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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찰나의 순간 (93/106)

93화. 찰나의 순간

“황후 폐하, 오늘은 아침 만찬이 있는 날입니다. 서두르셔야 해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여유를 부리던 플로리아를 부추겼다.

“이런, 벌써 목요일이군요.”

그러자 멍하니 신문을 응시하던 플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시녀인 에르앙 백작 부인의 말에 따라 일정을 수행하고, 식사 시간이 되면 다이닝룸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모든 일정들을 수행하면서도 어느 것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 만찬 참석자 명단입니다.”

“고마워요, 부인.”

플로리아가 보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명단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아직도 신문 끝자락에 머물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출석자만 확인한 후 곧바로 만찬장으로 가도록 하죠.”

플로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출석명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그녀가 신문에서 찾던 건 에리튼 제국의 소식이었다.

제리헤이드가 떠난 후 그에게선 여태 어떤 연락도 없었다.

루이스 황제의 건강 상태에 대한 기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그건 처음부터 핑계일 뿐이었나.’

알 길이 없는 그의 행방에, 플로리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첫날은 그가 혹시 갑자기라도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자신을 속였던 일에 대해 질타를 한 후,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흘러갈수록 그런 기대 따윈 사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영원히 그와 이별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혼란스러웠다. 플로리아는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제리헤이드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냥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타레트 제국의 황후였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제리헤이드가 없다고 해서 카르티스와 안젤리나에 대한 복수를 접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 이건 처음부터 내 몫이었잖아. 내가 전부 해결하면 돼.’

제리헤이드는 그녀를 돕겠다고 했을 뿐, 애초에 복수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플로리아는 깊은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다잡았다.

“저기, 에르앙 백작 부인.”

“네, 황후 폐하.”

“오늘 아침 만찬이 끝나고 나면 안젤리나를 만나야겠어요.”

더 이상 가만히 제리헤이드를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 할 때였다.

***

같은 날. 정례 회의에 참석하기 전, 모르크 후작은 서류를 훑고 있었다.

“폐하, 오늘 회의에서 헬렌 님과 안젤리나 님에 대한 안건이 또다시 논의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카르티스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벌써 며칠째였다.

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두 정부들이 황궁 안에서 편안히 머무르고 있는 걸 반대하고 있었다.

헬렌은 건강상의 문제로 나오긴 했지만 엄연히 감옥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안젤리나는 제리헤이드의 목숨까지 위협했었던 인물이기에, 이렇게 쉽게 넘어가선 안 된다는 말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귀족들 입장에선 타레트 제국의 체면이 걸린 일이었다.

“후우.”

카르티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젠 그가 막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황제인 카르티스에게도 타레트 제국의 체면이 중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도 마음 같아선 둘 다 궁 밖으로 내쫓고 싶은 심정이긴 했다.

이렇게 머리 아픈 상황이 이어지는 게 괴로웠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황제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질 것 같았다.

황제로서 처음부터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단 걸 인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폐하!”

그때였다. 고민에 빠진 카르티스 뒤에서 에이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요즘 수시로 그를 찾아오고 있었다.

최근 카르티스가 그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회의가 있으시다고 해서 잠시 들렀습니다.”

에이니는 어느새 카르티스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알고 있었다.

전부 그에게서 직접 들은 정보였다.

황제의 공식 일정은 아무나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에이니는 이제 카르티스에게 더 이상 ‘아무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프던 차였는데 마침 잘 왔구나.”

불쑥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티스는 에이니를 반겼다.

“또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옆자리에 앉은 에이니가 다정하게 물었다. 동시에 그를 향한 걱정 어린 눈빛도 건넸다.

“……오늘 있을 회의 안건 때문에 고민을 좀 하던 중이다.”

“설마 헬렌과 안젤리나에 대한 일인가요?”

에이니가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게다가 궁의 말로는 헬렌의 상태가 더 위독하다고 하더군.”

카르티스는 매일 아침 헬렌과 안젤리나의 상태를 보고받고 있었다.

과거 지하 감옥에서 쓰러진 이후로 계속 의식을 차리지 못하던 헬렌은, 최근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상심이 크시겠어요. 이런 시기에 안젤리나라도 어서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말이에요…….”

에이니가 카르티스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안젤리나 얘기를 꺼낸 후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후우, 안젤리나 얘기는 당분간 꺼내지 말거라.”

“……네?”

“차라리 안젤리나가 아닌 에이니 네가 황실의 핏줄을 가졌었더라면…….”

카르티스가 습관처럼 회한의 말을 내뱉었다.

굳이 먼 곳까지 태교 여행을 다녀와서 황제의 아이를 유산한 것도 괘씸했지만, 그는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린 안젤리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리고 그의 말을 듣던 에이니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안젤리나밖에 모르던 카르티스의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면, 이제 충분한 신뢰는 쌓은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에이니 너뿐이다.”

그가 마지막 퍼즐을 맞추듯 그 말을 건넸다.

“오늘 밤 혹시……,”

카르티스가 다음 말을 쉽게 뱉지 못하고 주저하던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 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모르크 후작이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두 명의 정부가 제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에, 카르티스는 자신이 에이니에게만 애정을 쏟는 게 조금은 민망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오늘 밤을 함께 보내자는 말을 쉽사리 하기 어려웠다.

“크흠, 알겠소.”

덕분에 에이니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늘 당장 카르티스가 함께 밤을 보내자고 제안한다면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지금껏 힘겹게 쌓아온 그와의 관계를, 거절의 말로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바쁘실 테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에이니가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르티스가 아쉬운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회의 끝나고 다시 보자꾸나.”

“네, 폐하.”

에이니는 당분간 바쁜 일을 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급히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

아침 만찬이 끝난 후, 예정대로 플로리아는 안젤리나를 찾아갔다.

“당신은 누구야?”

그녀는 역시나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듯 반말을 하고, 플로리아를 노려봤다.

“황후 폐하께 존대하시지요. 이게 무슨 무례한 언행입니까?”

플로리아를 따라갔던 에쉬가 평소와는 다르게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응했다.

그러자 안젤리나가 에쉬를 위아래로 훑었다.

“네가 끼어들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일개 하녀 주제에.”

“지금 뭐라고 하셨……,”

“그만하거라, 에쉬.”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는 순간, 플로리아가 에쉬를 말렸다.

오늘 어차피 안젤리나에게 큰 기대를 하고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녀가 진짜로 정신을 놓은 것인지, 자신의 죄를 뉘우칠 생각은 없는지 확인 차 찾은 것이었다.

“잠시 나가서 기다리거라.”

“……네, 황후 폐하.”

플로리아의 말에 에쉬가 불안한 표정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진 않을지 불안하지만, 플로리아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신 누군데? 대체 여긴 왜 온 거냐고!”

안젤리나는 여전히 플로리아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말투만 보면 그녀는 플로리아를 알아보진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온전히 믿을 순 없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중일 수도 있으니까.

“정말로 안젤리나 네가 흑마법을 사용한 것이냐?”

그래서 플로리아는 일부러 그동안 궁금했던 걸 직접적으로 물었다.

“……뭐?”

“그 대가를 받았다는 건 무슨 말이지? 흑마법의 대가를 얘기하는 것이냐?”

제리헤이드에게 차마 묻지 못한 것들이었다.

플로리아는 이 자리에서 안젤리나가 정말 정신을 놓아버린 건지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동시에 제 궁금증도 해결할 생각이었다.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적 없어!”

“그런 적이 없다?”

“흑마법을 쓴 적도 없고, 그 대가를 받은 적도 없다고!”

“네가 아니라고 우긴다고 해결될 것 같으냐?”

“으악! 조용히 해!”

안젤리나가 분에 찬 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들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

“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그러나 몇 초가 흐르자, 안젤리나는 조금 전에 분개하던 것과는 다르게 순식간에 분노가 사그라든 모습을 보였다.

정말 제대로 미쳐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냥 우리 아기만 있으면 된다니까. 아가야! 아가야!”

그녀는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유산의 아픔이 커서 정말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이대로면 안젤리나에 대한 복수는 더 이상 진행하기 곤란할 것 같은데…….’

몽수아에 갔을 때, 그녀와 제리헤이드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알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리헤이드에게 묻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플로리아가 앞으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 순간이었다.

‘……방금 뭐지?’

플로리아가 잠깐 고민에 빠졌던 때, 안젤리나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순간 입꼬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아주 잠시 스친 미소였다.

그 미소는 분명 전에도 플로리아가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안젤리나 본인 뜻대로 일이 잘 흘러갈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미소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플로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안젤리나는 지금 미친 척 연기를 하는 거라고.

그녀에 대한 연민과 동정 따윈 사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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