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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저마다의 이유 (83/106)

83화. 저마다의 이유

“너는 따라오지 말고 황궁에 남아 있어.”

몽수아에 갈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해리스에게, 안젤리나가 단호하게 얘기했다.

“……네? 저만요?”

“그래. 이번 여정은 로레인 언니랑 다녀올 생각이니까. 마차에 자리도 좁을 텐데 굳이 하녀를 두 명이나 데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거든.”

“저는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까요?”

해리스는 기쁨의 환호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침착하게 되물었다.

변덕이 심한 안젤리나의 성격을 알기에, 이러다가 언제 또 말을 바꿀지 몰랐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같은 얘기 두 번 하게 하지 말랬지?”

이번 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남들의 보는 눈을 줄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흑마법사를 찾아가는 일도, 로레인을 죽이려는 일도 아무도 모르게 해야 했다.

그렇기에 다른 모든 하녀들은 다 황궁에 남겨놓을 생각이었다.

현재 황실에서 일하는 측근 하녀만큼 안젤리나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아무리 해리스가 단순하고 둔하다 해도, 그동안 나를 오래 지켜봐 왔잖아?’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느껴도 자신을 의심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해리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젤리나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순 없어도, 황궁에 두고 가려는 걸 보면 당장 해리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대신 다른 짐들을 챙기는 일이라도……,”

“안젤리나 님!”

기분이 좋아진 해리스가 안젤리나를 위해 짐을 정리해 주려는데, 때마침 로레인이 요란스럽게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나 지금 임신 중인 거 몰라요? 놀랐잖아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갑작스러운 호들갑에 안젤리나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그녀는 어차피 로레인과 오래 함께할 생각도 아니었기에, 오늘까지도 굳이 존댓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누군가, 누군가가 제 뒤를 쫓아오는 것 같았어요.”

로레인이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게다가 그녀는 급히 뛰어온 듯 숨도 조금 헐떡이고 있었다.

“황궁 안에서 쫓아오긴 누가 쫓아온다는 거예요?”

“얼굴을 얼핏 보긴 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분명 저한테 무슨 목적이 있는 것 같았어요.”

로레인이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누군가 뒤를 몰래 따라오는 느낌이 들자, 지난번처럼 또 에이니인가 싶어서 돌아봤다.

그런데 낯선 남자가 그녀를 따라오다가 급히 숨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겠죠. 굳이 그럴 리가 있겠어요?”

“네? ‘굳이’라니요?”

“이 드넓은 황궁 안에서 고작 별궁 하녀의 뒤를 누가 쫓겠냐는 말이에요. 그런 거 신경 쓸 여유 없으니 어서 여행에 필요한 짐이나 잘 챙겨요.”

안젤리나가 차갑게 대꾸했다.

예전 같으면 로레인에게 조금 더 살갑게 대해줬겠지만, 결전의 날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는 더 이상 로레인 때문에 곤란해하며 쩔쩔매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 태도를 느낀 건지 로레인도 금세 차분해졌다.

사실 그녀도 안젤리나의 말이 맞다는 생각은 했다.

새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별궁 하녀에게 뭔가를 캐내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착각한 걸 수도 있겠지.’

단순히 그쪽도 황궁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길을 헤매던 것일 수도 있었다.

“저기 해리스, 나 좀 도와줄래요?”

로레인은 일단 그 일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서둘러 남은 짐을 챙기기 위해 해리스를 바라봤다.

안젤리나가 임신 중인 만큼 챙길 짐이 많았다.

혹여나 이번 일정 중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생긴다면, 어떤 생트집을 잡아댈지 눈에 훤했다.

괜히 나중에 귀찮아지기 전에 지금 서두르는 게 나았다.

“네, 알겠어요.”

해리스가 기꺼이 웃으며 돕겠다고 하자, 로레인은 어느새 찜찜한 기분은 털어버리고 그녀와 함께 침실을 빠져나갔다.

***

제리헤이드는 모든 준비를 끝마친 후 플로리아를 찾아갔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할 말이 있었다.

“황후 폐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니요? 뭐든 말 해봐요.”

평소 제리헤이드가 그녀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플로리아가 흔쾌히 대답하자 그가 손을 살며시 맞잡았다.

“저를 믿으십니까?”

“네? 음, 그 누구보다 믿습니다.”

플로리아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제리헤이드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당연히 카르티스를 향한 그것보다 컸다.

그렇기에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럼 내일 제가 황후 폐하 대신 몽수아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네? 나 대신 몽수아에 다녀오겠다니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대화가 이어지자 플로리아가 당황하며 물었다.

“물론 이번 일정이 황후 폐하께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제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

“하지만 그런 위험한 곳에 황후 폐하를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제드.”

“황후 폐하와 제가 함께 움직인다면 남들의 눈을 피하기 어려울 테니, 제가 대신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그건…….”

사실 플로리아는 이번엔 직접 가서 처리하고 싶었다. 안젤리나의 악행을 막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마 제리헤이드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걱정해주며 어렵게 꺼낸 제안을 거절하기 싫기도 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네.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그가 안심하라는 듯 눈꼬리를 휘며 웃어 보였다. 그 얼굴을 바라보자 차마 거절을 말하기 어려웠다.

“알겠어요. 그럼 그대만 믿을게요.”

이미 많은 준비를 해 둔 상태였지만, 플로리아는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사실 그녀가 제대로 복수하고 싶은 상대는 안젤리나보단 카르티스였다.

까다로운 이번 일을 제리헤이드가 도와준다면, 오히려 나중 일이 더 수월해질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제리헤이드가 별실로 건너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기 위해 오늘은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대신 어디 다치지 말고 돌아와야 해요.”

그때, 아직 소파 상석에 앉아있던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았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모습이었다.

“네.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플로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오늘따라 더 진지한 음색이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그 순간 그의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왜인지 평소와는 다른 기분이 들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아는 약속된 시간에 찾아온 레너드 경과 마주했다.

“황후 폐하,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저기 그게…….”

“왜 그러십니까?”

아직 다른 이들에게 이번 일정을 취소하겠다는 얘기를 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엔 모든 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황궁에서 머무르려 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함께 가기로 했던 일행들에게 휴가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플로리아는 황실에 보고한 대로 정말 테레아 영지에 가는 건 어떨지 고민했다.

어쩌면 그곳에 들렀다가 오는 길에, 몽수아에 있는 제리헤이드를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제리헤이드를 만나야 할 것 같군요.”

“그분은 아침 일찍 급하게 떠나셨습니다.”

플로리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벌써요?”

“예.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미 이른 시각이었다.

어차피 남쪽으로 가는 길이 겹칠 것 같아서 제리헤이드와 어느 정도까진 같이 움직여도 될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우리도 얼른 출발해야겠군요.”

“기본적인 준비는 다 마쳐 두었으니 이제 마차에 오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알겠어요. 서두르죠.”

플로리아는 레너드 경을 따라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제리헤이드에게 약속한 대로 그에게 이번 일을 온전히 맡긴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안젤리나는 사람의 목숨도 가벼이 여기는 악한 심성을 가진 여자였다.

그 때문에 제리헤이드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잠시 상황만 확인하는 건 괜찮겠지.’

일단 테레아 영지로 향한 후, 기회가 된다면 몽수아에 들러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었다.

‘후우.’

어느 때보다도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플로리아는 서둘러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

한 시간 전. 평소와 다르게 안젤리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있었다.

오늘이 결전의 날이라는 생각이 들자, 쉽사리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안젤리나 님, 말씀하신 대로 채비를 마쳤습니다.”

해리스가 마지막으로 모든 짐을 살폈다.

그녀는 오늘 함께 떠나진 않지만, 안젤리나가 입은 옷매무새까지도 세심하게 챙겼다.

“내가 며칠 황궁을 떠난다니까 괜히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

“……네? 그럴 리가요.”

촉이 좋은 안젤리나의 말에 사색이 된 해리스가 급하게 변명을 했다.

“농담이야. 이왕 자리 비우는 김에 내 침실이나 깨끗하게 대청소해 놔.”

“네, 알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 마세요.”

안젤리나는 마지막 당부도 잊지 않은 채,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봤다.

이번엔 쌍둥이를 임신해서 그런지 확실히 하루가 다르게 배가 나왔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며칠 전과 다르게 몸이 약간 무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더 늦어지기 전에 차라리 잘 됐어. 이번 일만 잘 마치면 나도 행복한 태교에 전념할 수 있겠지.’

아무리 안젤리나가 그동안 여러 번 흑마법을 이용했다 해도, 오랜만에 흑마법사와 직접 마주하려니 긴장되는 마음이 들었다.

가기 전에 카르티스라도 잠시 만난다면 심리적으로나마 조금 편안할 것 같았지만 시간이 빠듯했다.

일단 한시라도 빨리 몽수아에 도착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출발해야겠어. 어서 마차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줘.”

“네, 안젤리나 님.”

안젤리나의 요청에 해리스가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이내 두 사람이 마차 근처로 걸어가자, 실어놓은 짐을 최종 점검하는 로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안젤리나가 살갑게 눈웃음을 지었다.

“준비는 다 됐겠죠?”

“네. 안젤리나 님.”

그녀는 이게 로레인에게 건네는 마지막 미소라고 여겼다.

‘우리 다신 만나지 말아요, 로레인 언니.’

혼자서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넨 안젤리나가 마차에 올랐다.

같은 날 다들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몽수아로 떠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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