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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마지막 인사 (91/106)

91화. 마지막 인사

회의를 하는 내내, 플로리아를 바라보는 카르티스의 표정은 심각했다.

처음엔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플로리아는 곧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그녀를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카르티스의 눈동자는 멍하니 플로리아가 앉은 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회의 내내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던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플로리아가 카르티스에게 가벼운 질문을 건넨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물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처음 보는 멍한 표정이 왜인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 제리헤이드 때문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잠시 비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내 걱정을 할 여유도 있는 것이오?”

평소처럼 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듯, 카르티스는 플로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젤리나와 헬렌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회의가 끝나고 회랑을 따라 걸으며,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안젤리나와 헬렌이요?”

플로리아는 잘 모르는 일인 척 그에게 되물었다.

“헬렌은 아직도 의식 없이 누워있는 상태고, 안젤리나는 하루하루 상태가 나빠지는 중이라고 들었소.”

진심으로 마음이 심란한 듯 그의 눈가엔 전에 없던 그늘이 비쳤다.

“유산으로 인해 몸이 많이 나빠진 건가요?”

“몸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듯하오.”

플로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전 에이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 사실인 것 같았다.

“제정신을 못 차리고 미쳐 날뛰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

카르티스는 많이 지쳐 보였다.

그동안 기세등등하며 쉼 없이 정부를 들이던 그였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자신이 들인 정부들 때문에 이렇게 깊은 고민에 빠질 줄은 아무도 몰랐던 일이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안젤리나를 황궁 밖으로 내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네? 황궁 밖으로요?”

“평화로운 곳에서 바람이라도 좀 쐬고 그러면 나아지지 않겠소?”

“…….”

그의 말투로 보아 이미 안젤리나에 대한 애정이 조금은 식은 것 같았다.

물론 카르티스는 원래부터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마음을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젤리나를 제일 총애하던 그가, 이렇게 미련 없이 그녀를 버리려 하는 건 믿기지 않았다.

“궁의는 뭐라고 하던가요?”

“별다른 치료법은 없는 모양이오.”

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의문스러웠다.

애초에 안젤리나의 치료법 따윈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럼 이만 가 보시오. 나는 처리할 일이 많아서 서둘러 집무실로 가야겠소.”

카르티스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저, 폐하!”

갑작스러운 작별 인사에 플로리아가 그를 급하게 불렀다.

아무래도 카르티스에게 그동안 있었던 안젤리나의 악행에 대해 알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황궁 밖으로 내보내겠다 하는 걸로 보아, 그는 자세한 내막은 전혀 모르는 게 확실했다.

“왜 그러시오?”

“저 그게…….”

“……?”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플로리아는 이내 마음을 바꿨다.

지금 당장 흑마법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게 어쩌면 성급한 일 같았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도 아닐뿐더러 제리헤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꺼내고 싶진 않았다.

“다음에 뵙지요.”

결국 플로리아도 그를 따라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더 깊은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을 듯했다.

물론 플로리아에게도 안젤리나와 헬렌이 그렇게 된 건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카르티스와 이렇게 차분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 참!”

그때, 황궁의 동쪽으로 몸을 돌리던 카르티스가 멈춰 섰다.

“가기 전에 한마디만 하지.”

“말씀하시지요.”

“황후도 앞으로 정부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뭐든 조심하시오.”

“네?”

“황제로서 정부를 많이 들이는 일이 이렇게 독이 될 줄은 나도 미처 몰랐었으니 말이오.”

“…….”

“만일 내가 안젤리나를 정부로 들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머리 아픈 일이 생기진 않았겠지.”

그 말을 끝으로 카르티스는 멀리 사라졌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플로리아는 그가 한 이야기를 다시 되뇌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그 스스로 그동안 여러 사람에게 얼마나 매정하게 굴고, 외롭게 만들었는지 깨닫길 바랐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었는지 알길 바랐다.

결국 깨닫긴 했지만 이걸로 끝은 아니었다.

헬렌과 안젤리나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을 받았지만, 카르티스는 아직이었다.

‘부디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길 바랄 뿐입니다.’

플로리아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

한편, 그 시각 에이니는 혼자서 분주했다.

그녀는 수많은 드레스들 사이에서 오늘 입을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하녀의 안목에만 모든 걸 맡겨두기엔 불안했기에 어울리는 장신구도 직접 골랐다.

그 이유는 한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지금은 그녀가 카르티스의 옆자리를 파고들 절호의 기회였다.

기다리던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한번 뿐이기에 그만큼 긴장감도 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에이니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엔 분명 안젤리나와 헬렌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는 게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카르티스의 곁에 남은 정부는 에이니가 전부였다.

그동안 황궁 안에서 누구보다 존재감이 없던 그녀가 가장 빛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일 적당한 시기가 있을 텐데…….’

에이니는 이왕 복수를 하는 거라면 가장 적절한 때에 하고 싶었다.

본인이 과거 가장 사랑하던 사람에게 처참히 버려졌던 것처럼.

그날만큼은 에이니에게 카르티스가 너무도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자신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러기 위해선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에이니는 시선을 돌려 창가 쪽을 바라봤다.

창밖엔 하녀가 물뿌리개를 들고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물이 넘치지 않도록 알맞은 양을 따라주는 모습을 보고 있던 에이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에게도 적당한 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이 부족해도 안 되지만, 과하게 넘쳐도 죽는 게 화초들이었다.

무작정 적당한 때를 기다리기보다는 정확한 판단이 필요할 것 같았다.

‘폐하께서 나를 필요로 하는 날이 온다면, 바로 그날을 복수의 날로 삼겠어.’

에이니가 결연한 의지를 다지며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강렬한 시선을 느낀 하녀가 서둘러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창가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에이니 님?”

“아무것도 아니다.”

에이니는 모른 척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자신이 기다리는 날이 올 때까지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의 목표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저기 에이니 님!”

그때, 에이니의 뒤쪽에서 베일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람이 에이니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

타레트 제국을 떠나야 하는 제리헤이드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하필 시기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에리튼 제국으로 돌아와달라는 서신이 올 정도면, 루이스 황제에게 남은 시간이 거의 없는 듯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짐을 챙기고 있으면서도 온 신경은 플로리아를 향해 있었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바벨 경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주변을 훑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정이기에, 이미 웬만한 짐들을 다 마차로 옮겨 둔 상태였다.

전보다 비어있는 방안을 보자 마음이 공허했다.

“바로 출발할까요?”

“…….”

바벨 경의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곧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서둘러 출발하는 게 맞겠지만, 그래도 플로리아에게 마지막 인사는 건네고 싶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에리튼 제국에 가게 된 이상, 루이스의 장례까지도 책임지고 마무리한 후 오고 싶었다.

신시아 황후와 어린 칸에게만 모든 걸 맡겨두고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기 전에 황후 폐하를 봬야겠어.”

“……만나주실까요?”

이미 제리헤이드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벨 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안 만나주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드려야지.”

하지만 제리헤이드의 생각은 확고했다.

멀리서라도 플로리아를 보고 가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그녀가 있을 집무실로 향했으나, 매정하게 닫힌 문은 열릴 줄 몰랐다.

“황후 폐하께서 지금 업무가 너무 바쁘시다고……. 절대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에쉬의 말에 제리헤이드의 얼굴엔 그늘이 졌다.

“잠깐, 아주 잠시면 된다. 황후 폐하께 다시 얘기 드리거라.”

그가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차분히 얘기했다.

“이미 제리헤이드 님이 오셨다고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대답은 같으셨습니다.”

에쉬도 더는 곤란한 듯, 제리헤이드에게 이만 돌아가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 표정을 읽은 건지 그도 더 이상 매달리진 않았다.

“알겠다. 대신 이걸…… 꼭 황후 폐하께 전해주거라.”

제리헤이드가 작게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플로리아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챙겨온 것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에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쪽지를 품 안에 소중히 넣었다.

“그리고 황후 폐하께 부디 몸 조심히 계시라고 전해주거라.”

“……어디 멀리 가세요?”

“너도 잘 지내거라.”

제리헤이드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후,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발길을 돌렸다.

갈 길이 멀기에 계속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고 있을 순 없었다.

‘황후 폐하, 부디 제가 없는 동안 무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플로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채 급히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제리헤이드를 태운 마차는 서둘러 에리튼 제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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