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염탐
카르티스는 매일 아침 열리는 정례회의에 참석한 후, 본궁 근처에 있는 유리정원으로 향했다.
사실 평소에 그가 유리정원까지 찾아가는 일은 드물었다.
차를 마시게 되거나 잠시 시간 여유가 생길 땐, 거리상 더 가까운 분수 정원을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카르티스가 오늘 굳이 유리정원으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곳은 황궁 내에서도 인적이 드문 편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잠시 여유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방문했다.
유리정원에 다다르자 그가 뒤따르던 일행을 멈춰 세웠다.
“이곳에서부터는 나 혼자 갈 테니 따라오지 말거라.”
“예?”
모르크 후작이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리며 되물었다.
“근처에 호위 기사들만 몇 명 배치해 두고 모르크 후작과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기다리시오.”
“아,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카르티스의 명령에 모르크 후작이 서둘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른 하녀들도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카르티스는 유리정원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그의 명령대로 호위 기사 몇 명만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폐하, 오셨습니까?”
잠시 후, 카르티스가 유리 돔으로 덮인 정원에 들어서자 에이니가 그를 반겼다.
이곳은 사방이 온통 유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유리벽을 따라 우거진 식물들과 화초들 때문에 밖에선 안쪽이 잘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그래서 카르티스는 더욱더 마음 편히 에이니 앞쪽으로 다가갔다.
“일찍 와 있었구나.”
오늘 이 자리는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그가 황제가 된 이후로 오늘만큼 황궁 안이 조용한 적이 없었다.
특히나 안젤리나가 여섯 번째 정부로 들어온 이후론 다른 여자와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폐하를 위해 커피와 케이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에이니가 가운데 놓인 유리 테이블을 가리켰다.
평소 카르티스가 즐겨 마시는 진한 커피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오늘을 기념하기라도 하는 듯 금가루까지 뿌려진 작은 조각케이크가 보였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닙니다. 저를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한걸요.”
에이니가 오늘도 역시 살갑게 웃어 보였다.
사실 그녀는 플로리아를 따라 몽수아에 가지 못한 게 속상했다. 자신의 복수만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플로리아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니마저 오랜 시간 황궁을 비운다면 오히려 카르티스가 수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황궁에 남은 것이었는데, 이렇게 카르티스와의 관계가 진척되는 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좋은 징조였다.
“그런데 왜 여기서 보자고 하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에이니 너와 이렇게 편안히 시간을 보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지.”
맞는 말이었다.
이미 최근에 몇 번 카르티스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플로리아도 안젤리나도 황궁에 없으니 마음 놓거라.”
카르티스는 에이니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한 건지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에이니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가 다정하게 눈을 맞출 때마다, 과거 헬렌 옆에서 쓰러진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기만 하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에이니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였다.
부스럭—.
그때, 유리정원 구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옷과 옷이 부딪히며 들리는 마찰음 같기도 했다.
“누가 있는 건가?”
인기척에 놀란 카르티스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그리곤 키가 큰 화초들 사이로 걸어가려는데, 에이니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괜히 다른 데 신경을 쓰다가 오늘 분위기를 망칠까봐 걱정이 됐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아주 일찍부터 와서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흐음, 그건 그렇지.”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봅니다.”
에이니의 말에 카르티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는 방금 소리가 난 쪽이 그래도 조금 신경 쓰이는지 뒤를 돌아봤으나,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
에이니는 이곳에 두 사람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녀가 유리정원에 들어온 지 적어도 한 시간은 흐른 상태였고, 그 시간 동안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더 식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에이니가 웃으며 잔을 내밀자 카르티스는 기분이 좋은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카르티스와 에이니가 유리정원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던 그 시각.
화초 더미 뒤쪽에 웅크리고 있던 누군가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으으, 참아야 해…….’
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간이라 여겼던 유리정원엔, 사실 헤미쉬 드밀레가 있었다.
헤미쉬는 혼자서 심심하던 차에 아침 일찍부터 황궁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오랜만에 산책을 할 겸 잠시 시간을 낸 것인데, 드넓은 황궁 안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러던 중 유리정원을 우연히 발견했고 내부가 너무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서 구경을 하던 중이었다.
“이곳에 내려놓거라.”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자, 헤미쉬는 본능적으로 화분 뒤에 몸을 숨겼다.
워낙 큰 화분이 많이 놓여있기에 마른 체형의 헤미쉬가 몸을 숨기기엔 충분했다.
“네, 에이니 님.”
“그럼 이것도 여기 둘까요?”
“그래. 고생했다. 다들 이만 가 보거라.”
에이니가 카르티스를 만나기 위해 유리정원에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헤미쉬는 이미 몸을 숨긴 탓에, 이제 와서 그 앞에 나서기 곤란했다.
‘이곳에서 점사 차만 마시는 거라면 조용히 기다려도 되겠지?’
그는 그래봤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에이니는 정원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르티스까지 그 안으로 들어왔다.
예상치 못하게 오랜 시간이 흐르자, 작은 공간에 웅크리고 있던 헤미쉬의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결국 자세를 바꾸기 위해 움직이다가 소리를 냈고, 들킬 뻔했을 땐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런데 그보다 헤미쉬에게 더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황제 폐하께선 정부들을 더 사랑하시는 건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플로리아가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카르티스는 에이니에게 마음이 있는 듯했다.
그런 황제에게 제대로 사랑받지도 못하고, 여러 명의 정부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플로리아를 떠올리자 마음 아팠다.
“더 식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에이니의 말에 카르티스가 소리 내어 웃는 게 들렸고, 그 목소리에 헤미쉬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황제 폐하를 웃게 하는 게 정부라면, 황후 폐하를 웃게 하는 것도 같은 정부일 수 있잖아?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드린다면 좋을 텐데…….’
세 명의 정부 중에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헤미쉬는 몸을 쓰는 일엔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플로리아에게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싶었다.
‘일단 오늘 일은 잘 기억해 두었다가 황후 폐하께서 오시면 바로 알려드려야겠어.’
헤미쉬는 저려오는 다리를 손으로 꾸욱 누르며 참았다.
그는 지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참을 생각이었다.
이런 일이라도 플로리아에게 작은 도움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
한편, 몽수아로 향하던 안젤리나의 일행은 중간에 있는 테를 영지에서 잠시 마차를 멈췄다.
안젤리나가 극심한 피로를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안젤리나 님, 괜찮으세요?”
로레인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어쩌면 이대로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라도 꺼내길 바랐다.
“조금 피곤한 것뿐이니 잠시 쉬어가면 돼요.”
하지만 안젤리나는 단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몽수아에 가겠다는 의지가 불타는 눈빛이었다.
“그럼 편히 쉬어갈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무리하지 않기 위해선 오늘 하루 테를 영지에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장 묵을 숙소도 없는 상태였다.
“몸이 뻐근해서 잠시 내려서 걸어야겠어요.”
몇몇 일행이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흩어졌고, 그 사이 안젤리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지친 몸을 풀어내던 그녀가 로레인을 데리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려던 때였다.
근처에서 누군가 재빠르게 몸을 숨기는 게 보였다.
“……누구지?”
안젤리나의 눈짓에, 로레인이 인기척이 들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방금 전 몸을 숨기던 사람이 서둘러 어딘가로 뛰어가 버렸다.
“앗!”
너무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기에 로레인은 놀라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 사람은…….”
“저 사람이 누구더라?”
로레인과 안젤리나가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
“어제 분명 저를 따라오던 그 사람입니다!”
“네?”
로레인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하자, 안젤리나가 깜짝 놀라며 남자가 사라진 쪽을 다시 살폈다.
“정말 저 사람이 확실해요?”
“네. 확실해요.”
확신에 찬 로레인의 대답에 안젤리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왜 그러십니까?”
“꽤 오래된 일이지만 나도 저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안젤리나가 과거에 마주쳤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녀가 타레트 제국의 황궁 안에서 제리헤이드를 처음 만났던 날. 그의 옆에 있던 남자, 바벨 경이었다.
“저 사람은 분명 아루비스 공, 아니 황후의 세 번째 정부를 따라다니는 남자인데…….”
“정말이십니까?”
로레인도 생각지 못한 남자의 정체에 덩달아 놀란듯했다.
“그 자가 왜 언니의 뒤를 쫓는 거죠?”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
“……설마.”
안젤리나가 말하던 걸 멈추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저 자가 노리는 게 로레인 언니가 아니라 나였던 거 아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 제리헤이드는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먼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던 자신에게 무안을 주던 사람이 아니던가.
‘혹시 황후가 부추긴 거 아닐까?’
황제의 핏줄을 가진 자신을 질투한 플로리아가, 제 정부를 부추겨서 미행을 시킨 게 아닐까 싶었다.
“안젤리나 님, 괜찮으세요?”
창백해진 표정을 바라보던 로레인이 안젤리나의 어깨를 부축하며 물었다.
“다시 마차로 돌아가야겠어요. 서둘러 몽수아로 가죠.”
안젤리나가 손길을 뿌리치며 뒤돌아섰다. 갑자기 어느 때보다 마음이 급해졌다.
물론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의 측근이기에 당연히 안젤리나를 싫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몽수아로 출발하기 전부터 로레인의 뒤를 캐려하고, 오늘은 안젤리나의 일행을 뒤따라오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앞으로 그가 얼마나 큰 위협이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위험한 일이 생기는 거 아냐?’
이제 로레인만 없애면 더 이상 불안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건 새로운 걱정거리였다.
안젤리나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몽수아로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