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반갑지 않은 소식 (2)
“카르티스 황제를 무너뜨리고 에리튼 제국으로 돌아가는 게, 제가 맡은 임무입니다.”
제리헤이드가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그는 플로리아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는 날을 상상하곤 했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모든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런 곳에서 말하게 될 거라곤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전부 진실인가요?”
“네.”
“애초에 그래서 나 대신 몽수아에 가겠다고 한 거예요?”
“네.”
“안젤리나를 통해 황제 폐하의 약점을 캐내려고요?”
“네.”
제리헤이드는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고 마음먹은 만큼, 그녀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려고 처음부터 내 정부가 되겠다고 한 건가요? 경쟁국의 황제를 없애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건네는 플로리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니라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다.”
플로리아가 그의 대답을 천천히 곱씹었다.
분명 원하던 대답이었는데도 마음이 조금도 편하지 않았다.
“제가 정부로 들어온 건, 온전히 저와 황후 폐하만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지금 내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이제 그가 어떤 대답을 하든 더 이상 신뢰를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믿었던 존재이기에, 그가 거짓을 감춰왔다고 생각하자 그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
제리헤이드는 더 이상 변명을 하는 것도 구차하다 여겼다.
그냥 자신이 그동안 플로리아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은 것에 대한 사과를 건넸다.
그게 그녀를 위한 최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게 있었다.
강하게 부인하지 않는 제리헤이드의 모습이, 플로리아를 더욱 마음 아프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만 가보겠어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에게서 마음을 닫아버린 플로리아가 차갑게 돌아서 지체 없이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를 붙잡기 위해 그녀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손을 그대로 떨어뜨릴 수 밖에 없었다.
만일 플로리아가 그 손길마저 뿌리친다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응접실을 빠져나간 플로리아가 향한 곳은 서쪽 정원이었다.
오후에 있을 다음 공식 일정을 수행하기 전에, 잠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하필 카르티스와 함께하는 국정 회의였기에 더 그랬다.
“후우.”
지금부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표정 관리를 해야 하지만, 이곳에서 마저도 온전히 마음을 내려놓긴 어려웠다.
모든 공간들이 제리헤이드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
일부러 떠올린 것도 아닌데,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동쪽 분수 정원에서 마주쳤던 모습이 스쳤다.
제리헤이드의 순수하던 눈동자, 아이처럼 웃어주던 입꼬리, 바람결에 찰랑이던 머릿결까지도 생생했다.
그렇게 맑은 사람이 처음부터 거짓투성이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녀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며 걱정스럽게 달려온 이는 에이니였다.
“오랜만이구나.”
“오늘따라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 건가요?”
“아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플로리아의 그늘 진 얼굴을 에이니가 이리저리 살폈다.
“혹시 무슨 걱정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뭐라도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
에이니의 말에 플로리아가 옅은 미소를 보였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눈치채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플로리아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만일 너무나도 믿고 있던 사람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다면, 어떨 것 같느냐?”
“……네?”
생각보다 무거운 대화 주제에 에이니가 놀란 듯했다.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집중했다.
“만에 하나라도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 제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충격이 아주 크겠지요. 당장 용서하기 어려울 만큼.”
“…….”
“하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있었다면, 이해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에이니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이해를 해준다고?”
“네. 저라면,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한다면 한 번쯤은 받아줄 것 같아요.”
“흐음.”
플로리아가 입 밖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너무 가볍게 대답한 것 같아요.”
“아, 아니다. 네 대답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단다.”
여전히 굳어 있는 플로리아의 모습에, 에이니의 표정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일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면, 제리헤이드를 온전히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는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처음부터 나쁜 의도로 타레트 제국에 접근했을지도 몰랐다.
만일 정말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미리 제게 그 상황을 밝히고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
플로리아도 그 정도는 이해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전부 핑계일 뿐이겠지. 그저 처음부터 날 이용하려 했던 것뿐이야.’
다시 생각해 봐도 그에 대한 배신감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너무 쉽게 그를 믿고 정부로 들이려 한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저기, 황후 폐하. 주제넘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만일 그래도 용서하기 어려우시다면, 그냥 그대로 두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요?”
에이니가 조용하던 순간을 깨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냥 두는 것?”
“네. 당장 굳이 뭘 어떻게 하려 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지금까지 고민한 것들 중, 가장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았다.
감정적으로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지금 순간에 뭔가 판단을 내리려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듯했다.
잠시 시간을 가지면 머릿속이 정리될 줄 알았지만, 그녀에겐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좋겠구나. 도와줘서 고맙다, 에이니.”
“아닙니다. 제 뜻을 이해해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수줍은 듯 웃는 에이니의 모습을 보자, 잠시 카르티스의 모습이 스쳤다.
요즘 그녀가 종종 카르티스와 함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라서 그런 것 같았다.
‘카르티스 폐하께는 이 상황을 들켜선 안 될 텐데…….’
만일 그가 지금 상황을 알게 된다면 대놓고 비웃을 것 같았다.
성급히 정부를 들이던 플로리아를 이미 못마땅해했었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리헤이드를 욕할 터였다.
여전히 배신감은 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욕보이는 건 원치 않았다.
“에이니, 오늘 내가 한 말은 너만 알고 있거라.”
일단 에이니에게도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두었다.
제리헤이드에 대한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 때까진 일단 아무도 모르게 해야 했다.
어쩌면 나중에 뭔가 결정을 내리더라도 진실은 감추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네, 걱정 마세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고맙다.”
“그런데 황후 폐하. 혹시 그 소문은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말이냐?”
“안젤리나가 유산을 한 후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렸다고 합니다.”
“정신을 놓다니? 미치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에이니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 물론 폐하마저도 모르는 사람처럼 군다고 합니다.”
“…….”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자신의 아이를 돌려달라며 종일 울부짖기만 한다고 들었어요.”
플로리아도 정신을 놓은 듯한 안젤리나의 모습을 목격하긴 했었다.
제리헤이드와 함께 있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자신의 욕심에 취해 나쁜 짓을 일삼은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녀가 마냥 불쌍하진 않았다.
“……그렇구나.”
“궁의 말로는 아무래도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어려울 것 같다고 합니다.”
에이니의 말을 전해 들은 플로리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는데, 안젤리나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악행을 일삼았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후 폐하, 다음 일정을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플로리아가 잠시 안젤리나를 떠올리던 순간, 에르앙 백작 부인이 그녀 곁으로 걸어왔다.
“알겠어요, 부인.”
그녀의 말에 플로리아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니,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또 나누자꾸나. 조심히 가거라.”
“네. 황후 폐하.”
그리곤 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사실 에이니가 제리헤이드가 아닌 새로운 대화 주제로 이야기를 옮겨준 게 고마웠으나, 안젤리나에 관한 이야기마저 결국 그를 떠올리게 했다.
지금 당장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플로리아는 서쪽 정원에 에이니를 남겨 둔 채, 서둘러 카르티스가 있을 회의실로 향했다.
***
한편, 그 시각 제리헤이드는 자신의 말들을 후회하고 있었다.
“더 강하게 부인했어야 했을까? 나한테 많이 실망하셨겠지?”
응접실을 빠져나가던 순간 플로리아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가 더 실망하기라도 할까 봐 적극적으로 변명하지 못한 게 마음이 쓰였다.
“더 빨리 진실을 털어놓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모든 말들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안 되겠어. 내가 직접 찾아가 봐야겠군.”
결국 그가 심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플로리아에게 가려던 순간이었다.
“공작님! 공작님!”
바벨 경의 황급한 목소리가 먼저 들린 후, 곧바로 그가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습관적으로 그가 제리헤이드를 ‘공작님’이라 부른다는 건, 뭔가 아주 급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에리튼 제국에서 아주 중요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바벨 경이 건넨 서신은 작게 접혀 있었다. 전서조를 통해 보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붉은색 종이를 쓴 걸로 보아 정말 급한 일인 듯했다.
에리튼 제국 황실에서는 공식적인 소식은 황금색, 아주 급한 일은 붉은색 종이로 보내곤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제리헤이드가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그 내용을 확인했다.
서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에리튼 제국의 루이스 황제가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당장 황궁으로 돌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