부 중, 고작 단 한 명만 남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황제가 된 지 어언 4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그의 핏줄을 물려받은 아이 한 명조차 없었다.
젊은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루이스 황제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랑하는 황후와의 사이에서 황자를 낳았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나도 황후와의 사이만 잘 유지했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았을까?’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카르티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다.
아마 지금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제국민들 뿐만 아니라, 이웃 국가에서까지 그를 한심하게 여길 것 같았다.
만일 이럴 때 곁에 플로리아가 곁에 있다면, 국제적인 망신은 덜하지 않을까 싶었다.
“황실의 핏줄을 가진 아이 하나만 있어도, 이번 일 정도는 무마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
당장 제국민들의 눈을 돌릴 뭔가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플로리아를 제 옆에 붙잡아 두어야 할 것 같았다.
황궁 안에서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감추기 위해선, 경사스러운 일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에이니와의 사이에 아이를 만드는 것보단 플로리아와의 아이가 제국민들에게 더 큰 파급력을 지녔을 건 분명했다.
그리고 이 정도 상황은 에이니도 충분히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
당장 급한 상황만 해결하고 나면, 다시 에이니에게 관심과 사랑을 쏟아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제리헤이드를 플로리아 곁에서 떼어내는 게 급했다.
다른 정부 두 명은 그리 깊은 사이는 아닌 듯 보였으나, 그는 달랐다.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면, 그에게 품은 게 분명 단순한 감정은 아닐 것 같았다.
“그 둘을 떼어놓을 좋은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사람이 누구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이건 비서인 모르크 후작이나 에이니와도 의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만일에 대비해 아무에게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분명 방법이 있을 텐데…….”
그 순간, 한참을 고민하던 카르티스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지난 며칠간 정부들이 일으켰던 모든 소란을 한 번에 잠재우면서, 제리헤이드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자 주동자를 그로 몰아가는 것.
“어쩌면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풀리겠군.”
계획대로만 잘 흘러간다면, 오히려 이번 일을 발판삼아 더 좋은 기회를 쥐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후회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모르크 후작!”
카르티스는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급히 비서를 불러들였다.
더 늦기 전에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
그날 저녁. 플로리아는 레너드 경, 헤미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던 차였다.
“황후 폐하, 이 서류는 무엇입니까?”
나갈 채비를 하던 플로리아에게 에르앙 백작 부인이 물었다.
그녀의 손엔 의문의 서류 두 장이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쉬에게 부탁해서 준비한 정부 서류예요.”
“네? 설마 새로운 정부를 또 들이시려는 건 아니시죠?”
“그럴 리가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난색을 표하자, 플로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레너드 경과 헤미쉬의 정부 계약 기간이 이제 이틀 남았더군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그런데 아직 마무리 지을 일들이 남아서, 그들에게 계약 연장을 제안할 생각이에요.”
“음, 두 사람이 꼭 있어야 하는 건가요?”
시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앙 백작 부인은 혹여나 또 황궁 안에 폭풍이 몰아칠까 봐 두려웠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조금 더 곁에 있어 준다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제리헤이드가 돌아온 이후 플로리아는 다시 전처럼 평온을 되찾긴 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모든 계획을 마무리한 상태에서 제대로 나머지 정부들과의 계약을 정리하고 싶었다.
애매하게 계약을 끝내기보단 그들과의 계약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그녀가 계획했던 일들도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으니 말이다.
“황후 폐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마음 가는 대로 하시는 게 좋겠지요. 다만 두 사람도 같은 마음이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걱정 어린 투로 말하자, 플로리아도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마 계약 연장을 받아줄 것 같긴 한데, 그 사이에 마음이 변하진 않았겠죠?”
***
“당연히 좋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어진 플로리아의 물음에, 헤미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진정하거라, 헤미쉬.”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
플로리아가 계약 연장 의사를 묻자, 헤미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저렇게 대답했다.
“신중히 고민해보고 천천히 대답하거라.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고민할 게 뭐가 있나요? 전부터 제 소원은 황후 폐하 곁에 조금 더 있는 것이었는 걸요.”
어딘가 모르게 결의에 찬 헤미쉬의 대답에 플로리아가 흐뭇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대답해줘서 고맙구나.”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황후 폐하.”
그때, 헤미쉬가 플로리아에게 인사하던 걸 멈추며 레너드 경을 바라봤다.
“아, 그럼 레너드 경은 어떡하실 건가요?”
“저는…….”
그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듯, 대답하기 곤란한 표정이었다.
“이미 계약 기간은 끝난 거니 거절해도 괜찮아요. 편하게 대답하도록 해요.”
플로리아가 담담히 얘기했다.
조금 아쉽긴 해도, 두 사람 모두에게 정부 계약을 연장해 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게 아니라, 연장을 하게 된다면 기간을 얼마나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기간이라면?”
“언제까지인지 확실한 날짜를 명시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설마 그거 때문에 바로 대답을 안 하신 겁니까?”
헤미쉬의 물음에 레너드 경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가 내켜 하지 않던 부분은 예상치 못한 사소한 것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날짜를 생각해 본 건 아니지만, 레너드 경을 위해 정확한 날짜를 명시한 계약서를 다시 준비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것 외엔 더 원하는 수정 사항이 없나요?”
“예,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황후 폐하.”
“다시 계약하게 돼서 반갑군요.”
플로리아가 손을 내밀자, 두 사람이 번갈아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헤미쉬는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레너드 경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걸 보니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이렇게 곁에 있어 주니, 정말 든든하네요.”
플로리아가 자신의 두 정부를 바라봤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불가능했으리라.
그리고 제일 중요한 세 번째 정부,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분명 지난 몇 달간은 아주 힘든 시기였지만, 그가 있었기에 모든 과정이 힘들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에게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었다.
같이 복수를 다짐한 사이 이전에, 곁에 꼭 있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를 만나야겠어.’
앞선 두 명의 정부와 관계를 다시 정리했으니, 세 번째 정부와의 관계도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
플로리아는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제리헤이드를 찾아갔다.
그는 어딘가 급하게 나가려던 중이었다.
“황후 폐하, 이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는 그대는 어딜 가는 건가요?”
플로리아가 늦은 시간임에도 격식을 갖춰 차려입은 제리헤이드를 위아래로 훑었다.
“……급한 약속이 생겨서요.”
그저 아는 지인을 만나러 간다기엔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뭔가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려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지금 어딜 가려는 건지 말해줄 수 있나요?”
플로리아는 일부러 그의 행선지를 캐물었다.
평소였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뭔가 마음이 찜찜했다.
“실은 카르티스 황제 폐하를 뵈러 가던 길입니다.”
“폐하를요? 왜죠?”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갑자기 대회의실로 오라는 명이 있으셔서요.”
플로리아는 그제야 왜 기분이 찜찜했던 건지 깨달았다.
제리헤이드도 카르티스를 만나러 가는 게 껄끄러우니, 저도 모르게 싫은 내색을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굳이 왜 카르티스가 대회의실에서 만남을 가지려는 건지 의문이었다.
“……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서요.”
플로리아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가 몽수아에 다녀온다고 해도 흔쾌히 보내주던 그녀였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뭔가 불안했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거절하기 곤란하다면, 오늘은 내가 대신 가서 폐하를 뵙죠.”
“……황후 폐하.”
제리헤이드가 곤란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뒤늦게 자신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내가 그대를 너무 곤란하게 만들었네요.”
“괜찮습니다. 요즘 불안한 일들이 많아서 그러실 거예요.”
“…….”
“잠시 대화만 나누고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요.”
플로리아가 붙잡고 있던 그를 놓았다.
그녀의 손끝은 아직도 불안한 듯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그럼 최대한 서둘러 돌아오도록 해요.”
“네, 그러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덕분에 불안함이 사그라드는 것도 잠시, 플로리아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왜 그러지?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이대로 가만히 있기엔 너무 마음이 심란할 것 같았다.
“안 되겠어.”
결국 그녀는 멀어져가는 제리헤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