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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한 걸음 더 가까이 (79/106)

79화. 한 걸음 더 가까이

플로리아가 공식적으로 신문 기사를 확인하기 전날, 제리헤이드는 이미 루이스 황제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은 상태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다행히 아무 탈 없이 깨어나셨습니다.”

“…….”

“걱정하실 일은 없으니 마음 편히 계시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루이스가 보낸 자의 말에 따르면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했다.

제리헤이드를 걱정하며 직접 사람까지 보낼 정도라면, 정말 의식은 제대로 돌아온 듯했다.

“그 외에 다른 말씀은 없었소?”

“예. 이 말씀만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알겠소. 그럼 이만 돌아가 보시오.”

제리헤이드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넨 후 급히 자리를 떴다.

“……후우.”

혼자가 된 제리헤이드가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지난 며칠간 플로리아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온 신경이 에리튼 제국에 쏠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루이스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모든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 긴장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시간을 벌었군.’

안도하던 것도 잠시, 제리헤이드는 이내 다시 미간을 구겼다.

루이스가 며칠 만에 깨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는 원래 지병이 있는 상태였다. 과연 지금의 상태가 얼마나 유지될지도 미지수였다.

그가 조금만 더 버텨주길 바라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떨쳐 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서둘러야만 했다.

내일 당장이라도 루이스는 다시 의식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황후 폐하께서도 안젤리나라는 그 여자를 다시 뒷조사할 생각이신 것 같으니, 지금 때를 잘 이용해야겠어.”

처음부터 제리헤이드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이용하기 위해 안젤리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카르티스를 무너트리기 위한 가장 큰 무기이자 약점이 될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을 확인할 날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지하 감옥에서 안젤리나에게 달려들던 헬렌은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 자리에서 호위 기사의 칼에 복부를 깊이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왜 내 몸에 손을 대냔 말이지.”

안젤리나가 화장대 위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헬렌에게 붙잡혔던 목덜미가 아직도 얼얼한 느낌이었다. 지금 보니 울긋불긋하게 손톱에 긁힌 상처도 조금 보였다.

“내 목에 이런 자국을 내다니…….”

안젤리나는 생각할수록 헬렌이 괘씸했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한다면 정말 그녀를 감옥에서 풀어줄 의향은 있었다.

물론 몇 개월 이내에 황궁 밖으로 쫓아내 버릴 궁리를 했겠지만.

하지만 헬렌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건지 끝까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이 예민한 안젤리나를 더 자극했다.

“그 여자가 원래 성미가 고약하긴 했지. 그럴 줄 알고 호위 기사랑 같이 간 거긴 하지만…….”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목 주변을 만지작거리던 안젤리나가, 풍성한 머리카락을 내려 흉을 가려버렸다.

그리곤 가운데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이봐! 해리스!”

안젤리나가 문밖을 향해 자신의 하녀를 부르자, 해리스가 아닌 로레인이 웃으며 들어왔다.

“밖에 해리스는 없어요?”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어요.”

로레인이 어색한 존댓말과 함께 대답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안젤리나에게 반말을 해오던 습관을 고치느라 애를 먹는 중이었다.

“무슨 급한 일? 나한테 보고도 없이 자리를 또 비웠다는 거예요?”

“무슨 일인지는 저도 잘…….”

로레인이 말끝을 얼버무렸다.

사실 해리스가 자리를 비우게 만든 건 오늘도 역시 로레인이었다.

황궁 하녀들의 침실은 따로 청소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로레인은 해리스를 꼬드겨서 자신의 침실 청소하는 일까지 부려 먹고 있었다.

그것까지 떠맡은 이후로 해리스는 안젤리나에게 말도 없이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로레인의 침실에 방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레인은 순순히 청소를 해 주는 해리스의 진심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굳이 모든 심부름을 불평 없이 떠안는 건, 순전히 로레인의 뒷조사를 위해서였다.

로레인의 침실까지 드나들게 되면 이런저런 염탐을 하기 편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현재 로레인의 개인 하녀처럼 하찮게 부려지고 있는 중이었지만, 그 대신 안젤리나의 잔심부름에서 해방되는 나름의 장점도 있었다.

“이게 진짜…….”

그 사실을 모르는 안젤리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리스에게 시키고 싶은 심부름을 로레인에게 시키려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녀로 들인 사람을 신경 쓰고 눈치 보는 일도 이제 관두고 싶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더 미루면 안 되겠어.’

로레인을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리라 마음먹은 안젤리나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임신을 하면 먹고 싶은 음식이 막 생각나는 건 알죠?”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로레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들어 부쩍 몽수아에 살던 때 자주 먹던 음식들이 생각나네요.”

“아……. 전 이제 몽수아라면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데, 안젤리나 님은 그곳이 그리우신가 봐요?”

로레인이 반갑지 않은 대화 주제에 뾰로통하게 물었다.

“그곳이 그립진 않지만 음식은 그리워요.”

안젤리나는 지금 하는 거짓말이 진실처럼 보이기 위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로레인이 먼저 반응을 나타냈다.

“그럼 다른 하녀들을 시켜서 음식을 좀 사오라고 할까요?”

“그곳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어떤 음식이 제맛을 내겠어요?”

“물론 그건 그렇지만…….”

로레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혹여나 안젤리나가 자신을 몽수아로 보낼까봐 걱정이 됐다.

그런 잔심부름을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술집 사장이랑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그다음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흠, 아무래도 내가 직접 다녀와야겠어요.”

그 말과 동시에 안젤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일정을 정리하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자신의 스케줄이 적힌 캘린더를 살폈다.

“안젤리나 님께서 직접이요?”

“네. 이번 기회에 고향에 가서 며칠 푹 쉬면서 태교도 좀 할 생각이에요.”

“……아.”

로레인이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안젤리나가 그곳으로 움직인다면 그녀도 함께 움직여야 할 터였다.

임신을 해본 적 없는 로레인으로선 안젤리나의 행동이 극성스럽게 느껴졌다.

‘이제 몽수아에 다신 안 가려고 했는데…….’

로레인에겐 평생 가기 싫은 곳이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듯한 안젤리나의 모습을 보자니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가야 하는 곳이라면 안젤리나의 일행들과 함께 가는 게 오히려 안전할 것 같긴 했다.

‘나 혼자 가는 것보단 낫겠지.’

안젤리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로레인은 그냥 며칠 조심히 지내다 돌아오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녀가 마지못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안젤리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이제 진짜 단 며칠만 있으면, 그녀를 신경 쓰이게 하는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은 희망이 보였다.

요즘 갑자기 하는 일이 다 잘 풀려가자 안젤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 * *

다음 날. 카르티스는 의식불명인 헬렌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녀는 급한 응급처치를 끝마친 이후론 자신의 별궁 침실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오늘도 별다른 차도가 없소?”

“예, 폐하.”

카르티스의 물음에 담당 궁의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헬렌은 그 자리에서 피를 워낙 많이 흘린 탓인지 아직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깨어날 가능성은 얼마나 되지?”

“그 부분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영영 못 깨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오?”

“…….”

궁의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숙연해진 분위기에 카르티스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안젤리나가 헬렌의 상황을 살피러 지하 감옥에 간다고 했을 때, 자신이 같이 갔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카르티스는 특별히 헬렌에게 악감정이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안젤리나가 곧 마음을 풀기만 하면 그녀를 감옥에서 꺼내줄 생각이었다.

안젤리나의 노여움을 가라앉혀 주기 위해 잠시 헬렌을 감옥에 가둔 것뿐이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자 뭔가 난처했다.

“이만 가봐야겠군. 혹시 헬렌이 깨어나거나 뭔가 이상이 생긴다면 내게 바로 연락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카르티스는 잠시 헬렌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쩌면 창백하게 누워있는 그 모습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침대를 등지고 서둘러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카르티스가 헬렌의 침실 문을 막 나서던 때였다.

“폐하!”

에이니가 인사를 건네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헬렌이 걱정되어서 잠시 얼굴이라도 보려던 차였습니다. 폐하도 같은 이유로 오신 건가요?”

“난 이제 막 가려던 참이니 들어가 보거라.”

“저기 폐하…….”

그늘진 얼굴의 카르티스가 막 돌아서려던 순간, 에이니가 그의 소맷자락을 살며시 붙잡았다.

“……?”

“이건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에이니의 뜬금없는 얘기에 카르티스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헬렌이 저렇게 된 일을 자책하고 계실까 봐 걱정돼서요. 폐하의 탓이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

“지금은 의식이 없지만, 헬렌은 분명 건강을 되찾을 겁니다.”

카르티스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분명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있는 상태였지만, 아무에게도 그 부분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마음을 알아주는 에이니의 모습에 마음이 동하려 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에이니가 카르티스의 옷자락을 놓으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넨 후 뒤돌아섰다.

그대로 헬렌의 침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카르티스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하실 말씀이 더 남으셨습니까?”

“잠시 시간이 괜찮다면 함께 차라도 한잔하겠느냐?”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에이니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카르티스가 이렇게 빨리 반응을 할 줄은 예상 못했기에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럼요.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좋습니다.”

에이니의 긍정적인 대답에 카르티스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퍼트렸다.

그리곤 그녀를 이끌고 본궁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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