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반갑지 않은 소식 (1)
안젤리나에게 버림받은 로레인 패리스가 황궁으로 돌아온 건 꼬박 하루가 더 지난 후였다.
원래도 유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눈엔 전보다 독기가 가득했다.
“같이 몽수아에 가자고 할 때부터 불안했는데……. 감히 날 버리고 떠나?”
로레인은 모두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라 생각했다.
안젤리나가 애초에 자신을 떼어두기 위해 먼 길을 떠난 거라고.
하마터면 그녀가 흑마법사의 손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만, 버려졌다고 그대로 몽수아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쓸데없이 그딴 꽃을 따오라고 할 때부터 의심했어야 하는데…….”
로레인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산에 오르다가 발목에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애초에 안젤리나는 작은 행동 하나까지도 허투루 할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면, 목숨을 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내가 왜 그걸 잊었을까.”
로레인이 뒤늦은 후회에 휩싸인 채,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별궁으로 들어섰다.
이미 황궁에서 일하던 터라 아무도 그녀의 출입을 제재하진 않았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아요?”
유일하게 로레인을 보고 당황한 이는 해리스였다.
평소처럼 안젤리나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놀라며 물었다.
해리스는 안젤리나와 함께 떠났던 로레인이 몽수아에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며, 아무래도 큰일이 있었다는 걸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황궁에 돌아오자, 귀신이라도 본 듯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면 몰라요? 안젤리나 페일이 날 버리고 떠났지 뭐예요! 있었던 일을 전부 말하자면 오늘 밤을 새워도 모자랄 거예요!”
로레인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은 안젤리나의 침실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은 그 문 너머에 있는 안젤리나를 노려보는 것이기도 했다.
“아…….”
해리스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 충분히 흥분한 듯한 로레인에게 뭐라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괜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다.
“……안에 지금 안젤리나 ‘님’ 있죠?”
로레인이 일부러 존칭에 힘을 줘서 발음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이에게 존대를 하는 게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그 단어를 뱉어낸다는 뉘앙스였다.
“계시긴 한데……. 지금 상황이 좀…….”
그때, 예상치 못하게 해리스가 말끝을 얼버무렸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로레인이 다시 한번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참고 참던 그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는 중이었다.
“실은…….”
해리스가 적당한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침실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안젤리나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에 놀란 로레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
침실 안에 들어가자, 전과 같은 안젤리나는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도도한 표정을 유지하며 온갖 변명을 늘어놓을 거라 생각했으나, 로레인의 예상은 빗나갔다.
“내 아기……. 내 아기를 돌려달란 말야!”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안젤리나는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머리와 옷차림새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언니가 그런 거예요?”
안젤리나가 문 앞에서 상황을 파악 중인 로레인을 노려봤다.
“언니가 날 이렇게 만든 거냐고!”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난 후, 순식간에 로레인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두 손을 들어 그녀의 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켁켁.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그 이유를 몰라서 물어요?”
로레인은 필사적으로 안젤리나의 두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건지 안젤리나의 손아귀 힘은 무척이나 강했다. 평소랑은 다른 느낌이었다.
로레인이 안젤리나를 피해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그리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자, 이번엔 안젤리나가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으흑흑.”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놀란 로레인이 주저앉은 그녀의 모습을 조심스레 살폈다.
자세히 보니 입술도 여기저기 터지고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흐느끼는 안젤리나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는 것처럼 흐리멍텅했다.
그저 먼 허공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안젤리나?”
로레인은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도 잊은 채, 조심스럽게 안젤리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아냐. 로레인 언니가 아니야.”
“……?”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어.”
힘없이 주저앉아 울기만 하던 안젤리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모습에 놀란 로레인이 또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래. 지금 당장 그자를 만나러 가야겠어.”
옆에 로레인이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듯, 안젤리나는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급하게 침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안젤리나!”
로레인의 부름에도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로레인은 지금 상황이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아무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혹시 날 일부러 버리고 간 게 아니었나?”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며칠 사이 안젤리나는 완전히 미쳐버린 듯했다.
그동안 그렇게 사람의 목숨을 쉽게 빼앗으면서 제정신으로 버티는 그녀가 대단하게 보였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척해도 안젤리나도 결국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서야 정신 완전히 놓아버린 거야?”
조금 전 안젤리나에게 붙잡혔던 목이 아직도 얼얼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녀가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여자야.”
지금 안젤리나에게 정작 화를 내야 하는 건 로레인 자신이었지만, 안전을 위해선 당분간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로레인은 일단 한발 물러나기 위해 조용히 그 침실을 빠져나갔다.
***
안젤리나가 로레인을 내버려 두고 향한 곳은 제리헤이드의 응접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흐트러진 머리에 잠옷 차림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여긴 무슨 일이죠?”
제리헤이드가 의문스럽게 바라보자, 안젤리나가 거침없이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당신 때문에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요?”
그녀가 쏘아붙이자 순간 제리헤이드는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 생각했다.
며칠 전, 흑마법사의 자택에서 마주쳤던 안젤리나의 눈빛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촛대를 휘두르려는 순간, 제리헤이드도 동시에 어둠 속에서 달려 나갔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안젤리나의 손을 막기엔 부족했다.
결국 눈앞에서 흑마법사는 쓰러졌고, 제리헤이드와 마주친 안젤리나는 급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런 행동은 무례하군요.”
제리헤이드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풉.”
그러자 점잖게 대꾸하는 그를 향해 안젤리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무례하다고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날 그렇게 초조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라고!”
안젤리나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에겐 모든 걸 탓할 존재가 필요했고, 그 상대는 바로 제리헤이드였다.
애초에 자신이 흑마법을 쓴 게 문제가 아니라, 그의 호위 기사가 자신을 미행한 게 제 불행을 유발했다고 믿었다.
그때 미행이 붙지만 않았더라면…….
몽수아에 급하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흑마법사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모든 게 달라졌으리란 근거 없는 미련이 맴돌았다.
“내가 유산한 건 전부 당신 때문이란 말야!”
안젤리나가 유산했다는 말을 듣던 제리헤이드가 잠시 움찔했다.
그건 그에게도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본인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는 게 습관입니까?”
“뭐라고요?”
“어릴 때 남몰래 아버지를 죽이고, 황궁에선 죄 없는 하녀와 그녀의 남편도 죽이고, 심지어 당신의 전 애인까지 죽였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제리헤이드의 말에 안젤리나가 어깨를 떨었다.
“대체 또 누굴 탓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본인이 한 행동의 대가로 그 벌을 받은 거잖아요.”
“……설마 당신이었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
안젤리나가 전부 다 알고 왔을 거라 생각한 건 제리헤이드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알게 된 진실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대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그 인간들은 죽을 짓을 했으니까 그렇게 된 거야!”
“어떤 일이 원인이 되었든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란 걸 모릅니까?”
그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지금도 안젤리나의 동공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손바닥엔 땀이 맺히고 있었지만, 제리헤이드는 그럴수록 더 태연한 척을 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 정의로운 척하지 말라고! 어차피 그쪽도 플로리아 황후를 위해서만 행동한 건 아닐 거 아냐?”
“……!”
안젤리나가 정곡을 찌르자, 제리헤이드가 순간 숨을 멈췄다.
별 의미 없이 던진 말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을 찔리기라도 한 듯 받아치지 못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흑마법사가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뭔가 따로 꿍꿍이가 있으니 날 미행하면서 맴돌았던 거 아냐!”
“그런 거 아닙니다. 말조심해요.”
“아니면? 온전히 사랑을 위해 몽수아까지 갔었다는 건가?”
이번에도 제리헤이드는 침묵했다.
물론 그냥 아니라고 하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차마 거짓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가 온전히 플로리아를 위해서 몽수아에 간 게 아니라는 건, 아쉽게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당신도 죽어!”
그 순간, 안젤리나가 방심한 제리헤이드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안젤리나 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때마침 마침 바벨 경이 응접실로 뛰어 들어왔다.
안젤리나가 제리헤이드를 만나러 왔을 때부터 불안하던 찰나, 큰 소리가 나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난 괜찮아.”
그는 제리헤이드의 안위를 먼저 살핀 후, 다른 호위 기사들과 함께 안젤리나를 끌고 나갔다.
“함께 가시죠.”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끌려가는 안젤리나가 울부짖는 소리가 회랑을 따라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진 제리헤이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던 순간이었다.
“……화, 황후 폐하?”
“제드.”
열린 응접실 문 사이로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엔 플로리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표정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마치 안젤리나와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저기 황후 폐하…….”
“내가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부디 솔직하게 답해줘요.”
“……네?”
“혹시 내게 숨기는 게 있나요?”
플로리아의 목소리는 표정과 다르게 담담했다.
제리헤이드는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