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공식 일정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은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와 마주 앉았다.
“황후 폐하, 방금 나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과거 해리스가 처음 찾아왔을 때, 플로리아는 그녀의 진심을 믿지 못했었다.
그러다 제리헤이드의 도움을 받아 해리스의 진심을 증명하도록 했기에, 이미 그도 그녀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마주할 기회가 없었기에 아직 얼굴을 모르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안젤리나의 측근 하녀 해리스예요.”
그에게 굳이 감출 필요가 없기에, 플로리아는 조금 전 함께 있던 이에 대해 설명했다.
“아, 황후 폐하께 정보를 전달해 주기로 했던 그 하녀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시간에 황후 폐하를 만나러 온 건가요? 표정이 좋지 않던데…….”
“실은 안젤리나가 곧 몽수아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네? 방금 어딜 간다고 하셨습니까?”
제리헤이드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조만간 그도 직접 몽수아에 가려고 했었으나,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서 고민이 컸었다.
그런데 그곳에 안젤리나가 제 발로 직접 간다는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순 없었다.
“몽수아 영지요. 왜 그렇게 놀라나요?”
“아, 아닙니다. 에리튼 제국의 영지와 이름이 비슷해 잠시 헷갈렸나 봅니다.”
그가 급하게 변명을 둘러댔다. 최대한 신중해야 했다.
급히 서두르기보단 플로리아에게 더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안젤리나가 뭔가 나쁜 목적을 가지고 그곳에 방문하려는 것 같아요.”
“나쁜 목적이라면…….”
“새로 온 하녀 한 명을 처리할 생각인 듯합니다.”
“…….”
제리헤이드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지금 플로리아에게 들은 건 심증이고 추측일 뿐이지만, 그의 머릿속엔 흑마법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맴돌았다.
정황상 안젤리나가 굳이 임신한 몸으로 몽수아까지 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일 것 같았다.
누군가를 조용히 없애기 위해.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태교 여행을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껏 행적으로 봐선 안젤리나의 목적이 흑마법사일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리헤이드가 먼저 플로리아의 의중을 물었다.
“우선 미행을 해야겠지요. 심증만으로 뭔가를 해결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그리고 혹시라도 뭔가 낌새가 보이면 이번 기회에 제대로 확증을 잡을 생각입니다.”
플로리아가 결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엔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안젤리나가 품은 아이들 때문에 잠시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그녀가 저지르는 악행을 막는 건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타레트 제국의 황후로서 안젤리나가 마음대로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늦기 전에 기회가 올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네. 이번 기회를 꼭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와는 같지만 조금 다른 마음으로 대답했다.
“서둘러서 좋은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군요.”
“제가 그렇게 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플로리아가 제리헤이드를 향해 맑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제리헤이드도 무거운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화답의 미소를 건넸다.
***
다음 날, 제리헤이드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플로리아에게 얻은 정보 외에 직접 더 얻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일단 제일 먼저 안젤리나의 일행의 정확한 일정과 동선을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위치와 장소를 정확히 모르고 미행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알고 하는 건 천지차이였기 때문이었다.
‘이쯤에 있을 텐데…….’
바벨 경에게 로레인 패리스라는 하녀의 뒷조사를 맡긴 후, 제리헤이드는 황실 서고에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이곳은 황실 내에서 도서 이외의 모든 서류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안젤리나가 조만간 몽수아에 방문할 예정이라면, 일정이나 행선지를 보고하는 내용의 서류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었다.
서고 안의 적막을 뚫고 그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실수라도 하면 플로리아의 안위까지 위험한 일인 만큼 아무래도 직접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플로리아의 개인 심부름을 하는 척하고 안으로 들어온 뒤, 안젤리나에 관한 서류를 찾았다.
다행히 제리헤이드가 황후의 공식 정부로 임명된 덕에 그를 의심하는 이는 없는 듯했다.
“……이건가?”
한참을 헤맨 끝에 황제의 정부들에 관한 서류 더미를 찾아냈다.
그곳엔 여섯 명의 정부들이 외부 일정을 할 때마다 보고했던 서류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 서류는 예상대로 안젤리나의 이번 여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런, 당장 내일 출발하는 일정이라니.’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행도 최소한으로 움직여야 하는 탓에, 중간에 미행을 놓치기라도 하면 모든 계획이 틀어질지도 몰랐다.
그는 안젤리나 일행의 동선을 꼼꼼히 파악하기 위해 급하게 서류를 마저 훑었다.
“잠깐.”
그 순간, 서류 내용을 살피던 그는 공식적으로 몽수아에 다녀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플로리아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안젤리나를 미행할 방법.
그 순간,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게 된 제리헤이드의 얼굴엔 근심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
한편, 레너드 경은 오랜만에 근무 시간에 플로리아를 찾아왔다. 그도 해리스만큼 급하게 전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후 폐하, 로레인 패리스가 내일 몽수아에 방문할 예정인 걸 알고 계셨습니까?”
“레너드 경도 그 얘기를 전하러 온 건가요?”
플로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웃음에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은 이유로 지난밤에 해리스도 내게 다녀갔고, 방금 전 에이니도 다녀갔거든요.”
“아.”
사실 플로리아는 오늘 아침 일찍 찾아온 에이니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다가 조금 전 헤어진 상태였다.
당연히 대화 주제는 몽수아와 안젤리나였다.
그런데 때마침 약속이라도 한 듯 레너드 경이 나타나자 신기했다.
그녀를 따르는 이들이 순서대로 정보를 알려주는 상황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나요?”
“로레인이라는 그 여자가 아직까지도 귀빈실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
“황궁 규정상 귀빈실을 비우는 일이 생기면 관리자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어서요.”
“아, 로레인이 내일부터 며칠간 황궁을 비운다는 걸 듣게 된 거군요.”
“네. 그래도 황후 폐하께서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너무 급하게 알려드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습니다.”
레너드 경이 안도하는 듯 긴장하고 있던 어깨의 힘을 조금 풀었다.
“그럼 혹시 누군가 미행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사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이번엔 직접 움직여볼까 싶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직접이요?”
“네. 아무래도 이번이 중요한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말이죠.”
플로리아의 대답에 레너드 경이 다시 어깨에 힘을 줬다.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 밀려오는 듯했다.
“그럼…… 황후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그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물론 플로리아의 호위 기사들 여럿이 함께하겠지만 이번만큼은 레너드 경도 직접 참여하고 싶었다.
황실 호위 기사단원으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정부로서 꺼낸 말이었다.
“레너드 경이요? 황실 내에서의 일만으로도 바쁜 것 아니었나요?”
“그렇긴 하지만 황후 폐하를 따르고 싶습니다. 그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요.”
“그래 준다면 나는 고맙긴 하지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호위 기사 한 명이 황후의 일행을 며칠간 따라간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레너드 경처럼 든든한 아군이 함께한다면, 플로리아 입장에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건 단순한 여행이 아닌 안젤리나를 미행하는 일이었기에, 능력 있는 호위 기사 몇 명만 추려서 불필요한 일행을 축소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럼요. 레너드 경이 함께해 준다면 더 안심되겠군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플로리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내일부터 며칠간의 일정을 준비하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떠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내일 보죠.”
물론 플로리아도 외부 일정을 떠나기 전 미리 스케줄을 정리해야만 했다.
황후라도 예외 없이 공식 일정은 황제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 소식은 지체 없이 카르티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
“방금 뭐라고 했소?”
회의를 끝마치고 대회의실에서 나오던 카르티스가 모르크 후작을 향해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 테레아 영지에 다녀오신다고 하십니다.”
테레아 영지는 황실 전용 별장이 있는 곳이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지만, 타레트 제국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기에 자주 방문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전부터 황제나 황후가 국정에 지칠 때면 아주 가끔 시간을 내서 휴양을 하는 곳으로만 여겨졌다.
플로리아는 자신이 직접 몽수아에 간다고 하면 누구라도 의심을 할 게 뻔하기에, 일부러 테레아 영지에 가는 척 가짜 서류를 만들었다.
“갑자기? 혼자 가는 것이오?”
“황후 폐하의 첫 번째 정부이신 레너드 체셔 경이 함께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크흠.”
카르티스가 주름이 깊게 팬 미간을 한껏 더 구겼다.
제 화를 돋우기 위해 형식적으로 정부들을 들인 줄 알았는데, 그중 한 명과 휴양지로 여행을 간다는 얘기를 듣자 황당했다.
‘기어코 세 명의 정부를 들이더니, 정말 그 정부들을 평생 옆에 끼고 살 생각인 건가.’
게다가 그 상대가 그동안 눈엣가시 같던 제리헤이드가 아닌 레너드 경이라는 게 더 이해가 안 됐다.
“폐하, 황후 폐하의 일정을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
“이제 황후와 관련된 건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시오.”
“……예?”
“못 들었소?”
“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모르크 후작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카르티스가 차갑게 뒤돌아섰다.
플로리아가 뭘 하든 신경 끄고, 일단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잠깐!’
그러던 그가 급하게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안젤리나도 황궁을 잠시 떠나있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플로리아와 안젤리나가 동시에 황궁을 비우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헬렌까지 의식 없이 누워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면 당분간 아무래도 혼자서 허전할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젤리나와 함께 움직일 걸 그랬나.’
바로 그 순간, 카르티스의 머릿속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건 안젤리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을 온전히 차지한 이는 최근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에이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