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악행의 증거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 거죠?”
플로리아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폐하의 마지막 임종만 지키고 바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왜 여기로 온 거냐고 묻잖아요.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플로리아 황후 폐하께서 이곳 타레트 제국에 계시니까요.”
“……네?”
“그게 지금 제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제리헤이드의 대답이 플로리아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제 말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황후 폐하가 너무 그리웠습니다.”
“…….”
주저 없이 계속 이어지는 대답에 플로리아의 동공이 커졌다.
“어쩌면 저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
“저 역시도 처음부터 진실을 밝히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럽기에 그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
“…….”
“그렇지만 부디 황후 폐하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그뿐입니다.”
“…….”
“만일 황후 폐하께서 원치 않는다고 하시면, 카르티스 황제 폐하에 대한 제 개인적인 복수는 하지 않겠습니다.”
플로리아는 전과 다르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꺼내놓는 제리헤이드의 두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불안함을 안고 있었다.
문득 그 모습이, 지난 며칠간 플로리아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이 혹여나 거절의 말을 꺼낼까 봐 불안한 그 모습.
“그런데도 여전히 내 곁에 있고 싶다는 건가요?”
“네.”
“만일 내가 거절한다면요?”
플로리아의 담담한 질문에 제리헤이드가 멈칫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타레트 제국에 머물겠습니다. 황후 폐하를 돕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
“지금 이렇게 황후 폐하의 정부로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만, 만약 그마저도 싫다고 하신다면 그땐…….”
그가 하던 말을 멈췄다. 플로리아가 아무리 밀어내도 절대 밀리지 않을 거라는 듯이.
어떻게든 곁에 머물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대체 왜, 왜 그러는 거죠? 무슨 이유로 내게 이러는 건가요?”
“두 제국 간의 관계를 떠나서, 황후 폐하를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잠깐.”
플로리아가 놀란 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 사랑합니다. 제가 황후 폐하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
“때늦은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 애초에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단순히 루이스 황제 폐하와의 약속 때문이 아닙니다.”
“…….”
“황후 폐하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서 제 형님과 그런 약속까지 한 것입니다.”
당황한 플로리아가 뭐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쉽사리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의 고백이 싫진 않았다.
오히려 자존심을 모두 내버리고 이렇게 자신을 붙잡아주는 제리헤이드가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들을 꺼낸 그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내치지만 말아주세요.”
“제리헤이드…….”
그때, 플로리아가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그녀의 말투는 담백하면서도 애정이 묻어났다.
“……네?”
“그대가 그동안 많이 고민했단 건 알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플로리아가 그에게 다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그러자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숨 막힐 듯 가까워졌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목적으로 내게 접근했든 이제 상관없을 정도로 나도 그대를 좋아하고 있어요. ”
“……황후 폐하.”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어요. 어쩌면 처음부터였을 수도 있겠죠.”
“…….”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나도 그대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의 품에 안겼다.
처음엔 놀라서 멈춰있던 제리헤이드도 이내 그에 응하듯 플로리아를 더 꽉 안았다.
마치 이대로 놓치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하지만 그 순간, 플로리아는 그토록 바라던 그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기쁘거나 행복한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 없었다.
잠시 꿈속에서 그를 만난 것 같았다. 눈을 뜨면 현실로 돌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품으로 더욱더 깊게 파고들었지만, 기쁨보단 불안함이 너무 컸다.
“이제 다시는 황후 폐하를 마음 아프게 하지 않을게요. 약속드리겠습니다.”
“난 그냥 당신이 지금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목이 멘 듯, 플로리아가 잠시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 기분에, 제리헤이드에게 서둘러 물었다.
“그런데 정말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온 건가요?”
“네. 신시아 황후 폐하께서 그러길 원하셨거든요.”
“……네?”
“저는 이제 타레트 제국 사람이니, 장례식엔 한 달 후에 찾아오는 게 맞다고 하셨어요.”
“그건 그렇지만…….”
플로리아가 걱정스럽게 그를 올려다봤다.
혹여나 신시아 황후가 황권 다툼에 위협이 될 제리헤이드를 밀어내려는 건 아닌가 싶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누구보다 사랑을 중시하는 분입니다. 제가 플로리아 황후 폐하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내리신 결정일 거예요.”
“아.”
“정말 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그때 꼭 연락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에리튼 제국의 황후는 아주 좋은 분이군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도 차분한 신시아의 이야기를 듣자, 플로리아는 제 자리에서 버티기만 급급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지금과 하나부터 열까지 전혀 달랐다.
황후라는 자리가 버거웠고, 카르티스와 함께하는 생활은 불행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황후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제리헤이드를 정부로 들일 수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였다.
“제겐 플로리아 황후 폐하만큼 좋은 분은 없는걸요.”
“너무 사심이 들어간 거 아닌가요?”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아!”
제리헤이드는 뭔가 생각난 듯, 그때까지도 품에 안고 있던 플로리아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왜 그러죠?”
“제가 황후 폐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네? 갑자기 선물이라니…….”
“혹시 몰라서 준비한 선물인데 다행히 드릴 수 있겠네요.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
“제가 준비한 선물은 바로, 오늘 당장 카르티스 황제 폐하께 안젤리나 페일에 관한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계획입니다.”
“설마…….”
플로리아가 갑작스레 찾아온 결전의 날 소식에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많은 준비를 하던 중이었지만, 이번 계획만큼은 제리헤이드가 있어야 완벽한 마무리가 가능했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 크던 그녀였다.
“막상 때가 되었다고 하니 긴장이 되네요.”
“이제 제가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황후 폐하는 오늘 제 곁에서 한 명의 증인이 되어주시면 됩니다.”
“증인이요?”
제리헤이드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함께 플로리아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긴장한 그녀가 따라간 곳은 카르티스의 집무실이었다.
***
“에리튼 제국에 국상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카르티스는 갑작스럽게 함께 나타난 플로리아와 제리헤이드를 반기지 않았다.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듯, 제리헤이드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카르티스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보고 있던 서류만 훑고 있었다.
“안젤리나 페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그러나 제리헤이드의 입에서 안젤리나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그의 관심을 끈 것 같았다.
카르티스가 움직이던 손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소문으로는 지금 귀족들 사이에 안젤리나 페일과 헬렌 라플레시아의 처벌 요구가 끊이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이건 카르티스를 만나러 오는 길에 플로리아에게서 전해 들은 정보였다.
제리헤이드는 카르티스의 신경을 건드리기 위해 제일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그건 그쪽에서 신경 쓸 일이 아니오.”
“아니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모른 척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카르티스가 귀찮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안 그래도 신경 쓸 일투성이인데, 갑작스레 제리헤이드까지 나서자 더 짜증이 밀려왔다.
“안젤리나 페일이 그동안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지금 악행이라고 했나?”
카르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안젤리나가 제리헤이드를 찾아가서 행패를 부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라 생각했다.
“네.”
“사람이 살다 보면 작은 실수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소?”
“‘작은 실수’요?”
“유산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시오.”
“그럼 유산을 하기 전부터 아무도 몰래 사람들을 죽여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제리헤이드의 의미심장한 말투에, 카르티스가 그를 노려봤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안젤리나는 자신의 측근 하녀인 데이지, 그녀의 남편인 알릭시스, 전 애인인 트리스탄을 죽였습니다. 흑마법으로요.”
카르티스는 제리헤이드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최근엔 그들을 죽일 때 이용했던 흑마법사까지도 죽였죠.”
“…….”
“아! 제일 첫 번째 살인은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거라는 건 아셨습니까?”
“지금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카르티스의 반응을 살피던 플로리아가 나섰다.
“믿으셔야 할 겁니다. 모두 사실이니까요.”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난 두 사람보다 안젤리나에 대한 신뢰가 더 크다는 걸 모르나?”
카르티스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플로리아를 노려봤다.
“확실한 증거라도 있소? 그런 것도 없이 이렇게 무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겠지?”
“물론 있습니다. 증인도 증거도.”
제리헤이드의 대답에 플로리아가 그를 바라봤다.
자신이 증인이 될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 당장 내밀 증거는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집무실 문이 열렸고, 익숙한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레인 패리스?”
그녀는 안젤리나를 버리고 몽수아로 떠났던 로레인이었다.
“이 자가 안젤리나가 그동안 저지른 악행을 증명할 증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