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헬렌의 선택
북쪽 지하 감옥은 여름에도 서늘했다.
제대로 된 이불이나 담요도 없이 맨바닥에 앉아있으려니 온몸이 시렸다.
“대체 얼마나 더 여기서 버텨야 풀려나는 거야…….”
헬렌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몇 달 전만 해도 카르티스가 자신을 엄청 아끼던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이미 상황은 변한 지 오래였다.
“안젤리나만 아니었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이때까지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천대받고 있지만, 곧 카르티스가 안젤리나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다시 상황은 역전되리라 여겼다.
조금만 참고 버티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몸을 웅크린 헬렌이 어느새 더러워진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끌어모았다.
그 순간, 곱게 접힌 담요 하나가 쇠창살 사이로 툭 떨어졌다.
“헬렌, 괜찮아요?”
고개를 들어 목소리를 확인하니에이니였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걱정이 돼서 왔어요. 갑자기 감옥에 잡혀갔다고 하길래…….”
에이니는 헬렌의 모습을 살폈다.
고작 감옥에서 며칠을 보낸 것뿐인데 그녀는 이미 다른 죄수들처럼 초췌한 모습이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도 못한 건지 안색도 좋지 않아 보였다.
“당신이 내 걱정은 왜 하는 거죠?”
“우린 같은 정부잖아요. 제가 아니면 누가 걱정을 하겠어요? 몸은 좀 괜찮은 거죠?”
“이게 다…… 안젤리나, 그년 때문이에요!”
“말조심해요.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내가 지금 말조심하게 생겼어요? 에이니도 그랬잖아요.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을 한 걸지도 모른다고요.”
헬렌의 말에 에이니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감옥을 지키는 누구라도, 조심성 없이 마구 내뱉는 헬렌의 말을 엿들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괜히 에이니도 엮여서 덩달아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저는 그냥 혹시 모른다는 얘기였죠. 안젤리나를 아주 의심한 건 아니었어요.”
“하아, 좋아요.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졌겠죠. 내가 바보였어요.”
“헬렌,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뭐라도 도울 방법을 찾아볼게요.”
에이니가 빈말을 건넸다.
사실 그녀 입장에선 이번 일은 손도 대지 않고 골칫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에이니가 플로리아와 손잡은 이유의 절반은, 헬렌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그녀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생을 한다면, 그동안 헬렌 때문에 마음고생 했던 것들에 대한 약간의 보상은 될 것 같았다.
“안젤리나는 분명 거짓 임신을 했었는데…….”
헬렌은 감옥에 갇혀서도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린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조금 한심스러워 보였다.
“뭐 더 필요한 건 없어요?”
에이니가 그 모습을 모른 체하며 물었다.
복수의 대상이었던 헬렌이 고생하는 모습은 충분히 확인했으니 이제 슬슬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오래지 않아 여기서 나갈 테니 이거면 충분해요.”
헬렌이 에이니가 건네준 도톰한 담요를 들어 보였다.
“알겠어요. 부디 빠른 시일 내에 감옥 밖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럴 거예요.”
그녀는 왜인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이 지금 누구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건지 모르는 듯했다.
“그럼 몸조심해요.”
그 말을 끝으로 에이니는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고, 인기척이 사라진 감옥은 어둡고 고요했다.
먼저 들어온 다른 죄수들도 이미 지친 건지 말소리를 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후우.”
헬렌은 이 현실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에이니에게 건네받은 담요를 어깨에 덮은 후 무릎을 세웠다.
그리고 무릎을 감싸 안은 팔 사이로 고개를 숙였다.
지난 며칠 내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에 많이 피곤했다.
그녀가 잠시 눈을 붙이려는 순간,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에서 가까운 곳에 갇혀 있던 헬렌의 귀엔 그 소리가 거슬렸다.
“…….”
피곤함에 지친 그녀는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발소리가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선명했다.
“……뭐 두고 간 거라도 있어요?”
바로 그 순간, 혹시 에이니가 다시 돌아온 건가 싶어서 고개를 든 헬렌의 눈앞에 연핑크색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 * *
같은 시각. 플로리아도 헬렌처럼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녀 역시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을 했다는 정황 증거를 모으던 중이었기에, 남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안젤리나의 임신이 진짜라고 확인된 상황에서 내가 복수를 하려는 게 정말 맞는 일일까?”
혼자 서쪽 정원에 있던 플로리아가 중얼거렸다.
안젤리나가 지금까지 저지른 짓들에 대한 벌을 받는 건 당연히 마땅한 일이지만, 두 아이를 임신한 여자에게 당장 뭔가를 하자니 마음이 찜찜했다.
그렇다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 처벌을 하기엔 그 아이들이 너무 불쌍할 것 같았다.
회귀를 통해 다시 삶을 얻은 플로리아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안젤리나의 아이들을 걱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황후 폐하, 말씀하신 것들입니다.”
에쉬가 작은 트레이와 함께 플로리아 곁으로 다가왔다.
그 위엔 오늘 아침 신문과 커피잔이 놓여있었다.
“고맙구나.”
플로리아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신문을 펼쳤다. 오늘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가지는 잠깐의 여유였다.
[에리튼 제국의 루이스 황제, 드디어 의식 되찾아…….]
그 순간, 그녀의 눈에 커다란 헤드라인이 들어왔다.
며칠 전 쓰러졌다는 기사를 접하게 했던 루이스 황제가, 다행히 큰 후유증 없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내용이었다.
천천히 기사를 확인한 플로리아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스쳤다.
“……이 사실을 제드도 알고 있으려나?”
“무슨 사실 말씀이십니까?”
그때 때마침 제리헤이드가 그녀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황후 폐하께서 이곳에 계시다고 해서요. 잠시 앉아도 될까요?”
“그럼요.”
그가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묻자, 플로리아가 미소로 화답했다.
“요즘 많이 바빠 보이셔서 이렇게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왔습니다.”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조금 전에 무슨 얘길 하시던 겁니까? 제 얘기인 것 같았는데…….”
“아 그게…….”
플로리아가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그에게 신문을 건넸다.
그걸 건네받은 제리헤이드가 잠시 그 내용을 정독했다.
“정말 다행이죠?”
“네. 이제 괜찮아지셨다고 하니까요.”
“앞으론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겠군요.”
“예. 황후 폐하께서 이제 더 이상 이 일은 신경 쓰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네?”
제리헤이드는 굳은 표정이었다.
루이스의 병세가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뻐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안색이 나빠진 듯했다.
“이런 좋지 않은 일로 저 때문에 신경 쓰시는 게 싫습니다.”
“아…….”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할까요?”
플로리아는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알 수는 없어도 그게 어떤 뜻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럼 혹시 안젤리나가 진짜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들었나요?”
“그게 진짜였나요? 소문을 듣긴 했습니다.”
“며칠 전, 황제 폐하를 담당하는 궁의까지 데려와서 확인했답니다. 심지어 쌍둥이라고 하더군요.”
“……네?”
제리헤이드도 그 소식에 놀란 듯 눈이 커다래졌다.
“아직 초기라서 태아의 맥박이 약하다고는 했지만……, 잠깐!”
플로리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하던 말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초기일 수가 있지?”
플로리아는 몇 달 전 안젤리나가 처음 황궁에 들어온 시기를 떠올렸다.
그때 이미 그녀는 카르티스의 아이를 품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당연히 임신 중기일 테고, 아무리 쌍둥이라 해도 맥박이 그렇게 약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안젤리나의 임신이 아무래도 수상하군요.”
“궁의를 통해 직접 확인한 거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임신 시기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임신 시기요?”
“분명 궁의는 안젤리나가 품은 아기들이 임신 초기 상태인 것 같다고 했거든요.”
“아.”
“그런데 지금 시기에 그렇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깊은 생각에 잠긴 플로리아를 바라보던 제리헤이드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수상한 게 많은 여자였으니까요. 아무래도 지금 임신을 했다는 것도 뭔가 비밀이 있나 보군요.”
제리헤이드의 말에 따라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다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 * *
헬렌이 고개를 들자, 눈앞에 보이던 연핑크 드레스 자락이 멈췄다.
그리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동안 반성은 좀 했어요?”
“……안젤리나?”
풍성한 드레스의 주인은 호위 기사 몇 명을 대동한 안젤리나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헬렌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면 아직 부족한가 보네. 진심으로 울고불고 매달리면 이제 그만 감옥에서 꺼내줄 의향 정도는 있었거든요.”
“…….”
“별궁 안에서 당분간 근신 처분은 받아야 하겠지만 말이에요.”
“……그 입 좀 다물지 그래요?”
헬렌이 두르고 있던 담요를 던지며 안젤리나 앞에 마주 보고 섰다.
며칠 사이 그녀의 눈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지금 황제 폐하의 아이를 가진 임신부에게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말조심해요!”
“……거짓말쟁이. 대체 이번엔 무슨 수작을 부려서 넘어간 건지는 몰라도, 내가 여기서 나가면 당신을 가만둘 것 같아요?”
“풉.”
헬렌이 분노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안젤리나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 태도면 감옥에서 평생 못 나오지 않을까요?”
“당장 폐하를 불러줘요! 당신이랑 대화하고 싶지 않으니까 폐하를 불러 달라고!”
“폐하께서 그쪽이랑 마주하기 싫어서 날 대신 보내신 거 안 보여요?”
안젤리나의 담담한 말에 헬렌이 울부짖던 걸 멈췄다.
“……뭐라고?”
“나한테 이번 일의 결정권을 모두 일임하셨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감옥에서 나오고 싶으면 내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요.”
“……”
“그렇지 않으면 나를 노려보는 그 눈을 멀게 하거나, 맘대로 놀려대는 그 가벼운 혀를 뽑아버릴……,”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헬렌이 안젤리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감옥 창살 사이로 그녀의 손이 튀어나와 안젤리나의 목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헤, 헬렌…….”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안젤리나는 미처 그 손을 피하지 못했고, 헬렌의 손은 더 강하게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으으…….”
숨이 막혀오던 순간, 안젤리나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호위 기사를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눈 깜짝할 사이에 헬렌의 손에서 힘이 풀리며 안젤리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으윽!”
거친 숨을 몰아쉬던 안젤리나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확인하기 위해 쇠창살 안을 살폈다.
그러자 그 안엔 호위 기사의 칼에 찔린 헬렌이 의식 없이 쓰러져 있었다.
헬렌의 잘못된 선택이 가져온 뜻밖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