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전해진 이야기
카르티스와 함께 시간을 보낸 에이니는 곧바로 별궁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울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해서, 과거 자신을 투명인간이라도 보는 듯 가볍게 무시하던 카르티스에게 다시금 사랑의 감정이 샘솟진 않았다.
하지만 그와 다시 신뢰 관계를 충분히 형성해 둬야 나중에 복수를 하게 되는 날 더 큰 충격을 떠안겨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바로 그녀가 계속 카르티스의 곁을 맴도는 이유였다.
‘황후 폐하의 말씀이 옳았어. 앞으로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지난밤 그를 만나러 갔을 때보다 오늘 함께한 시간이 더 길었다.
그래도 카르티스의 경계심이 조금씩은 허물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헬렌은 어쩌지.’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녀가 아직까지도 의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그렇게 아무 의식 없이 누워있게 된 건, 순전히 에이니가 꺼낸 한 마디 때문이었다.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에 헬렌이 이렇게까지 크게 반응할 줄은 몰랐었다.
지금 상황은 예상치 못한 변수이자, 얼떨결에 한 복수가 돼버렸다.
에이니는 며칠 후면 헬렌이 감옥에서 풀려날 거라 생각했고, 그때 제대로 복수를 할지 고민할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갑작스럽게 감옥에서 빠져나온 헬렌은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내가 당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걸 원망하진 말아요.’
헬렌의 침실 앞에 서 있던 에이니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의식이 없는 그녀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불쌍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아직 에이니 자신이 받았던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예정대로라면 카르티스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헬렌에게 들를 생각이었으나,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지금 에이니가 제일 바라는 건 카르티스를 향한 복수뿐이었다.
‘괜스레 헬렌의 얼굴을 마주하면 마음만 심란하겠지.’
결국 마음을 바꾼 에이니가 자신의 응접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던 때였다.
“잠깐 나는 침실에 다녀올 테니 안젤리나 님께 아무 얘기도 하지 말아요.”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레인?”
헬렌의 침실에서 안젤리나의 응접실까지의 거리가 가깝다 보니, 안젤리나를 모시는 하녀들의 얘기가 들린 것 같았다.
에이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측근 하녀를 포함해 자신의 뒤를 따르던 일행들을 먼저 돌려보낸 후, 아무도 모르게 로레인의 뒤를 따랐다.
***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로레인은 누군가 자신의 따라오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닌가?”
금세 의심을 거둔 그녀는 서둘러 다시 침실을 향해 걸었다.
며칠 후면 안젤리나와 함께 몽수아에 다녀와야 하는 탓에 어젯밤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안젤리나가 미리 일정을 정리해 두라고 시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평소처럼 해리스에게 모든 일을 맡기려 했으나, 어디로 간 건지 어젯밤엔 통 보이질 않았다.
“오랜만에 일 좀 했더니 온몸이 다 쑤시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로레인이 모든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목 주변의 뭉친 근육을 풀어내기 위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귀빈실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황실에서 정식으로 일하는 하녀이지만, 아직 로레인은 귀빈실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녀를 황궁 안에 오래 둘 생각이 없었던 안젤리나가 굳이 다른 곳으로 방을 배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로레인은 넓고 쾌적한 남쪽 귀빈실이 마음에 들었다.
‘후우, 안젤리나 몰래 잠시만 쉬다 와야지.’
로레인이 바쁜 근무시간 중에 몰래 빠져나온 이유였다.
“얼른 서둘러 가야……,”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로레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어디에서 온 건지 에이니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어머, 로레인?”
“에이니 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별궁이 아닌 남궁을 돌아다니고 있는 에이니에 놀란 로레인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잠시 황궁을 한 바퀴 돌아보던 중이었단다. 넌 이곳에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아, 실은 제가 아직 귀빈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로레인이 난처하다는 듯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런, 안젤리나가 네게 다른 적당한 숙소를 배정하지 않았나보구나.”
“아닙니다. 저는 이곳도 정말 마음에 드는걸요.”
“참 심성이 착한 이로군. 너 같은 사람이 내 하녀로 들어왔다면 참 좋았을 텐데…….”
에이니는 진심을 담은 척했다.
로레인이 이미 어떤 여자인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황궁 안에서 지내는 걸 보면 지방의 영지에서 올라온 것이냐?”
“네. 몽수아라는 작은 남작 영지에서 살았었습니다.”
“아. 안젤리나도 그곳 출신이라지?”
“맞습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 그곳에 방문하신다고 하셔서……,”
로레인이 에이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거리다가 급하게 말을 멈췄다.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었네요.”
평소엔 잘 하지 않는 사과도 술술 나왔다.
그녀는 강자 앞에선 한없이 약해질 수 있는, 누구보다 태세 전환이 빠른 여자였다.
“몽수아에 간다고? 안젤리나가?”
“네? 아, 네. 직접 다녀오신다고 하셨어요.”
“……그게 언제지?”
에이니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냈다.
“일정은 이틀 후로 예정되어 있긴 합니다.”
“이틀 후라니…….”
급한 일정에 에이니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안젤리나가 어떤 이유를 대고 몽수아에 가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임신한 몸으로 그곳까지 그냥 갈 리가 없었다.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 움직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다. 나도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서…….”
“……몽수아를요?”
로레인이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니를 바라봤다.
“미리 알았다면 일정 정리를 했을 텐데, 함께하지 못해서 아쉽구나.”
“다른 커다란 영지에 비하면 볼 것도 없고 초라한 곳인걸요.”
“초라하긴 해도 곧 아주 중요한 곳이 되겠지.”
“……네?”
로레인은 에이니가 건넨 말의 숨은 뜻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아, 네. 조심히 가세요, 에이니 님.”
로레인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고, 인사를 마친 에이니는 급히 본궁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선 지금 빨리 플로리아를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
지난밤 로레인이 찾아 헤매던 해리스는 플로리아를 만나러 갔었다.
아무도 모르게 찾아가느라 밤늦은 시간을 이용해야만 했다.
“화, 황후 폐하.”
“……해리스?”
사실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급한 일만 마무리한 후 응접실로 찾아오겠다던 그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갑자기 시간 여유가 생긴 틈에 해리스가 찾아온 것이었다.
“네가 이 시간엔 무슨 일이냐?”
플로리아는 오랜만에 찾아온 해리스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는 건 안젤리나와 관련해서 아주 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황후 폐하, 안젤리나 님이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확실하게 들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해리스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리곤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안젤리나 님이 아무래도 로레인이라는 하녀를 없애버릴 생각이신 것 같아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없애버린다는 게, 설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냐?”
“저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짐작하고 있습니다.”
해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안젤리나와 나눴던 대화들에 대해 플로리아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동안 조금씩 염탐했던 이야기들도 꺼내놓았다.
“며칠 후엔 몽수아 영지에 직접 방문할 거라고 하셨어요.”
“……흠.”
“분명 몽수아에 다녀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며, 로레인이라는 여자 때문에 하녀 일을 그만둘 필요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플로리아가 듣기에도 확실히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지는 몰라도, 안젤리나가 계획한 것이 좋은 일일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혹시 제가 잘못 짐작한 걸까요?”
해리스가 간절한 표정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과거 안젤리나가 자신의 하녀였던 데이지를 죽였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절대 본인이 그런 게 아니라고 우겨댔지만.
해리스는 최근까지도 안젤리나의 최측근으로 있던 만큼 그녀의 본모습을 많이 목격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하녀 정도는 손수 없애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야.’
얼마 전엔 해리스까지도 희생양으로 만들려고 했던 여자였다.
자신이 한 일을 아무에게나 덮어씌우려 하는 성향이라면, 로레인도 충분히 없애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엔 누구든 눈 밖에 나는 짓을 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더 쉽게 처리할 게 분명했다. 그게 해리스 본인일지라도.
더 늦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아니. 내 짐작도 너와 같다. 안젤리나가 뭔가 일을 꾸미는 게 확실한 듯하구나.”
“그럼 어떡할까요?”
“걱정하지 말거라.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당장 네가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불안해하는 해리스를 달래기 위해서 뱉은 말은 아니었다.
지금 안젤리나가 누군가를 정말로 처리할 생각이라면, 그 목적이 ‘로레인 패리스‘, 단 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래. 일단 남들 눈을 피해서 별궁으로 돌아가거라. 남은 일들은 내가 해결하도록 하겠다.”
“네, 황후 폐하.”
해리스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컸지만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지금 당장 믿을 구석은 플로리아 뿐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해리스가 초조한 표정과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순간, 문밖에 서 있던 제리헤이드와 마주쳤다.
해리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강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