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빈자리
다음 날 아침 신문엔 커다랗게 에리튼 제국의 소식이 실렸다.
한동안 고질병으로 고생하던 루이스 황제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였다.
“…….”
플로리아는 그가 승하하고 난 후, 제리헤이드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걱정됐다.
하지만 더 큰 걱정은 따로 있었다.
[에리튼 제국의 장례 절차상, 앞으로 한 달간은 그 어떤 조의도 받지 않습니다.]
그 문구가 플로리아의 눈에 박혔다.
원래 각각의 제국마다 장례의 과정도 방식도 다른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에리튼 제국은, 황족이 사망했을 경우 독특한 장례 절차를 가졌다.
한 달 동안은 에리튼 제국민들만 장례에 참석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었다.
그 후, 정해진 기간이 지나야 외부인들에게 장례식 초대장을 따로 보내는 곳이었다.
‘그럼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제드를 볼 수 없다는 건가.’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물론 장례와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가서 만날 수도 있을 테지만, 안 그래도 경황이 없을 제리헤이드를 괴롭히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장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과 만나기 싫은 마음이 공존한단 것이었다.
‘만일 그와 마주쳤을 때, 이별을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에리튼 제국까지 찾아가서 그런 말을 듣는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처음부터 타레트 제국으로 다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그런 사람을 찾아가서 붙잡는 상황은 오지 않길 바랐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플로리아의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를 만나고 싶었다.
지금 제리헤이드가 얼마나 슬프고 힘겨울지 걱정됐다.
플로리아는 자신이 부디 한 달이라는 시간을 굳건히 참아낼 수 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
또한 그 끝엔 제리헤이드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길 빌었다.
***
한편, 안젤리나는 이제 슬슬 길고 긴 연기를 끝내려 했다.
궁의의 섬세한 치료 덕분에 정신 건강에 더 이상 문제가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었다.
‘일단 폐하께 찾아가서 직접 상황을 살펴야겠어.’
그래도 아직 안젤리나를 황궁에서 쫓아내진 않은 카르티스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식은 건 아니라 여겼다.
‘아직은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안젤리나는 일단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을 굳힌 그녀가 한시바삐 서둘러 카르티스에게 향하던 길이었다.
“폐하, 오늘 오후엔 제가 바쁜 일이 생겨서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카르티스의 응접실 앞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안젤리나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건, 에이니?’
안젤리나는 급히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겼다.
측근 하녀 한 명조차 없는 상태였기에, 그들의 모습을 목격한 건 안젤리나 혼자였다.
미친 척하던 연기를 들킬까봐 철저하게 호위 기사까지도 떼어놓고 나온 그녀였다.
황궁 안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게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안젤리나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장이라도 저도 모르게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분명 에이니와 카르티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하루 사이에 이렇게 급속도로 가까워졌을 리가 없어…….’
에이니가 그동안 자신을 속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젤리나는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이 유산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던 사이, 에이니가 카르티스에게 흑심을 품은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였을지도 몰랐다.
‘그동안 내 빈자리를 꿰차고 폐하를 꼬셔낸 거야?’
“그러도록 하거라. 그럼 내일 보자꾸나.”
그리고 지금 보니 카르티스도 에이니를 밀어내지 않았다.
목소리는 따뜻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없이 다정하고 살가웠다.
과거 카르티스가 안젤리나를 대하던 바로 그 행동들이었다.
‘말도 안 돼. 두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야?’
안젤리나의 두 다리와 양손이 덜덜 떨렸다.
생각지 못한 배신감에 참지 못할 분노가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에이니의 머리채를 붙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러다 폐하의 마음이 에이니에게 온전히 가버린 거라면 어떡하지? 내 아기는?’
하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에이니가 먼저 황제의 핏줄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엄습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것만은 막아야 해.’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에이니한테만큼은 그 자리를 뺏길 수 없었다.
그동안 그녀가 자신에게 잘해줬던 것들이 모두 가식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이전에 받았던 보석함과 보석들도 지금 당장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고 봐, 에이니.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안젤리나는 에이니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이 너무나도 컸다.
카르티스를 원망하기엔 지금 그녀의 처지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정부로서 그를 탓할 순 없었다.
‘……지금이라도 폐하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어.’
이를 갈던 안젤리나는 복수를 기약하며 조용히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이제 안젤리나에게 남은 건, 조용히 움직일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그 시각. 카르티스와 함께 있던 에이니는 급히 돌아갈 생각이었다.
당분간은 그와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폐하와 함께 밤을 보낼 순 없어.’
그때, 급히 돌아가려던 에이니는 인기척을 느꼈다.
뭔가 소리가 난 것도 아니지만 그냥 우연히 스친 직감이었다.
‘……안젤리나?’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얼핏 그녀의 모습이 스쳤다.
에이니는 놀란 마음에 급히 시선을 옮겼다.
안젤리나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될 것 같았다.
‘분명 정신을 완전히 놓았다는 얘길 들었는데,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생각지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에이니는 지금 카르티스를 마주 보며 억지로 미소를 짓는 중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안젤리나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을 추측하고 있었다.
‘혹시 두 가지 중에 하나이려나?’
첫째는 안젤리나의 정신이 이제야 돌아왔다는 추측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르티스도 못 알아보고 미쳐 날뛴다던 그녀가 이곳까지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별궁에서 본궁까지, 그것도 황제가 있는 곳까지 혼자서 찾아오는 건 제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황궁 안의 구조는 초행자들이 길을 잃을 정도로 꽤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가능성은, 안젤리나가 애초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연기였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자였다.
남들 앞에서 거짓으로 웃고, 거짓을 말하는 걸 즐기던 사람이었다.
지금껏 에이니가 지켜봐 온 안젤리나는 그랬다.
‘물론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만일 후자가 답이라면…….’
안젤리나를 이대로 둬선 안 될지도 몰랐다.
‘나 혼자서 지금 상황을 판단하는 건 무리야.’
에이니가 뭔가를 알아냈다고 해서 중요한 선택권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 당장 카르티스에게 안젤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황후 폐하를 찾아봬야겠어.’
에이니의 결론은 결국 거기에 다다랐다.
서둘러 플로리아를 찾아가서 지금 상황을 의논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그로부터 3일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에이니는 플로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플로리아가 한동안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신가요?”
“오랜만이구나, 에이니.”
플로리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예전의 모습처럼 미소를 건넸다.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제리헤이드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려는 걸 다잡았다.
타레트 제국의 황후로서 모든 걸 내던지고 당장 그에게 달려갈 순 없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모든 일들을 내려놓고 그의 생각만 할 수도 없었다.
‘……더 강해져야 해.’
어쩌면 이제부터 남은 일들은 그녀 혼자서 처리해야 할 수도 있었다.
슬픈 이야기지만, 제리헤이드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언제까지 걱정만 떠안고 있을 순 없었다.
“무슨 일로 내게 찾아온 것이냐?”
플로리아가 먼저 본론을 물었다.
빨리 뭐라도 집중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실은 안젤리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젤리나?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냐?”
“제 생각엔…… 어쩌면 안젤리나가 미친 척 연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플로리아는 자신만이 눈치챘던 사실을 에이니가 이야기하자 놀라웠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설마, 황후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어요?”
“전에 안젤리나를 직접 만나러 갔을 때,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아, 역시. 저도 짐작일 뿐이었는데……. 황후 폐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확실한가 보네요.”
에이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리아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녀의 판단이 분명 옳을 거라 여겼다.
“그럼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가요?”
“아직 고민 중이란다. 어떻게 해야 안젤리나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을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제리헤이드의 빈자리가 크긴 했다.
예전엔 그와 함께 이런 일을 고민하곤 했었다.
심지어 이제 며칠 후면 레너드 경과 헤미쉬와의 정부 계약도 끝나는데, 그때가 되면 제리헤이드의 빈자리도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았다.
“급히 전해드릴 말씀은 다 드렸으니, 그럼 일단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순간, 에이니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로리아와 함께 마시던 차가 절반이나 남아있는 시점이었다.
“혹여나 황후 폐하와 만남을 가지는 걸 다른 이들에게 들킬까 두렵습니다. 당분간은 몸을 좀 사리려 합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거라.”
카르티스나 안젤리나에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을 리 없었다.
“그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황후 폐하.”
“다음에 다시 보자꾸나.”
그렇게 에이니가 급하게 응접실을 빠져나가고, 혼자 남겨진 플로리아는 앞으로 어떻게 이번 일을 처리할지 고민하려던 차였다.
에이니가 앉아있던 자리에 뭔가 작고 반짝이는 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녀가 흘리고 간 브로치 같았다.
“이런, 더 늦어지기 전에 서둘러 전해줘야겠군.”
에르앙 백작 부인이나 에쉬를 불러서 대신 전해줄 겨를도 없었다.
에이니가 별궁으로 서둘러 돌아가버리기 전에, 그냥 문 앞에서 붙잡아 직접 전해줄 생각이었다.
벌컥—.
마음이 급해진 플로리아가 급히 응접실 문을 열고 나가던 그 순간, 그녀는 앞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황후 폐하?”
“다, 당신은…….”
덩달아 놀란 듯 플로리아를 바라보고 서 있는 그는 바로, 제리헤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