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흑마법의 대가 (2)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내 고요한 공간엔 늙은 흑마법사의 목소리만 들렸다.
“사람마다 흑마법의 대가는 다 다르게 찾아오곤 하지요.”
“…….”
“누군가는 본인의 목숨을 잃기도 하고, 누군가는 부모나 형제가 대신 벌을 받기도 합니다.”
그의 말을 듣는 안젤리나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흑마법사의 이야기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조금씩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하자 숨까지 가빠오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초조함을 감추는 게 쉽지 않았다.
“안젤리나 님은 그중에서도 자신이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게 되는 운명입니다.”
“……내, 내게 제일 소중한 것?”
그녀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누가 뭐래도 안젤리나에게 제일 소중한 건, 자신이 품고 있는 카르티스의 핏줄이었다.
과거 술집에서 일하던 중 황제의 아이를 품은 덕분에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 아이 덕분에 황제의 정부가 되었고, 지금 품은 쌍둥이들 덕분에 얼마 전의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만일 임신이라는 기회가 없었다면, 그녀는 여전히 술집 작부의 삶을 살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가진 모든 것도 다 처음부터 없는 게 되는 것이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곧 트리스탄이랑 알릭시스를 죽인 대가를 받게 된다면…….”
다음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과거 아버지를 죽이는 흑마법을 쓴 대가로 한 아이를 유산한 거라면, 나머지 두 번의 흑마법을 쓴 대가가 무엇일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말아요!”
“이미 직접 겪으시고도 못 믿으시는 건가요?”
“그냥 우연이었다고요! 첫 아이를 유산한 건 흑마법 때문이 아니야!”
자신의 안위가 걸린 문제에 안젤리나의 목소리는 이미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또다시 아이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함이 커져갔다.
그러자 덩달아 그녀의 손마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지금 당장 흑마법을 써요. 내가 시키는 대로 로레인 패리스를 죽이란 말이야!”
그 말과 동시에 안젤리나가 옷 안쪽에 감춰온 돈뭉치를 던졌다.
몇 년 전 흑마법사를 찾아왔을 때랑은 전혀 다른 액수였다.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위치를 나타내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안젤리나의 손을 떠난 돈들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계속 그러다간 모든 걸 돌이킬 수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돈들을 잠시 쳐다보던 흑마법사가 다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그냥 내 말에 따라 마법만 부리면 되는 거야! 더 이상 토 달지 말라고요!”
안젤리나가 흥분한 듯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빠른 움직임에 밀려난 의자 소리가 공허하게 방안에 울렸다.
“어서 지금 당장 흑마법을 준비해요!”
안젤리나가 다시 한번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는 자신처럼 운이 좋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작은 영지의 술집에서 일하면서도, 이미 정부를 다섯이나 둔 카르티스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황제에게 제일 사랑받는 정부가 되었고 그의 아이까지 품었다.
아마 이대로 무사히 출산만 한다면, 그 아이들이 유일한 황제의 핏줄일 것이었다.
‘……감히 날 막겠다고?’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저 시간뿐이리라.
몇 달의 시간만 흐르고 나면 타레트 제국이 그녀의 손에 들어올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러자 조금 전 들었던 흑마법사의 경고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유산을 핑계 삼아 그녀를 막으려는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쩌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걸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기세에 흑마법사가 한걸음 물러났다.
자신과 크게 관련도 없는 일에 더 이상 엮일 필욘 없었다. 그저 흑마법사로서 정해진 돈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안젤리나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흑마법사가 혹시라도 다른 이의 사주를 받은 거라면……. 오늘 모든 걸 끝내야만 해.’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그를 다시 찾아오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로레인 패리스 말고도 한 사람 더 죽여줘야겠어요.”
“…….”
“이름은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지금 분명 몽수아에 있을 거예요.”
안젤리나가 담담히 그 이름을 내뱉었다.
그녀를 신경 쓰이게 하는 제리헤이드까지 이 자리에서 없앨 수 있다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흑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제리헤이드의 이름을 듣는 순간, 지금 안젤리나를 막지 않는다면 자신도 위험해질 거란 직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마법사로서의 본능이었다.
처음엔 분명 앞으로 닥칠 흑마법의 대가를 모르고 있던 안젤리나를 위한 경고였다.
하지만 이젠 흑마법사 자신의 안전을 위해 그녀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건 곤란……,”
그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거절의 말을 내뱉는 노인을 향해 안젤리나가 촛대를 들이밀었다.
불타오르는 양초가 예리하고 날카로운 금속으로 둘러싸인 모양이었다.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당신도 죽게 될 거야…….”
안젤리나의 경고 섞인 말에 흑마법사의 마른 손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촛대에서 흘러내린 촛농이 로브 위로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같은 순간, 제리헤이드는 안젤리나와 흑마법사의 모든 대화와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숨 막히는 대화를 하면서도 안젤리나는 태연해 보였다.
‘설마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흑마법사가 마법의 대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제리헤이드는 옆에서 듣기만 하는데도 긴장이 됐었다.
하지만 왜인지 안젤리나는 그의 말을 부정하기만 했다.
그래서 처음엔 그녀의 태도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일 수도 있겠지.’
흑마법사의 이야기를 다 인정하고 수용하는 순간, 그녀가 이뤄온 모든 것들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만일 안젤리나가 트리스탄과 알릭시스를 죽인 대가를 아직 치르지 않은 상태라면, 앞으로 두 명의 아이를 더 유산하게 된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렇다는 건 지금 품은 쌍둥이도 곧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흑마법사의 말을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되겠지.’
물론 그녀의 마음에 공감하며 이해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이 모든 게 안젤리나에 대한 뒷조사라는 생각으로 제리헤이드는 더 집중했다.
어쩌면 곧 중요한 순간에 안젤리나에게 달려가야 할 수도 있었다.
“이름은 제리헤이드 아루비스, 지금 분명 몽수아에 있을 거예요.”
잠시 후,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제리헤이드는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당황했다.
분명 안젤리나는 흑마법의 두 번째 목표로 제리헤이드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접근한 적은 없었기에, 이렇게까지 제게 적대감을 갖고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로레인에게 흑마법을 사용한 후 그 증거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대로 있다간 본인의 목숨까지 위험할지도 몰랐다.
한시가 급했다.
결국 안젤리나의 무자비한 행각을 막기 위해, 그가 정적을 깨고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촛대를 들었다. 마치 흑마법사를 당장 죽이기라도 하려는 듯 안젤리나의 행동엔 흔들림이 없었다.
‘…….’
흔들리는 촛대와 촛불이 뒤엉켜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벽면에 비치는 안젤리나의 그림자는 섬뜩했다.
잠시 고민하던 제리헤이드는 두 사람에게 접근하는 대신, 가지고 있던 검을 잡았다.
이대로라면 금방이라도 그 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같은 날 플로리아는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몽수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사실 이곳에 오기만 하면 제리헤이드를 금방 찾아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곳저곳을 찾아봐도 그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황후 폐하, 다시 한번 더 마을을 살펴볼까요?”
크레티안 경이었다. 레너드 경이 플로리아를 호위하는 동안 그가 먼저 주변을 수색하던 중이었다.
“이대로는 큰 소득이 없을 것 같군요.”
플로리아가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애초에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지만, 정작 제리헤이드의 소식조차 알 수 없다고 생각하니 불안함이 스쳤다.
‘……별일은 없겠지?’
평소대로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게 분명했다. 그는 무모한 짓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왜인지 불안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럼 이제 테레아 영지로 출발할까요?”
이번엔 에쉬의 물음이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 몽수아에 있는 게 조금 불안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플로리아의 표정을 보면 분명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서 빨리 테레아로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황후 폐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살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레너드 경이 미련이 남은 듯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뭔가 아쉬워하는 그녀의 표정이 레너드 경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이니 나도 함께하죠. 레너드 경을 따라가겠어요.”
플로리아가 작은 마차에서 내렸다.
“황후 폐하께서 직접요?”
“네.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걸요.”
플로리아가 긴장감을 이겨내려는 듯 싱긋 웃어 보이자, 레너드 경이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의 인사이기도 하지만 그녀를 안전하게 호위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그가 먼저 앞장섰고, 플로리아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같은 시각, 안젤리나와 제리헤이드가 함께 있는 흑마법사의 집에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를 향해 날카로운 촛대를 들이대던 안젤리나가, 결국 노인의 머리를 내려쳤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