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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처벌 (77/106)

77화. 처벌

“지금 그게 무슨 말이오?”

궁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카르티스가 되물었다.

“안젤리나가 임신한 게 아니라는 소리인가?”

“그, 그게 아니라…….”

궁의는 할 일이 끝난 듯 조심스럽게 안젤리나의 옆에서 물러났다.

그리곤 조금 전 하던 말을 다시 천천히 이었다.

“안젤리나 님에게선 태아의 맥박이 느껴집니다.”

“……확실한가요?”

이번엔 플로리아가 재빨리 물었다.

“예. 확실합니다.”

“…….”

궁의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예상 밖이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아닌 두 아이의 맥박이 뛰고 있습니다.”

결국 다음 말을 기다리지 못한 안젤리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두 아이라면 쌍둥이라는 얘긴가요?”

“예, 안젤리나 님.”

그녀는 누구보다 놀란 듯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아직 맥이 약하긴 하지만, 박동은 규칙적이기에 크게 걱정할 것은 없으실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안젤리나가 멍하니 앉아있는 사이, 카르티스가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그동안 두 아이를 품고 있느라 고생했구나, 안젤리나.”

“아닙니다, 폐하. ……저는, 저는 괜찮아요.”

안젤리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을 더듬었다.

진짜로 자신이 다시 임신을 한 게 맞다면, 얼마 전 카르티스와 합방을 했던 날에 아기가 생긴 것 같았다.

그 외엔 그와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없으니 다른 날을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내가 계획한 일이긴 하지만 진짜로 그 한 번에 임신이 될 줄이야.’

겉으로 티를 낼 순 없지만 안젤리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흘러갈 줄은 몰랐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태아의 맥박이 아주 약합니다. 아직 초기인 듯하니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고맙군.”

“그럼 더 궁금하신 게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물러가도 될까요?”

궁의가 가져온 진료 도구들을 주섬주섬 챙기며 묻자, 카르티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 그대도 고생했으니 이만 가도 좋소.”

“예, 폐하. 감사합니다.”

어색한 공기를 피하기 위해 궁의는 서둘러 응접실 밖으로 나갔고, 곧이어 플로리아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곳에서 플로리아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동안 진짜 임신을 한 몸이면서 왜 안젤리나가 이런저런 의심을 받을 만한 짓을 하고 다닌 건지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을 이 자리에서 해결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안젤리나의 임신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믿겠소?”

응접실을 빠져나가려는 플로리아에게, 카르티스가 보란 듯 일부러 질문을 건넸다.

그는 안젤리나가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걸 증명받고 나니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황제와의 합방을 거부했던 플로리아가 조금의 후회라도 하길 바랐다.

“그럼요. 제 눈으로 확인했는데 어떻게 믿지 않겠나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진실을 확인한 이상, 황궁 안에 떠도는 헛소문은 제가 나서서 진정시킬 테니 염려 마세요.”

플로리아는 진심이었다.

아무리 카르티스와 안젤리나에게 악감정이 있다고 해도, 거짓 루머를 이용해서 그들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신경 써 준다면 고맙겠소. 이제야 뭔가 황후처럼 보이는군.”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도 다행이군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플로리아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카르티스의 가시 돋친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은 플로리아가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안젤리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내가 유산을 했었다는 사실을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까?’

원래는 재임신을 하게 된다면 카르티스에게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기분이 좋은 카르티스의 모습을 보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궁의가 조금 전 임신 초기인 것 같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꼬리가 길어지면 밟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안젤리나는 진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카르티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좋았다.

‘나중에, 나중에 조금만 더 천천히 말씀드리지 뭐.’

그녀는 일단 지금의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를 소중한 순간이었다.

몇 달 전 플로리아 앞에서 실수로 시테스 잎을 먹을 뻔했던 그 날 이후로, 한시도 마음 편하게 있었던 적이 없었다.

우연히 ‘임신’이라는 이유로 엮여서, 자신의 하녀인 데이지를 죽인 이후로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 달라졌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완전 틀어져 버린 타레트 제국 황궁 안에서, 지금 제일 큰 권력을 쥘 수 있는 건 본인이라 여겼다.

‘그래 맞아. 쌍둥이라면, 아들을 낳을 확률도 더 높아진 거잖아?’

안젤리나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이제 카르티스와 플로리아 사이에 아이를 가질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 상황에 자신이 아이를 낳기만 한다면…….

어쩌면 그 아이를 황태자까지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자라나고 있었다.

“혹시 먹고 싶은 것이나 필요한 것이 있느냐?”

카르티스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눈치채고 물었다.

이렇게 기특한 안젤리나를 두고 에이니에게 잠시 마음이 흔들릴 뻔했던 게 조금 마음에 걸린 이유도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두 명이나 품고 있는 그녀를 위해 뭐라도 해주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것 같았다.

“특별히 원하는 건 없는데…….”

안젤리나가 문득 하던 대답을 멈추며 카르티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제가 제일 바라는 게 생각났습니다, 폐하.”

“뭔지 말해 보거라.”

“그동안 저를 모욕하고 거짓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헬렌을 처벌하여 주십시오.”

그 말을 하는 안젤리나의 입가엔 살며시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 * *

“그럴 리가 없잖아!”

헬렌은 덜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게 사실이야? 네가 지어낸 것은 아니겠지?”

“……네? 저는 그냥 황후 폐하의 말씀을 전달한 것뿐입니다.”

플로리아가 보낸 하녀가 초조하게 대답했다.

플로리아는 황제의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헬렌에게 소식통을 보냈었다.

다른 누구보다 그녀에게만큼은 먼저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분명, 분명 안젤리나 그 여자가 거짓 임신을 했다는 증거가 확실했는데……. 쌍둥이를 가졌다고? 아니 그보다 임신이 진짜였다고?”

전할 말을 끝낸 하녀가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자, 헬렌의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처음엔 거의 공황 상태나 다름없었지만 이내 공포와 불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이번만큼은 확신에 차 있던 그녀였다.

“안젤리나가 거짓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무조건 확신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냔 말이야.”

플로리아에게 전해 들은 진실임에도 그녀가 정말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임신한 게 사실이라면, 일을 이렇게 만든 나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하려고 할 텐데…….”

곧 현실을 직시한 헬렌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헬렌 님,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그녀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급하게 문밖으로 나선 헬렌은 곧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곳엔 카르티스가 보낸 황실 호위 기사들이 헬렌을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그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헬렌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카르티스와 안젤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 폐하…….”

헬렌의 인기척에 안젤리나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헬렌, 이리 와서 잠시 앉거라.”

경계심 어린 눈빛의 헬렌이 그들 앞으로 다가가자, 안젤리나는 미소를 싹 거두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오늘 무슨 일로 부른 건지는 알겠지?”

“……저 여자에게 사과라도 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안젤리나를 힐끗 바라보던 헬렌이 담담히 물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그냥 눈 딱 감고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안젤리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처럼 입이 따라주지 않았다.

억지로 사과를 하느니 이 황궁에서 쫓겨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폐하께서 나한테 큰 처벌을 내리시진 않겠지. 내가 안젤리나를 딱히 위험하게 만든 것도 아니잖아.’

그녀가 혼자서 근거를 알 수 없는 안도를 하던 그때였다.

“혹시 네가 황후를 부추긴 것이냐?”

카르티스가 덤덤히 물었다.

그는 굳이 왜 플로리아가 직접 나서서 안젤리나와 궁의를 불러모은 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자신에게 찾아왔던 헬렌이었다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폐하, 어차피 사과는 필요 없으니 그냥 헬렌을 감옥에 가둬주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젤리나가 헬렌을 노려봤다.

“안젤리나!”

“왜 그러죠? 황궁 안에서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 게 누군지 잊은 건가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충분히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 건 당신이잖아!”

얼굴이 발갛게 변해가는 헬렌의 모습에 안젤리나가 가볍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이렇게 처벌받을 일을 만든 건 헬렌 당신이에요. 나에게 스트레스를 준 만큼 황제 폐하의 아이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었다고요!”

“두 사람 다 그만하거라.”

더 이상 언쟁을 보다 못한 카르티스가 두 사람에게 낮고 굵은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황제로서의 위엄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폐하…….”

“헬렌, 정말 이 자리에서 사과할 생각은 없는 것이냐?”

“네,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네게 주는 기회다. 정말이겠지?”

“…….”

헬렌은 마음을 굳힌 듯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젤리나가 카르티스를 눈빛으로 부추기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 널 부른 건, 마지막으로 안젤리나와 화해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

“하지만 이 일의 주동자인 네가 그럴 마음조차 없다면, 내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뿐.”

카르티스는 하던 말을 멈추며 문밖에 있는 호위 기사를 불러들였다.

“예, 폐하.”

그리곤 마주 앉은 헬렌을 가리키며 호위기사에게 명령했다.

“당장 이 자를 황궁 지하 감옥에 가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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