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유산의 징조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은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마차에 오른 누구도 묻지 않았다. 로레인이 왜 황궁에 함께 돌아가지 않는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레인과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안젤리나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굳어있었고, 그만큼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안젤리나는 벌써 몇 시간째, 마차 안에서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 웅크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홀로 남은 마차 안에서 계속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로레인 언니가 사라져 버렸어.”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서 흑마법사에게 촛대를 휘두른 날, 그게 바로 어제였다.
그 자리에서 노인은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안젤리나는 상황을 수습할 겨를도 없이 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자리에 누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인지 제대로 얼굴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분명히 인기척을 느꼈다.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초조해진 안젤리나는 밤늦은 시각 마차를 출발시켰다.
물론 아직 로레인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기다리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윽…….”
그때, 황궁을 향해 한참을 달리던 중 갑자기 복통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안젤리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 순간, 안젤리나는 흑마법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마다 흑마법의 대가는 다 다르게 찾아오곤 하지요.”
“안젤리나 님은 그중에서도 자신이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게 되는 운명입니다.”
혹시라도 이게 유산의 징조는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일자,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안젤리나가 소리쳤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도 몸을 더 웅크렸다.
그러자 다행히도 통증은 금세 사라졌다. 어쩌면 너무 긴장한 상태라 잠시 생긴 일시적인 증상인 듯했다.
“후우.”
사실 어제 흑마법사에겐 큰소리쳤지만, 그녀는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이제 로레인을 죽이는 일 따위가 급한 게 아니었다.
어서 몽수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저주받은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정말 지긋지긋해.”
그녀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안젤리나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건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행동이 아닌, 그저 지금 상황을 원망할 뿐이었다.
* * *
며칠 후. 플로리아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황궁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실 이번 일정은 그녀 개인적으론 큰 소득이 없는 여행이었다.
예정대로 제리헤이드를 만나지도 못했고, 안젤리나에 대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심란한 여행을 마치고 며칠 만에 다시 돌아왔는데, 별일은 없었던 듯 황궁 안은 고요했다.
“황후 폐하, 돌아오셨습니까?”
지친 몸을 이끌고 응접실로 들어온 그녀를 제일 먼저 반긴 건 예상외로 헤미쉬였다.
플로리아는 황궁에 오면 제리헤이드를 먼저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오랜만이구나, 헤미쉬.”
그녀가 기쁜 마음으로 그를 반겼다.
마음 편할 일이 도통 없는 황궁 안에서, 헤미쉬와 함께 있는 시간엔 머리 아플 일이 없었다.
어쩌면 오늘 그를 제일 먼저 만난 게 플로리아에게 심리적으로 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정부로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도, 헤미쉬는 황후의 작은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리헤이드가 심리적으로 든든한 역할을 하고 레너드 경이 곁에서 듬직하게 자리를 지켜준다면, 헤미쉬는 모든 걸 내려놓고 잠시 숨 쉴 여유를 주는 사람이었다.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혹시 잠깐 시간 있으실까요?”
물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헤미쉬의 표정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녀가 피곤함에 지쳐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플로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럼 나와 함께 식사하겠느냐?”
“정말이요? 그래도 될까요?”
커다란 눈동자를 빛내는 모습에, 플로리아가 그를 서쪽 다이닝룸으로 이끌었다.
“……황제 폐하께서?”
마주 앉은 헤미쉬의 말에 플로리아가 의외라는 듯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 유리온실에서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는 자신이 목격했던 카르티스와 에이니의 밀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 일을 플로리아가 알게 되면 속상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진실을 알려주는 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흠, 그렇군.”
하지만 플로리아는 별로 충격은 받지 않은 듯 다시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토마토를 작게 조각내 입에 쏙 넣었다. 입가엔 어쩐지 가벼운 미소도 머금고 있었다.
“황후 폐하, 괜찮으신가요?”
헤미쉬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자, 이번엔 플로리아가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내가 특별히 헤미쉬 너에게만 알려줘도 되겠느냐?”
“네? 어떤 걸 말씀이신가요?”
“그건 애초에 내가 의도한 일이었단다.”
“……?”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갸우뚱했다.
“에이니라는 그 정부에게 명을 내렸었지. 폐하에게 접근해서 친분을 쌓아두라고.”
“……네?”
“내가 없는 사이에도 그 일을 잘해내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
“설마 기대한 대답이 아니라서 실망한 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런데 혹시 왜 그런 명령을 하신 건가요?”
이건 헤미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카르티스와 플로리아는 엄연한 부부였다.
아무리 두 사람이 황제와 황후란 특수한 관계라 해도, 다른 이가 자신의 배우자 옆에 있는 게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어쩌면 플로리아가 슬픔을 감추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네 눈엔 내가 황제 폐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느냐?”
“…….”
그녀의 물음에 헤미쉬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폐하께서 날 사랑하시는 것처럼 보이느냐?”
“죄송하지만, 그렇게 보이진 않습니다.”
플로리아가 시무룩한 그에게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만일 내가 폐하의 사랑을 갈구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세 명의 정부를 들이는 무모한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 말을 듣자, 헤미쉬는 자신의 눈으로 지켜본 것들이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부부관계는 겪어본 적 없기에 더 어려운 것 같았다.
“날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분명 플로리아는 지금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표정만 봐도 그랬다.
“……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완벽하게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긴 어려웠지만,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내 걱정을 해주니 고맙구나, 헤미쉬.”
“이게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폐하께서 왜 곁에 여러 명의 정부를 두시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구나.”
플로리아가 흐뭇하게 그를 바라봤다.
“……제가 황후 폐하게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아주 큰 도움이 된단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아쉽습니다.”
헤미쉬가 갑자기 기운 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플로리아가 잠시 들고 있던 크리스털 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무엇이 말이냐?”
“황후 폐하와 계약한 기간이 벌써 많이 지났으니까요. 이제 곧 그 시기가 끝난다는 생각을 하면 서운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말거라. 내가 그동안 네게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지…….”
“뭘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황후 폐하 곁에 더 있고 싶을 뿐이에요.”
헤미쉬의 말에 플로리아가 대답 없이 미소만 유지했다.
처음부터 그를 곁에 오래 붙잡아 둘 생각은 없었다.
카르티스와 안젤리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여러 명의 정부를 들이긴 했지만, 누구도 그 복수에 깊게 끌어들이고 싶진 않았다.
헤미쉬와 레너드 경은, 순수하게 이용만 하기엔 너무 착한 이들이었다.
두 사람에게 위험하거나 어려운 일을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
“이제 그럼 음식이 식기 전에 식사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느냐?”
“……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헤미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지금이라도 플로리아가 먼저 계약 연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주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묵묵히 앞에 놓인 음식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그런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던 헤미쉬는 어쩔 수 없이 대화를 끝내야만 했다.
아무래도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다음 날은 유난히도 맑은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화창하면서도 후끈한 열기를 내뿜었다.
날씨에 맞춰 평소보다 가볍게 차려입은 안젤리나는,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부러 본궁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카르티스를 만나러 동쪽 정원에 방문할 생각이었다.
‘몽수아에 로레인 패리스를 두고 온 게 걸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그녀는 당장 오늘이라도 로레인이 다시 황궁에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걸 탓하며 화를 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안젤리나를 제일 불안하게 하는 건, 로레인이 아닌 ‘유산’이라는 두 글자였다.
게다가 흑마법사를 만나러 간 곳에서 마주쳤던 이가 누구인지도 무척 신경 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몽수아에 가지 않았을 텐데…….’
며칠째 같은 후회를 하는 중이었지만 시간을 되돌린 순 없었다.
아무 일 없을 거라며 스스로 되뇌는 말에도 좀처럼 안심이 되지 않았다.
“안젤리나,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긴 그녀가 분수에서 솟구치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던 찰나였다.
언제 온 건지 카르티스가 안젤리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카르티스를 반기기 위해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안젤리나?”
갑자기 안젤리나는 몸에서 온 힘이 빠져버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폐, 폐하…….”
카르티스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보다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호위 기사 등 다른 이들도 모두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더 이상 누구도 안젤리나에게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안젤리나…….”
그녀가 주저앉은 자리 주위로, 붉은 피가 온 바닥을 적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