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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공허한 목소리 (97/106)

97화. 공허한 목소리

제리헤이드는 로레인에게서 건네받은 편지들을 카르티스에게 전했다.

“그리고 이게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건 그녀가 과거 안젤리나와 주고받았던 밀서였다.

“…….”

카르티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일단 그 편지들을 확인했다.

대부분 안젤리나가 남몰래 흑마법의 사용을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편지지는 일반 평민들은 접하기 어려운 황실에서 사용하는 종이였고, 안젤리나의 필체도 확실했다.

하지만 카르티스는 아직까지도 눈앞에 있는 증거를 신뢰할 수 없었다.

“이게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가벼운 물음과는 다르게 카르티스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그의 모습에 로레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급하게 입을 뗐다.

“모르셨겠지만 안젤리나는 어릴 때부터 악한 본성을 지닌 아이였어요.”

“네가 안젤리나에 대해 잘 아느냐? 아, 같은 영지 출신이라고 했던가?”

카르티스가 전에 안젤리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로레인을 하녀로 들이기 위해 그녀와의 친분을 과시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네. 저도 안젤리나와 같은 몽수아 출신입니다. 그 아이와 함께 몇 년간 술집에서 일했었고요.”

“……잠깐. 술집이라니? 안젤리나는 그런 곳에서 일한 적이 없다. 적당히들 하시오!”

카르티스가 언성을 높였다.

그녀가 일하던 커피 가게에서 처음 만났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곳은 그 누가 보아도 술집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계셨다면 아마 거짓말을 했을 겁니다. 안젤리나는 항상 거짓말에 능숙했으니까요.”

이 또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

그가 예전만큼 안젤리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허무맹랑한 말들을 쉽게 받아들일 순 없었다.

그녀가 그동안 이렇게 수많은 거짓말을 했을 거라 믿고 싶지 않았다.

“혹시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는 건 알고 계셨나요?”

“……뭐라고 하였느냐?”

“트리스탄이요. 안젤리나는 그 남자와 오랫동안 함께 살기도 했습니다. 모르셨으니 그 애를 정부로 들이셨겠죠.”

“그 입 다물거라…….”

쏟아져 나오는 로레인의 말에 카르티스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지금껏 봐온 안젤리나는 욕심이 많긴 해도 순수하고 때론 아이 같은 여자였다.

그런 모습을 사랑하기도 했고, 누구보다 솔직한 그녀가 마음에 들었었다.

그렇기에 여전히 모든 게 거짓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폐하의 말씀처럼 제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영원히 비밀로 남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 로레인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당당한 것 같았던 말투에도 긴장감이 묻어났다.

“이제 더 이상 안젤리나의 악행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어요. 그동안 오랜 인연을 이어오던 저까지 버렸던 여자예요.”

그녀가 카르티스를 향해 호소하면서도 한편으론 제리헤이드를 바라봤다.

사실 두 사람은 남모르게 암묵적인 거래를 한 상태였다.

제리헤이드는 에리튼 제국에서 플로리아에게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몽수아에 들러서 로레인을 찾아냈었다.

그리곤 그녀에게 황실에 나타나 안젤리나의 악행을 증언해 달라고 요구했다.

안젤리나와 함께 처벌받길 원하지 않는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던 로레인은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안젤리나의 죄를 밝히지 않는다면, 흑마법을 쓴 죄를 혼자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안젤리나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라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 그리고 또 한 명의 증인이 있습니다.”

로레인의 마지막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르티스가 집무실 문을 바라봤다.

그러자 때맞춰 해리스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저, 저는 안젤리나 님의 측근 하녀로 일했던 해리스 데인이라고 합니다.”

해리스는 카르티스의 눈도 바라보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동안 네가 겪었던 안젤리나에 대해 이야기해 보거라.”

제리헤이드의 말에 해리스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그게 그러니까…….”

해리스가 메마른 입술을 움직여, 그동안 느꼈던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꺼내놓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늘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무안을 주는 분이셨어요. 물건을 집어 던지는 일은 늘상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해리스의 담담한 증언에 가장 놀란 이는 카르티스가 아닌 플로리아였다.

플로리아는 그녀야말로 자신이 지켜줘야 하는 존재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렇게 증언을 위해 카르티스 앞까지 나설 줄은 몰랐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여기까지 오다니.’

안젤리나에게서 벗어나게 해준 은혜를 갚기라도 하려는 듯, 해리스는 플로리아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오, 오늘 제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굳이 이렇게 증인으로 나타난 이유는,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안젤리나가 황궁에 들어오기 전엔 분명 모든 게 평화로웠다.

플로리아와 카르티스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어도, 적어도 누군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안젤리나는 이미 많은 이들을 죽인 상태였다.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안젤리나를 직접 만나야겠다.”

카르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일 모든 게 거짓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죗값을 물게 될 거라는 걸 명심하시오.”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안젤리나가 살인자라는 증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젤리나의 입으로 직접 하지 않은 말들을 믿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가 안젤리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고 여겼다.

***

한편 같은 시각, 안젤리나는 어떻게 에이니에게 복수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자신에게 어떤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울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황제 폐하의 옆자리를 완전히 빼앗기기 전에, 서둘러 내 자리를 되찾아야만 해.”

욕심에 눈이 먼 그녀가 당장 에이니에게 찾아갈지 고민하던 그 순간, 갑작스럽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안으로 들어온 건 카르티스였다. 그의 주변엔 여러 명의 호위 기사도 함께였다.

“……!”

안젤리나가 미친 척을 해야 할지 이제 괜찮아진 척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카르티스가 먼저 물었다.

“네가 황궁 안에서 흑마법까지 손을 댄 게 사실이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안젤리나가 연기를 할 여유도 없이 대답했다.

카르티스의 목소리는 심각했고, 안젤리나의 동공은 흔들렸다.

“보아하니 이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군. 그렇다면 어서 대답하거라.”

“폐하…….”

순간 카르티스의 눈빛이 변했다.

“정말 네가 흑마법을 사용해 많은 이들을 죽이고, 과거까지 속이며 날 기만하려 한 게 사실이더냐?”

“그러니까 그건…….”

이미 모든 사실을 아는 것 같은 카르티스의 모습에, 안젤리나의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거짓말에 능숙한 그녀라 할지라도 황제의 앞에서 갑자기 모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쉽진 않았다.

“……잠깐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전부 저를 밀어내려는 자들이 지어낸 모함입니다.”

“당장 방 안을 샅샅이 확인하거라.”

카르티스의 명령에, 그를 따라온 호위 기사들이 서둘러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라도 증거를 찾아내려는 움직임이었다.

“……폐하.”

안젤리나가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잠깐의 수색 끝에 한 기사가 작은 쪽지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서랍 안쪽에 있었습니다.”

그건 로레인이 안젤리나에게 보냈던 것들이었다.

흑마법의 대가로 당장 돈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안젤리나는 자신이 쪽지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진작 그 증거들을 없애지 않은 자신을 원망할 뿐이었다.

“이건 뭐라고 변명할 것이냐?”

그 말과 동시에 카르티스가 로레인에게서 건네받은 편지들마저 안젤리나 쪽을 향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들을 바라보던 안젤리나의 표정이 사색이 됐다.

“저, 저는 정말 모르는 일들입니다.”

거짓말밖에 할 수 없는 안젤리나가 다급히 변명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녀를 믿고 싶던 카르티스의 마지막 희망마저 이미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아닐 거라 믿었는데 모두 사실인 것 같군……. 안젤리나, 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아니에요, 폐하. 저는 그저 아이를 잃은 슬픔에 잠시 정신을 놓았던 것뿐입니다.”

“그 입 다물거라.”

“폐, 폐하.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민 건가요? 저를 모함하려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설마 에이니인가요?”

안젤리나는 카르티스에게 매달리면서도 에이니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이번 일을 에이니에게 다 뒤집어씌워서 그녀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뒤늦게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는 전부터 이유 없이 저를 미워했습니다.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다닐 만큼이요.”

“안젤리나…….”

“제가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저를 모함할 거짓 증거를 만들어 낸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믿어주기엔 증인도 증거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카르티스는 이미 안젤리나보단 에이니를 신뢰하고 있는 상태였다.

“네 잘못을 진심으로 빌고 용서를 구한다면, 마지막으로 널 이해해줄 의향도 있었다.”

“…….”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구나.”

“폐,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장 이 자를 지하 감옥에 가두거라!”

카르티스의 명령에 순식간에 황실 호위 기사 무리가 안젤리나를 에워쌌다.

“폐하!”

“누구보다 널 믿었던 내게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하다니……. 안젤리나 너의 죄에 대한 값을 전부 치르게 될 것이다.”

카르티스의 단호한 말투에 안젤리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눈망울로 그를 바라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를 둘러싼 호위 기사들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안젤리나를 포박했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폐하.”

“그렇다면 그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당분간 조용히 감옥에 있거라. 네 죄에 대한 처벌은 곧 내려질 것이다.”

카르티스가 그대로 휙 돌아서 나가버렸고, 안젤리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변 호위 기사들이 그녀를 더 옥죄어 올 뿐이었다.

“이거 놓거라! 내가 누군지 알고 지금 이렇게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안젤리나가 근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카르티스가 내린 명령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그 순간, 감옥으로 끌려가는 안젤리나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회랑을 따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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