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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다시 돌아온 (85/106)

85화. 다시 돌아온

급하게 뛰어온 탓에 숨소리가 거칠어진 바벨 경이 제리헤이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후우, 미행을 들켰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평소 철두철미하게 움직이는 그였지만, 촉박한 시간에 마음이 급하다 보니 자꾸 실수가 생기는 듯했다.

지금껏 제리헤이드 밑에서 일하는 동안 이런 일이 처음이라, 그도 많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잖아.”

제리헤이드가 괜찮다는 듯 탄탄한 바벨 경의 어깨를 다독였다.

평소에 바벨 경이 제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이였다면 화가 났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제리헤이드에게 있어선 누구보다 듬직하고 믿을만한 호위 기사는 바벨 경뿐이었다.

“그래서 뭐 좀 알아낸 건 있어?”

원래 그들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안젤리나 일행을 뒤쫓고 있었으나, 그들이 갑자기 마차를 멈추는 게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에, 바벨 경이 몰래 그 이유를 캐내기 위해 접근했다가 방금 전 로레인과 마주친 것이었다.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안젤리나 페일의 몸 상태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춘 듯합니다.”

바벨 경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런하던 백금발 머리카락도 그의 움직임을 따라 조금 흔들렸다.

“역시 임신한 몸으로 이 정도 장거리 이동은 무리였으려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도 모르겠다.”

“네.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그럼 저희도……,”

그때였다. 두 사람이 계획을 다시 세우려던 순간, 안젤리나의 일행들이 갑자기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처음부터 테를 영지에 멈출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된 거지?”

“아무래도 저희가 뒤를 밟는 걸 눈치챈 모양입니다.”

“흠, 그럴 확률이 높겠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어떡할까요?”

“아냐. 차라리 잘 됐어.”

“……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하는 게 서로 좋을 테니까. 나에게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고 말이야.”

제리헤이드가 잠시 플로리아와 루이스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빠른 시일 내에 잘 마무리 해야만 했다.

“일단 우리도 얼른 몽수아로 가자. 이동하는 동안 다음 계획을 정리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저들을 놓치기 전에 더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바벨 경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들은 서둘러 타고 온 말 위에 다시 올랐다.

그리곤 안젤리나의 뒤를 밟기 위해 힘껏 고삐를 당겼다.

아마 이대로 멈추지 않고 간다면 하루 안에 드디어 몽수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렇게 황궁에서부터 꼬박 하루를 움직여 몽수아에 당도하자, 안젤리나의 피로가 극심했다.

중간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온 탓에 온몸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피곤함에 배도 저릿저릿하는 느낌이 들자 불안했다.

더 이상 거짓말로 막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또다시 유산을 한다면 그땐 정말 카르티스에게 둘러댈 변명도 없는 상황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안 되겠어요.”

마차가 멈추자마자 안젤리나가 서둘러 내렸다. 더 상태가 나빠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당장 좀 누워야 할 것만 같았다.

“이쪽입니다, 안젤리나 님.”

그때, 로레인이 작은 짐 하나를 챙겨서 안젤리나 앞에 앞장섰다.

안색이 좋지 않은 그녀를 얼른 숙소로 안내할 생각이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안젤리나 님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곳입니다.”

그녀가 다른 몇몇 호위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향한 곳은 근처의 2층 저택이었다.

이곳은 몽수아 영지에서 그나마 제일 상태가 좋은 저택이었다.

물론 황궁에 비하면 아주 작고 초라한 곳이지만, 그래도 며칠 지내기엔 썩 나쁘지 않았다.

과거 안젤리나가 몽수아에 살던 때는 이보다 훨씬 허름한 집에서 살았었다.

그렇기에 약간 낡은 2층 저택에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어휴, 힘들어.”

하녀의 안내에 따라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간 안젤리나는 제일 큰 침대에 누웠다.

입고 온 옷을 갈아입지도 못할 만큼 기운이 없었다.

역시 중간에 피곤함을 느꼈을 때 제대로 쉬지 못한 게 무리가 된 듯했다.

이마를 짚어보자 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빨리 흑마법사를 찾아가야 하는데…….’

급하기만 한 마음과 다르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홀몸인 상태였다면 나중에 탈이 나더라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현재 안젤리나의 몸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곳 몽수아에서 평소 거슬리던 이들을 없애는 게 목표이긴 하지만, 이건 모두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기들을 위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몸이 회복될 때까지 조금만 더 쉬어야겠어.’

무리를 하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지금껏 해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이 커지고 있었지만, 결국 안젤리나는 다음 일정을 하기까지 그로부터 꼬박 하루를 쉬어야만 했다.

***

한편, 플로리아의 일행도 이틀에 걸쳐 테레아 영지를 향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몽수아 영지보다 거리상 더 먼 곳이기에 아직 갈 길이 먼 상태였다.

“잠깐, 멈춰요.”

그들이 몽수아 영지 근처를 지나던 때였다.

플로리아의 말에 모든 일행이 급히 마차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후 폐하?”

놀란 눈으로 마차 문을 연 사람은, 그녀를 따라 온 에르앙 백작 부인이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잠시 쉬어가야겠어요.”

먼 거리를 움직여야 하기에 충분히 쉬엄쉬엄 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몽수아 영지 근처를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신경이 쓰였다.

제리헤이드가 이미 안젤리나의 미행을 끝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잠시라도 들르고 싶었다.

“나는 에쉬와 크레티안 경, 레너드 경만 데리고 움직일 테니, 에르앙 백작 부인은 먼저 다른 일행들과 함께 테레아 영지로 출발하도록 해요.”

“네? 저희만 먼저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난처하다는 듯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나도 반나절 안에 따라갈 생각이에요. 내가 없는 동안 에르앙 백작 부인이 알아서 일행을 잘 통솔할 거라 믿어요.”

“……아, 알겠습니다.”

한껏 부담감을 안은 에르앙 백작 부인이 답했고, 플로리아가 고맙다는 듯 눈을 찡긋해 보였다.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 부디 조심히 오세요.”

시녀로 일한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이미 테를 영지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잠시 황후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남은 이들을 잘 이끌어줄 거라 생각했다.

지금 당장 플로리아가 모든 이들을 다 데리고 몽수아로 향하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럼 어서 출발하도록 해요.”

플로리아는 일단 일행이 타고 온 것 중에 제일 작은 마차로 옮겼다.

그녀가 타고 있던 황후 전용 마차는 지나치게 크고 화려했다.

그런 걸 타고 작은 영지 안을 돌아다닌다면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게 분명했다.

“네, 알겠습니다.”

플로리아는 에르앙 백작 부인과 나머지 일행이 먼저 떠나는 걸 확인했다.

그리곤 남은 이들을 이끌고 서둘러 몽수아로 떠났고, 그렇게 두 일행의 마차가 서로 다른 길로 향했다.

***

같은 시각. 안젤리나는 겨우 몸을 추스른 후 흑마법사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예전에 지내던 곳들을 잠시 돌아보고 올 테니 다들 여기서 기다려요.”

그녀는 철두철미하게 로레인만 데리고 길을 나섰다.

자신이 흑마법을 부려서 로레인을 죽이고 나면, 그 사체를 아무도 못 보게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커멓게 잿더미처럼 변해버린 흔적을 혼자서 처리할 생각도 없었다.

생각만 해도 역겨움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저기 저 산자락 보여요?”

말없이 걸어가던 안젤리나가 몽수아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네? 갑자기 무슨…….”

“언니도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저 위에 올라가면 메시안 꽃이 있을 거예요. 그 꽃을 따서 차로 만들어 마시면 기력회복에 좋다고 들었어요.”

“아, 저도 그 이야긴 들었어요.”

이곳 몽수아에 사는 사람들은 기력이 쇠해진 이가 있으면 바로 이 산꼭대기에 올랐다.

샛노란 메시안 꽃을 따서 먹으면, 기력이 없던 사람도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온 마을에 퍼져있었다.

그 꽃이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보이는 게 아니기에, 안젤리나는 일단 핑계를 대고 로레인을 산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가서 그 꽃을 따오도록 해요.”

“……네? 지금이요? 저 혼자요?”

“내가 어제 하루 종일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있던 거 못 봤어요?”

“…….”

“나라면 시키지 않아도 당장 산에 올라서 그 꽃을 따왔을 거예요.”

차갑게 쏘아대는 말투에 로레인이 아무 답을 하지 못했다.

처음 몽수아로 올 때부터 순탄치 못한 여행이 될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안젤리나가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부려먹으려 할 줄은 몰랐었다.

그동안 황궁 안에서 존댓말까지 해주며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는 듯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말투만 존대를 할 뿐, 평소 해리스에게 하는 것보다도 더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자신의 자리를 깨달은 로레인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자, 안젤리나가 만족의 웃음을 띠었다.

“그럼 난 볼 일이 있어서 근처에 있을 테니 어서 다녀와요.”

“……네.”

그렇게 짧은 대답과 함께 로레인이 메시안 꽃이 있는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등산을 하게 된 만큼 그녀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주 높은 곳은 아니지만, 두툼한 드레스를 입고 불편한 신발을 신은 채 정상까지 다녀오려면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게 뻔했다.

‘……서둘러야겠어.’

덕분에 어느 때보다 시간이 여유로웠지만 안젤리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에게 기회는 오늘 딱 한 번이었다.

이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면, 황족의 핏줄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녀의 정부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이미 흑마법을 사용한 전력이 여러 번 있는 만큼 더 철저히 조심해야 했다.

‘한 번의 실수로도 괜히 꼬리를 밟힐 수도 있어.’

그리고 제리헤이드도 왜인지 그녀를 미행하는 것 같다는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서둘러 모든 짐들을 내려놓고 싶었다.

‘……여기군.’

다행히 다시 돌아온 마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초조하게 주변을 살피던 안젤리나는 조심스럽게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바로 몽수아 영지의 유일한 흑마법사가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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