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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그리움 (94/106)

94화. 그리움

안젤리나는 플로리아가 나가자마자, 응접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빛이 평소처럼 멀쩡해졌다.

“하아, 이 짓거리를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그녀의 표정엔 짜증이 가득 담겨있었다.

“미친 척하는 것도 이제 지겨워 죽겠어.”

안젤리나는 조금 전 흘렸던 눈물도 대충 손등으로 슥슥 닦아냈다.

별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

얼마 전 제리헤이드를 만나러 본궁 별실에 찾아갔을 때만 해도, 안젤리나의 눈엔 정말로 보이는 게 없었다.

임신 중인 아이를 또다시 잃은 게 너무 큰 충격이었고, 머릿속엔 온통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현실감각이 돌아오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유산한 슬픔에만 취해있기엔 현실에서 받아야 할 처벌이 너무 두려웠다.

“맨정신으로 모든 일을 했다고 하면……. 그때는 정말 폐하께서 나를 버리려 하실지도 몰라.”

결국 안젤리나는 어쩔 수 없이 미친 척을 했다.

유산의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놓은 거라고 핑계를 대려 했다.

곧 정신이 되돌아오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도 세뇌를 시켰고 미친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카르티스를 만났을 때도 그를 못 알아보는 척했다.

혹여나 들킬까봐 조마조마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연기를 유지했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진 당분간 네 방에서 나오지 말거라.”

그 말을 끝으로 카르티스는 더 이상 안젤리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상태를 특별히 걱정하지도 않았다.

분명 미친 척으로 모든 잘못을 덮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안젤리나는 서서히 모든 걸 잃어가는 중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연기하는 중이라는 걸 모르는 측근 하녀들까지도 이미 모두 떠난 후였다.

“어차피 다 필요 없는 인간들이었어. 로레인도 해리스도 무능했잖아.”

안젤리나는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는 걸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만 했다.

“이제 측근 하녀 따위 없어도 돼.”

황궁 안에서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선 그렇게 지금의 상황을 합리화해야만 했다.

“잠깐, 그래도 제리헤이드인지 뭔지 그 사람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진 않은 건가?”

혼자 남겨진 그녀에게 문득 궁금증이 밀려왔다.

근신 처분 상태로 방 안에서만 지내던 안젤리나는, 그가 에리튼 제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왜 아직까지도 이렇게 조용한지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 자가 내 과거에 대한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다면 폐하께서 이렇게 조용하실 리가 없는데…….”

만일 황궁 안에서 마음대로 흑마법을 사용하고 그 대가로 황제의 아이를 잃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이렇게 편안하게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미친 척을 하는 중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게 분명해.”

안젤리나는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눈치챘다.

왜인지 이유는 몰라도 제리헤이드는 진실에 대해 입을 다문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안젤리나에게도 아직 기회가 남아있었다.

‘하늘은 날 버리신 게 아니었어. 어쩌면 내게도 마지막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모든 진실이 알려지기 전에 다시 카르티스의 아이를 가질 수만 있다면…….

희망의 싹이 모두 짓밟혔다고 생각한 순간, 안젤리나의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욕망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

“황후 폐하, 거기서 뭘 하고 계시나요?”

멍하니 별실 쪽을 바라보던 플로리아에게 다가온 건 헤미쉬였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그녀가 민망한 듯 급히 시선을 옮겼다.

“……아, 아무것도 아니다.”

플로리아는 사실 제리헤이드가 떠난 후 비어버린 그의 방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요즘 들어 그녀는 종종 제리헤이드의 방문 앞에 서서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다.

일부러 제리헤이드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를 떠올리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

사실 요즘 부쩍 제리헤이드에 대한 생각이 더 나는 이유가 있긴 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에게선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아직 루이스 황제의 건강에 대한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그건 제리헤이드가 언제 타레트 제국으로 돌아올지 기약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루이스 황제가 빨리 세상을 떠나길 바랄 수도 없었다.

“황후 폐하, 요즘 부쩍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으세요?”

그리고 이건 최근 들어 플로리아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평소처럼 일정들을 수행하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수다를 떨거나 웃기도 했다.

하지만 플로리아를 마주친 모든 이들이 그녀의 상태를 걱정했다.

그동안 다른 걱정이 있을 땐 티나지 않게 잘 감춰오곤 하던 그녀였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카르티스와 사이좋은 척하며 몇 년 동안 제국민들을 속일 때보다도 힘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잘 숨겨지지 않았다.

“마침 잘 되었구나. 시간이 괜찮다면 잠시 나와 함께 걷겠느냐?”

플로리아가 먼저 헤미쉬에게 건넨 제안이었다.

그동안 그와 함께 있으면 고민이나 걱정이 사라지곤 했었기에,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사실 플로리아는 이젠 거의 습관적으로 제리헤이드를 떠올리고 있었다.

일상적인 업무를 볼 때도 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하다 보니, 하루 종일 그에게 시달리는 기분이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중이기에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네, 좋습니다. 지난번에 보니 저쪽에 아름다운 유리 정원이 있던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헤미쉬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플로리아도 동의하자 둘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이 유리 정원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황후 폐하, 이건 제가 황후 폐하를 위해 만든 선물입니다.”

헤미쉬가 품 안에서 작은 귀걸이를 내밀었다.

“처음 만든 거라 솜씨는 부족하지만 마음만 받아주세요.”

“정말 네가 직접 만든 것이냐?”

놀란 표정의 플로리아가 귀걸이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반짝이는 노란색 보석이 박혀있긴 하지만 직접 만든 티가 나는 투박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녀가 평소 착용하던 것들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장신구였다.

“노력은 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해요.”

“고맙구나, 헤미쉬.”

물론 모양이 예쁘진 않지만, 그의 정성을 느낀 플로리아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동안 황후로서 많은 선물을 받아왔지만 이런 선물은 처음이란다.”

플로리아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요즘 황궁 안에서 시간이 많이 생겨서요. 뭘 해드리면 기분이 좀 좋아지실까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네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구나.”

플로리아는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헤미쉬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전엔 분명 그와 함께 있으면 잠시나마 고민이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뭔가 마음 한구석의 공허한 느낌이 채워지질 않았다.

레너드 경과 함께 있어도, 헤미쉬와 함께 있어도 똑같았다.

아무래도 그 원인은 제리헤이드인 것 같았다.

‘……그가 내게 이렇게나 중요한 사람이었던가?’

카르티스와 남남처럼 오래 떨어져 지낼 때도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이런 복잡미묘한 심정을 제리헤이드 때문에 겪고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를 알게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자신이 그동안 제리헤이드에게 정말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제리헤이드가 자신에게 접근한 게 처음부터 다 거짓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을 만큼.

이건 그저 정부에 대한 황후의 마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이대로 제리헤이드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자, 가슴이 아려오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가운데 노란색 보석은 프리지아 꽃을 의미하는 거예요.”

“……프리지아?”

“네. 왜인지 황후 폐하를 보면 그 꽃이 떠올라서요.”

“…….”

헤미쉬의 대답에 플로리아가 또다시 제리헤이드를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 대한 생각이 솟구쳤다.

제리헤이드와 처음 만났던 그 날의 기억이었다.

“혹시 저 프리지아 꽃의 꽃말이 뭔지 아십니까?”

“프리지아의 꽃말은 ‘그대, 한 번만 웃어볼래요?’랍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떠올리자, 아련하게 그리움이 밀려왔다.

“저기 황후 폐하, 혹시 제리헤이드 님 때문에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때, 헤미쉬가 플로리아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물었다.

“…….”

“에리튼 제국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황후 폐하였어도 많이 걱정될 것 같아요.”

그는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최대한 플로리아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급한 일만 마무리되면 서둘러 돌아오실 거예요.”

“…….”

“아마 제리헤이드 님도 지금 황후 폐하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을 테니까요.”

‘……과연 그럴까?’

플로리아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라면 좋을 텐데…….’

자신에게 거짓을 말했던 제리헤이드가 어느새 밉기보단 그리웠다.

그동안 자신을 감쪽같이 속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싶어졌다.

한참을 그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어쩌면 이런 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제드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플로리아가 그럴 수 없는 상황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엔 헤미쉬가 있지만, 그녀의 곁엔 제리헤이드가 너무나도 필요했다.

그러나 상황은 야속하게도 플로리아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에리튼 제국 황실에서 공식 서신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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