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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흑마법의 대가 (1) (86/106)

86화. 흑마법의 대가 (1)

어두컴컴한 내부엔 작은 촛불이 여러 개 켜져 있었다.

다른 빛 따윈 없는 듯 그 불빛들만이 내부를 힘겹게 비추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만으로는 아주 늙은 노인인 듯했다.

“크흠,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안젤리나가 조심스럽게 방 안을 살피며 가운데로 걸어갔다.

몇 걸음 옮기자, 나무 테이블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얼굴에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한 장치 같았다.

“여기 앉으십시오.”

흑마법사가 손을 뻗어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죠.”

아직 흑마법사를 경계하던 안젤리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얼굴을 감추고 있는 노인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의 손등엔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는 깊은 주름이 잔뜩 패여 있었다.

“제게 하실 부탁이라면, 마법에 관한 일이십니까?”

노인의 말투는 점잖고 정중했다.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그가 잔인한 흑마법을 쓰는 이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네, 지금 당장 마법을 부려주세요.”

안젤리나의 말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 있던 양초의 촛농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그렇게 답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지요. 어떤 마법을 원하십니까?”

“흑마법이요. 흑마법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안젤리나의 목소리는 조금씩 격양되고 있었다.

그동안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늘이었다.

하지만 정작 흑마법사와 마주하자 두려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남들은 찾지 않는 아주 위험한 마법을 원하시는군요.”

“……위험할 게 뭐가 있나요? 그냥 간단한 마법일 뿐이죠.”

진심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아주 두려운 마법일지 몰라도, 흑마법은 안젤리나에겐 그냥 다른 마법들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그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고마운 마법이었다.

“흑마법을 사용한 이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십니까?”

“그런 이야기는 그저 흉흉한 소문일 뿐인걸요.”

안젤리나가 말투는 자신에 차 있었다.

지금껏 로레인을 시켜서 흑마법을 여러 번 사용해 왔지만, 본인에게 대가가 따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주 드물게 흑마법을 쓰고도 멀쩡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선, 아무래도 그 행운아가 바로 자신일 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확신에 찬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번엔 흑마법사가 웃음기 띈 말투로 물었다.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어투였다.

“바로 내가 산증인이니까요. 이번이 처음은 아니거든요.”

안젤리나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제 질문은 그만 멈추고 흑마법을 준비해달라는 신호였다.

“흠, 뭔가 크게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군요.”

하지만 흑마법사는 마법을 시전하기는커녕 아주 낮고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약간의 공포심마저 불러올 정도였다.

“……오해라니요?”

“아, 오해가 아니라 착각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쿨럭쿨럭.”

로브를 쓴 노인이 마른기침을 몇 번 뱉어냈다.

“제대로 말해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죠?”

“설마 그동안 흑마법을 쓰면서 단 한 번도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안젤리나 님?”

노인이 갑작스럽게 뱉어낸 이름에, 안젤리나의 등줄기엔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죠?”

그녀가 강한 경계심을 보이며 그를 쳐다봤다.

지금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꺼낸 건지 확인하기 위해선 노인의 눈을 봐야 했다.

하지만 깊고 커다란 후드로 가려진 그의 얼굴이 보일 리는 없었다.

“전에 뵌 적이 있으니까요.”

“나를 본 적이 있다고요……?”

“기억이 나지 않으십니까?”

“…….”

왜인지 노인의 말에 안젤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희미한 촛불 사이로 그녀가 초조한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설마 정말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미 10년은 지난 일인데…….”

힘겹게 그 말을 내뱉는 안젤리나의 목소리는, 목이 메는 듯 떨리고 있었다.

* * *

“제발, 가진 돈을 다 드릴 테니 흑마법을 부려주세요!”

10년 전, 안젤리나 페일은 몽수아의 유일한 흑마법사를 찾아왔었다.

그녀의 손엔 돈이 담긴 작은 자루가 들려 있었다. 비록 남들은 푼돈으로 여길 만큼의 양이었지만.

안젤리나는 어린 시절 가난에서 벗어난 적이 없기에 이마저도 힘겹게 마련한 것이었다.

“……이 정도 돈으론 모자란 거 알아요. 제가 나중에 더 벌면 꼭 갚을 테니, 제발 도와주세요.”

그녀는 간절하게 무릎을 꿇고 매달렸다.

안젤리나의 뺨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흑마법사의 바짓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의지할 곳은 흑마법사뿐이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누굴 그렇게 죽이고 싶은 건가요?”

“…….”

안젤리나를 안쓰럽게 여기던 흑마법사가 물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돈뭉치를 내밀고 있던 안젤리나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결국 손에서 힘이 빠진 그녀가 돈주머니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대답했다.

“……제 아버지요.”

당시 고작 열 살 남짓 된 안젤리나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난보다 그 사실이 더 힘들게 했고, 매일매일 누구보다 자신의 아버지를 없애고 싶었다.

“흑마법은 한번 사용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흑마법사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안젤리나의 마음은 확고했다.

이번 한 번만 흑마법의 힘을 빌린다면 그녀의 삶은 분명 더 나아질 거라 믿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도와드리지요.”

흑마법사가 대답했고, 안젤리나의 입가엔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돈은 일단 이거만 받아두도록 하죠. 나중에 언젠가 갚겠다는 그 말을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절대 잊지 않을게요.”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아, 그날 안젤리나는 처음으로 흑마법을 사용하고 말았다.

* * *

같은 시각. 제리헤이드는 안젤리나 모르게 흑마법사와 그녀의 대화를 엿듣는 중이었다.

흑마법사의 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집안 곳곳에 의문의 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덕에 그동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고객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누군가 들어와 엿듣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단점도 동시에 있는 듯했다.

처음엔 혹여나 미행을 들킬까 봐 걱정했지만, 단단한 벽과 어두컴컴한 내부 덕분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 예상대로 안젤리나는 흑마법을 이용하려 한 거였군.’

그녀의 말을 엿듣던 제리헤이드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드디어 안젤리나의 목적을 확인하긴 했지만 아직은 안심하긴 일렀다.

누구에게 그 마법을 쓰려는 건지 알아내기 전까진 방심할 수 없었다.

제국의 황후에게 그런 짓을 할 리 없지만, 그 상대가 혹여나 플로리아일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이 조금 있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쿨럭쿨럭.”

한참의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안젤리나에게 대답하던 노인이 또다시 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제리헤이드의 귓가에도 깊숙이 박혔다.

몸을 숨기고 있던 제리헤이드가 벽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그를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흑마법사의 존재가 아주 익숙하게 느껴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도, 한 번씩 뱉어내는 기침도.

그의 말투까지도 과거 몽수아에 방문했을 당시 만났던 한 노인을 생각나게 했다.

‘……설마 그때 그 백발의 노인?’

어둠 속이라 자세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왜소한 체형과 마르고 주름진 손은 그때 그 노인이 맞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허무했다.

‘왜 그날 내게 정체를 밝히지 않았었던 거지?’

제리헤이드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을 속이고 대화한 노인이 괘씸했다.

하지만 어쩌면 괜히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흑마법사를 찾아내는 게 어려웠던 거군.’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안젤리나도, 흑마법사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제리헤이드는 전보다 노인의 행동을 더욱 주시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안젤리나가 어린 시절에도 흑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에 놀라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뭐라고? 설마 지금껏 흑마법을 수차례나 사용해 왔다는 건가?’

안젤리나가 어떻게 그동안 황궁 안에서 흑마법을 거리낌 없이 사용해 왔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한번 경험해 봤으니 흑마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제리헤이드는 이번만큼은 그녀가 제멋대로 남들을 죽이는 걸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안젤리나의 악행도 막고, 그녀를 빌미로 카르티스의 약점을 잡는 게 오늘 그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만!”

중요한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제리헤이드가 숨죽이던 그 순간, 갑자기 안젤리나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

안젤리나는 노인에게 대뜸 따져 물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죠?”

“……네?”

“내가 과거에 찾아온 건 기억해서 뭐 하자는 거냐고요! 추억 얘기라도 하자는 거예요? 아님 나와의 친분을 내세우고 싶은 건가?”

그녀의 말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안젤리나는 그동안 일부러 더 철저하게 ‘그날’을 없는 기억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다.

그만큼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이가 반가울 리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흑마법을 사용해서 아버지를 죽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몇 년 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실 때에도 비밀로 했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흑마법사가 그 얘기를 꺼내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흑마법을 사용하다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 섞인 노인의 말이 안젤리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전처럼 돈이 없을까 봐 그래요? 이제 돈은 충분하니까 당장 흑마법을 부려요! 당장!”

그녀는 처음 흑마법을 사용하던 날, 다신 이런 짓을 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벌써 이번이 네 번째였다.

매번 반복될수록 나쁜 짓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고 죄책감도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때 그 흑마법의 대가는 이미 치르셨군요.”

흥분한 안젤리나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노인이 차분하게 그 말을 내뱉었다.

“……네?”

동시에 안젤리나의 흥분도 금세 가라앉았다.

“이미 대가를 치르다니요?”

“최근 유산한 적이 있으신가요?”

“……그걸 어떻게 알죠? 지금 설마 내가 유산한 게 흑마법의 대가라는 건가요?”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젤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럼 첫 번째 흑마법의 대가를 치렀으니 이제 그다음 일만 남았겠군요.”

“마, 말도 안 돼!”

두려움에 휩싸인 그녀는 서둘러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그 순간, 안젤리나의 눈앞엔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해 트리스탄과 알릭시스의 얼굴이 동시에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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