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새로운 기억
제리헤이드는 지난 며칠간 바벨 경을 다시 몽수아에 보내놓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자세히 캐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제리헤이드가 직접 돌아다니기엔, 이제 위험부담도 커지고 시간도 많이 부족했다.
몽수아까지 다녀오는데 꼬박 이틀이 걸리는 거리이다 보니,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게 답답했다.
“아직도 정보를 얻지 못한 건가?”
워낙 일 처리가 빠르고 정확한 바벨 경이기에 이쯤이면 돌아올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에게서 특별한 연락이 없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면 곤란한데…….”
제리헤이드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이러다 플로리아에게 또다시 거짓말을 하고 몽수아에 직접 다녀와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황궁 안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어.”
그가 흑마법에 관한 정보를 얻어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 지 몇 시간이 지나던 무렵이었다.
“……공작님!”
“바벨?”
여전히 제리헤이드에게 습관적으로 공작님이라 호칭하는 바벨 경이 황실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이제 공작님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마음이 너무 급해서요.”
“그보다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
제리헤이드가 보고 있던 흑마법 관련 책을 덮으며 물었다.
“네,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설마.”
“그 흑마법사의 위치를요.”
바벨 경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드디어! 수고했다. 그래서 정확한 위치가 어디야?”
“몽수아에서도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외진 곳이더라고요.”
“그래서 찾기 어려웠던 건가?”
“아주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몇 날 며칠 동안 잠복을 한 끝에 알아냈습니다.”
제리헤이드는 제일 신경 쓰던 부분이 해결됨과 동시에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조만간 직접 그 흑마법사가 있다는 곳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플로리아가 모르게.
“며칠 내로 내가 직접 몽수아에 다녀와야겠다.”
“플로리아 황후 폐하께서 뭔가 눈치채시진 않으시겠죠?”
바벨 경도 제리헤이드와 같은 부분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황궁을 며칠 비운다면, 수상한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방법을 만들어 봐야겠지.”
“그냥 사실대로 얘기하시면 안 되는 건가요?”
“아직은 안 돼. 조금 더 일이 해결된 후에 그때 당당히 말씀드리고 싶어.”
제리헤이드의 그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바벨 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화답하듯 제리헤이드가 옅은 미소를 보였지만, 그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듯 무거울 뿐이었다.
* * *
그 시각. 플로리아는 안젤리나와 함께 서쪽 다이닝룸에 있었다.
이렇게 둘만의 식사를 먼저 제안한 건 안젤리나 쪽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황후 폐하와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요.”
안젤리나는 오늘 이 자리를 만든 이유에 대해 그렇게 얘기했지만, 실은 다른 생각이 있었다.
과거 플로리아와 함께 이곳에서 식사를 하던 때의 기억을 지워내고 싶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도, 플로리아의 기억 속에서도.
그래서 이번엔 더 당당히 본궁까지 찾아온 거였다.
“지난번 궁의의 진료를 본 이후로 나를 불편해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구나.”
“불편하다니요. 예전엔 황후 폐하와 더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이젠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었어요.”
“어디 안 좋은 곳은 없느냐?”
“괜찮습니다. 그냥 별로 입맛이 없는 것 빼곤.”
지금 순간에도 플로리아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안젤리나는, 이제 그녀 앞에서 거리낄 것이 없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과거 궁의에게 진료를 받았을 때는 왜 쌍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것이냐?”
플로리아는 일부러 곤란한 질문을 건넸다. 안젤리나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아……. 그때 진료를 했던 궁의가 무능했나 봅니다. 어떻게 그런 부분을 놓칠 수 있는지 저도 참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안젤리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카르티스가 혹시라도 이 부분을 물어보는 날이 온다면, 그때 뭐라고 할지 미리 생각해 둔 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어쨌든 황실 입장에선 잘된 일이지. 황족의 핏줄이 두 명이 태어난다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입맛이 없다면 요새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냐? 뭐 먹고 싶은 것은 없고?”
플로리아는 일단 잠시 대화 주제를 옮겼다.
안젤리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티를 내봤자 좋을 게 없기에, 다른 대화를 하며 틈틈이 궁금한 것들을 캐낼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 몽수아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안젤리나가 큰 미끼를 던져주었다.
“몽수아에? 거긴 왜?”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그런지, 그곳의 음식들이 그리워서요. 폐하께 이미 허락도 받아 두었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허락이랄 것도 없긴 했다.
현재 카르티스는 안젤리나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상황이기에 몽수아 방문쯤은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아무리 그래도 꼬박 사나흘은 걸릴 일정일 텐데 괜찮겠느냐?”
“힘들긴 하겠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직접 다녀와야 해결될 것 같아서요.”
“……해결되다니? 뭘 말이지?”
플로리아가 앞에 놓인 음식에서 시선을 거두며 안젤리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안젤리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 입맛이 없는 것 말입니다. 몽수아에 다녀오면 입맛도 되찾지 않을까 해서요.”
“아.”
“죄송해요. 제가 말을 좀 헷갈리게 했나봐요.”
안젤리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가벼운 사과를 건넸다.
“괜찮으니 어서 식사하거라.”
그녀의 급한 변명을 듣던 플로리아가 이내 식사에 집중하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이게 뭐지?”
안젤리나가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이건 시테스 잎 아닌가요?”
자세히 보니 확실히 작게 조각낸 시테스 잎이었다.
“이런, 왜 또 그게 들어가 있었던 거지?”
분명 오늘 요리는 지난번 안젤리나와 식사를 하던 날 일했던 주방장이 만든 것이었다.
그날 분명히 일러뒀기에 오늘 같은 날 다시 시테스 잎을 사용한 요리를 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상황으론 그가 잘못한 게 사실이었다.
“주방장이 또 깜빡했나 봅니다. 제가 미처 모르고 먹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요.”
“네가 임신 중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황실 주방장이 그런 실수를 또 하다니.”
“그러게요.”
“당장 그자를 불러야겠구나. 만일 조금이라도 고의가 있었다면 당장 처벌을 내릴 테니……,”
“아닙니다, 황후 폐하!”
플로리아가 적극적으로 이 상황을 해결하려 하자, 오히려 안젤리나가 그녀를 말리고 들었다.
“왜 그러느냐?”
“매일 요리만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헷갈리고 실수할 수도 있는걸요.”
“…….”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먹지 않았으니까요. 주방장에겐 제가 하녀를 보내 다시 잘 일러두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네, 그럼요.”
플로리아는 평소와 다른 안젤리나의 태도가 어색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원만한 해결을 원한다고 하니 이 일을 더 키울 수는 없었다.
“알겠다. 그 음식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새로 내어오라고 해야겠구나.”
플로리아의 말에 안젤리나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다른 음식들로 손을 뻗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시테스 잎 조각 하나가 툭 떨어졌다.
‘이런.’
혹시 플로리아가 봤을까 봐 당황한 안젤리나가 얼른 그 잎을 툭툭 털어 치워버렸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잖아.’
사실 오늘 일은 그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이었다.
도둑이 제 발이라도 저리는 것처럼 그동안 시테스 잎 사건 때문에 계속 마음이 찜찜했던 차였다.
그래서 안젤리나는 일부러 아무도 모르게 준비해 온 시테스 잎을 요리에 뿌리곤 놀란 척 연기를 한 것이었다.
이미 플로리아 앞에서 임신을 확인받은 상태였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다. 아예 새로운 기억을 덮어씌울 생각이었다.
조만간 로레인까지 처리하고 나면, 아무도 자신을 방해하는 이가 없는 이 황궁에서 새로운 사람처럼 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이제 날 의심하고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안젤리나는 이날, 황궁 안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기분 좋게 플로리아와의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 * *
식사를 끝마친 안젤리나가 별궁으로 돌아가자, 오랜만에 해리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일정이 있다는 플로리아와 식사만 마치고 헤어진 후, 자신의 응접실에서 차 한잔을 마시려던 참이었다.
“웬일이야? 맨날 바쁘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니?”
“죄송합니다, 안젤리나 님. 여기 말씀하신 따뜻한 허브차예요.”
당연히 로레인이 가지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해리스의 손에 들려있는 트레이를 보자 괜히 어색했다.
“내 측근 하녀가 내 허락도 없이 돌아다니면 잘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그, 그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안젤리나의 얘기에 놀란 해리스가 일부러 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다니?”
“그게 실은…….”
해리스는 뭔가 말하려는 듯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입을 닫아버렸다.
“아닙니다. 말씀드릴 수 없어요.”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왜 말을 할 수 없다는 거야? 거짓말이지? 아무 이유도 없는 거잖아!”
“아니에요. 그럴만한 이유는 분명 있지만 그걸 말하면 제가 위험해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거예요.”
해리스의 방어적인 태도가 오히려 안젤리나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지금 날 못 믿어서 그런 거야? 뭔지는 몰라도 내가 도와줄 테니까 말해 봐.”
조금 전 플로리아를 만나고 온 상황이라 안젤리나의 말투가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빨리 말해보라니까.”
“……실은 로레인 패리스 때문입니다.”
안젤리나는 해리스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로레인 언니가? 왜?”
“그 사람이 그동안 제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안젤리나 님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했어요. 심지어 이젠 본인 방 청소까지도 제게 맡기고 있습니다.”
해리스는 자신이 흔쾌히 한 일이 아니라는 듯 억울한 표정이었다.
이제 로레인에 대한 정보 수집이 거의 끝난 상황에, 안젤리나의 미움까지 받으면서 굳이 잔심부름까지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게 진짜야?”
“네. 전부 사실입니다.”
해리스에게 뜻밖의 얘기를 전해 들은 안젤리나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조금 전까지 좋던 기분도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짓을 하고 다녔다는 말이지.”
로레인이 좋은 사람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를 통해 확인받는 상황이 되자 더 불쾌했다.
“한동안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 일을 관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고민 중이었어요.”
해리스가 더 과장되게 부풀려서 말했다.
하녀 일을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안젤리나는 해리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늘 답답하고 일처리가 느린 게 그녀의 제일 큰 단점이었다.
하지만 로레인보단 곁에 두기 편했고, 뭐든 편하게 맡길 수 있는 아둔한 성격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해리스를 로레인 때문에 잃는다고 생각하자 신경이 곤두섰다.
“어차피 며칠 안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결국 안젤리나는 해리스를 붙잡기 위해 자신의 계획 일부를 털어놓기로 했다.
새로운 하녀가 들어오고 적응하는 기간이 얼마나 불편한지 겪어봤기에, 괜히 또다시 하녀를 교체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 몽수아에 다녀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그래서 딱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했다. 해리스가 모든 계획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만.
그러나 그 순간 해리스는 안젤리나의 미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평소와 다른 확신에 찬 안젤리나의 표정이,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