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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편지 (92/106)

92화. 편지

안젤리나는 제리헤이드에게 찾아갔던 때 이후로 근신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하고 위험했는지 알기에, 모두들 그 정도는 당연한 처벌이라 여겼다.

적당한 명령이 있을 때까진 자신의 침실 외엔 그 어느 곳도 갈 수 없었고, 몰래 빠져나가다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황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명을 내린 이는 바로 카르티스였다.

자신의 정부를 또다시 감옥에 가두는 일은 벌어지지 않길 바랐기에, 그는 그 정도 선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하려 했다.

“안젤리나는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다고 하나요?”

“예, 황후 폐하. 상태가 나아지진 않은 듯합니다.”

플로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던 에르앙 백작 부인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심각한가 보네요.”

“유난히 하녀들을 못살게 굴어서 매일 같이 우는 하녀들이 속출한다고 합니다.”

그 말에 플로리아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간 해리스의 안위가 위험해질 수도 있겠군요.”

“해리스라면 안젤리나 님의 측근 하녀 말씀이신가요?”

“네. 안젤리나 쪽 사람이긴 하지만, 위험한 상황엔 그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꼭 나서셔야만 할까요? 자칫 폐하께서 위험해지시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묻자, 플로리아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내가 이미 손을 써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손을 써 두시다니요?”

“해리스 데인은 오늘부터 안젤리나가 아닌 에이니의 하녀로 일하게 될 거예요.”

플로리아는 해리스를 어디로 보내야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에이니가 떠올랐었다.

별궁에서 계속 일해 온 해리스이기에, 다른 정부의 하녀로 들어가는 게 어쩌면 최선일 거란 판단이었다.

아예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보다야 새로 일을 배우는 수고도 줄어들 것이고, 에이니 곁으로 옮기면 누구보다도 충성할 아이였다.

이미 에이니 곁엔 베일리라는 든든한 측근 하녀가 있긴 하지만, 한 명 더 늘어난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네? 그런데 에이니 님이 그걸 받아들이실까요?”

“그 부분이 제일 걱정이긴 했는데, 다행히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 지금쯤 에이니는 해리스와 만났을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플로리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에르앙 백작 부인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

같은 시각, 플로리아의 예상대로 에이니는 해리스와 함께 있었다.

“네가 ‘해리스 데인’인가?”

이전에 에이니에게 찾아왔던 손님은 바로 플로리아가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접근한 후, 해리스를 측근 하녀로 데려갈 생각이 있는지를 물었었다.

만일 에이니가 거부한다면 다른 방법을 궁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이니는 주저 없이 긍정의 답을 내놓았었다.

플로리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빠른 답변이었다.

“……네. 에이니 님.”

해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그녀는 안젤리나의 곁을 떠나게 된 게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그동안 황궁 안에서 에이니를 마주한 적이 별로 없기에 괜스레 두려움이 일었다.

처음 안젤리나와 마주했을 때의 떨림과 비슷했다.

“안젤리나 밑에서 몇 달 일했었다면 새로 인수인계를 할 건 없겠지?”

“네. 별궁 하녀 일은 익숙합니다.”

“그래, 그럼. 혹시 일하면서 모르는 게 있다면, 주저 말고 베일리에게 물어보도록 하거라.”

“감사합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에이니가 긴장한 모습의 해리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사실 플로리아의 부탁으로만 그녀를 거둬들인 것이었기에 약간의 걱정은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순수한 모습을 보니, 앞으로 곁에 데리고 있어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아, 그럼 혹시 로레인 패리스는 어떻게 됐는지 아느냐?”

“……로레인이요?”

“지난번 태교 여행 이후로 안젤리나에게 버려졌다는 소문이 황궁 안에 파다하던데…….”

“아, 다시 황궁에 돌아왔었습니다.”

“황궁엘 돌아왔었다고?”

에이니는 처음 듣는 소식에 놀란 듯, 긴장된 표정으로 해리스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몽수아 영지로 되돌아간다고 했습니다.”

“힘들게 다시 돌아와 놓고 그렇게 쉽게 황궁을 떠났다고?”

“……안젤리나 님 곁에 더는 있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에이니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잘 지내는 척하던 안젤리나와 로레인의 가식적인 우정이 가소로웠다.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쉽게 서로를 배신할 줄이야.

“그럼 지금 안젤리나 곁엔 측근 하녀가 없는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앞으론 아마 아무도 일하려 하지 않을 거예요.”

대답하던 해리스가 몸서리를 쳤다.

그동안 안젤리나 곁에 있는 게 늘 힘들었지만, 최근 며칠 동안은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침실 안의 모든 물건은 집어 던지기 일쑤였고, 소리를 지르거나 하녀와 호위 기사의 목을 조르려 달려드는 일도 허다했다.

“진심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에이니 님 밑에서 일하게 돼서 정말 기뻐요.”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 잘 지내보자, 해리스.”

해리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해리스의 모습을 보자, 에이니는 계획의 끝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플로리아도 그런 생각이 있었으니 해리스를 서둘러 자신에게 보낸 게 틀림없었다.

물론 에이니도 슬슬 마지막 복수를 준비하고 있던 차였기에 놀랄 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황제 폐하를 만나 봬야겠어.’

에이니가 전과 다르게 결연한 눈빛으로 해리스를 바라봤다.

***

그날 저녁. 플로리아는 레너드 경과의 저녁 식사가 약속되어 있었다.

비록 짧은 기간 계약으로 들인 정부이긴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고마운 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저기, 황후 폐하…….”

레너드 경이 있을 다이닝룸으로 가기 위해, 플로리아가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에쉬가 갑자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일이냐?”

“……정말 죄송해요. 실은 제가 이걸 깜빡했습니다.”

고개를 숙인 에쉬가 작은 종이를 하나 건넸다.

그건 제리헤이드가 전해달라며 남겼던 쪽지였다.

“이게 무엇이냐?”

“오늘 황후 폐하께서 집무실에 계시는 사이, 제리헤이드 님이 이걸 전해달라고 하셨었어요.”

“…….”

“그런데 제가 오후에 황후 폐하의 침실 대청소를 하느라 잊고 있었어요. 이런 중요한 걸 깜빡하다니…….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은 아닐 것이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플로리아가 에쉬에게 쪽지를 건네받곤 그 안의 내용을 서둘러 훑었다.

별 내용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자신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기 어려워서 글로 편지를 남긴 건 아닐까 생각했다.

“…….”

하지만 편지를 확인한 플로리아가 곧바로 다시 접어 손에 꽉 쥐었다.

너무 세게 쥔 탓에 이미 종이는 심하게 구겨져 버렸다.

그녀의 표정은 심하게 굳어 있었고 동시에 손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황후 폐하?”

그런 플로리아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쉬가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자신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닌지 살피는 듯했다.

“이런, 약속에 늦기 전에 서둘러야겠구나.”

그러나 플로리아는 그 외엔 별다른 말 없이, 여전히 쪽지를 손에 쥔 채 그대로 문을 빠져나가 버렸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 표정으로.

***

제리헤이드에게서 받은 편지가 신경 쓰여서인지, 플로리아는 레너드 경과의 대화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했다.

에쉬 앞에선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계속 유지하긴 어려웠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제리헤이드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정리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중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갖고 거리를 두려던 것이었는데…….

그 사이에 제리헤이드는 에리튼 제국으로 떠나버렸다.

‘그가 정말 루이스 황제의 일로만 떠난 걸까?’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스쳤다.

어쩌면 제리헤이드는 자신의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에 도망을 간 걸지도 몰랐다.

그건 마치, 이제 더 이상 플로리아 본인 곁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생각을 하자,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

당분간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고, 많이 실망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별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혼란스러웠다.

“황후 폐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는 플로리아를 바라보던 레너드 경의 물음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오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그의 표정은 짐짓 심각했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 앞에 있는 모든 음식을 바꿀 생각인 듯했다.

“아니에요. 아주 맛있어요.”

“그럼 왜 그러시나요?”

“아무래도 요즘 업무가 많아서 조금 피곤한 듯하네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너무 무리하시지 마십시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플로리아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무리 그가 제일 가까운 정부라 해도, 레너드 경에겐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인지 그 이유는 플로리아도 정확히 몰랐다.

카르티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다른 정부들에게도 제리헤이드의 잘못을 들춰내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더 깊은 대화는 곤란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레너드 경과의 계약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플로리아가 서둘러 대화 주제를 옮겼다.

“예.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내 정부로 지내는 동안 불편한 점은 없나요?”

다행히 레너드 경은 별 의심 없이 새로운 대화에 집중했다.

“불편한 건 없습니다. 오히려 황후 폐하 덕분에 이런 귀한 대접도 받으니까요.”

그가 앞에 놓인 진수성찬을 두 손으로 가리켰다.

플로리아의 바람대로 다행히 대화는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리헤이드에 대한 생각은 잠시도 접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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