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거짓 임신
카르티스는 몇 개의 화살을 허공으로 날린 후에야 들고 있던 활을 하녀에게 넘겼다.
마음이 불안정해서 그런지 사냥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만 돌아가야겠구나.”
이제 곧 해가 지려는 듯, 하늘도 서서히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예, 황제 폐하.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카르티스가 사냥터에서 발걸음을 돌리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그가 언성을 높이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탓이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거래?”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쪽으로 걸어가던 카르티스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걸음을 재촉하던 중이었다.
“남편한테 유산한 사실을 숨겼다나, 뭐라나.”
하지만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사냥터 울타리 밖에 서 있는 여자들이 작은 틈 사이로 보였다. 그들은 근처 영지에 사는 사람들인 듯했다.
상대 쪽에선 사냥터에 누가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도 않는 듯 대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카르티스는 조심스럽게 멈춰 서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다.
물론 다른 이야기였다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유산’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왜인지 안젤리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배를 만지는 걸 극도로 꺼리던 그녀의 모습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숨겨? 이미 배가 많이 불렀을 텐데…….”
“배에 옷가지들을 집어넣어서 가짜로 부풀려서 다녔나 봐.”
“……설마. 진짜 그렇게까지 했단 말이야?”
“아들만 낳으면 남편이 원하는 건 뭐든 해 준다고 했다며.”
“그럼 유산한 걸 안 들켰으면 거짓으로 아들을 출산한 척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건가?”
“그거까진 나도 모르지, 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르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거짓으로 임신과 출산한 척 연기를 한다고?’
헬렌이 처음 거짓 임신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카르티스는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평민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만한 일이라면…….
헬렌의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었던 게 큰 실수는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확인 정도는 하는 게 좋았으려나.’
어쩌면 너무 안젤리나만 믿고 안일하게 있었던 것 같았다.
“폐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가 걸음을 멈춘 채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자, 근처에 있던 모르크 후작이 서둘러 달려왔다.
“모르크 후작, 최근에 헬렌이 나를 찾아온 게 언제쯤인지 기억하시오?”
카르티스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 날짜를 비서에게 물었다.
“그게, 저도 확인을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모르크 후작이 품 안에 넣어두었던 일정이 적힌 노트를 꺼내려 하자, 카르티스가 이내 손을 내저었다.
황제의 비서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이미 오래된 일이라는 뜻이었다.
“됐소. 이만 출발하지.”
그는 그런 날짜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황궁에 도착하면, 내일 당장 궁의와 안젤리나를 불러 검진을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그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틀어지게 됐다.
몇 명의 예상치 못한 손님들이, 황제의 집무실에서 카르티스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몇 시간 전. 플로리아는 헬렌에게 직접 찾아갔다.
오늘이 바로 그녀가 바라던 ‘그 날’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황후 폐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헬렌은 눈가에 그늘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네가 나에게 했던 부탁을 기억하느냐?”
“……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헬렌은 이미 모든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황제도 황후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시늉만 할 뿐, 사실상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지쳐있었다.
황궁 안에서 자신의 편은 한 명도 없고, 전부 안젤리나만 감싸고 도는 것 같은 기분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플로리아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더 경황이 없었다.
“바로 오늘 밤, 안젤리나의 진실을 확인할 예정이다.”
“정말이십니까?”
플로리아의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헬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조건 안젤리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진 않는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진실을 확인할 필요는 있겠지.”
“그거면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때,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헬렌에게 플로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마지막으로 하는 얘기지만,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을 한 게 아닐 경우 헬렌 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다.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그 여자가 거짓 임신이라는 걸 누구보다 확신하니까요.”
“알겠다.”
플로리아는 더 이상 헬렌과의 대화로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책임은 각자가 져야 할 것이었다.
헬렌이든 안젤리나든, 둘 중에 한 사람은 오늘 밤 이후로 상황이 급변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별궁에서 헬렌을 만나고 나가던 플로리아가 에쉬를 불렀다.
“네, 황후 폐하.”
“안젤리나에게도 찾아가서 오늘 밤 본궁으로 오라고 전하거라.”
* * *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것이오?”
자신의 응접실로 들어서던 카르티스는 이미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황했다.
그 자리엔, 플로리아를 비롯해 안젤리나와 황실 궁의가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플로리아는 무표정했고 안젤리나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궁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 이제 오셨습니까?”
안젤리나가 서둘러 카르티스 옆으로 달려갔다.
주인을 기다리던 애처로운 강아지처럼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무슨 일이냐?”
“그게…….”
안젤리나는 그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 플로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가 곤란해 질까 봐, 그녀가 자신을 대신해서 상황을 설명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 눈빛을 읽은 플로리아가 카르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일부러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언제부턴가 황궁 안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서요.”
“대체 무슨 소문 말이오?”
“제 귀에 자꾸 안젤리나가 거짓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물론 폐하께서도 이미 들어보셨겠지요.”
“…….”
카르티스가 대답 없이 미간을 구겼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왜 그런 거짓말을 꾸미겠어요? 전 억울합니다.”
“차라리 잘 됐구나.”
간절한 안젤리나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카르티스가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네?”
“그렇게 너를 의심하는 자들이 많다면, 이 자리에서 진실을 증명해 보이거라.”
“폐하…….”
카르티스는 처음엔 이 자리가 불편했지만, 어쩌면 잘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직접 안젤리나를 불러서 임신 여부를 확인하려면 예상치 못한 위험부담도 떠안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기회를 통해, 안젤리나를 위한 일인 척 남의 손을 빌려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네 임신이 진실이라는 걸 확인받으면, 어느 누구도 널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안젤리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손바닥에도 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플로리아가 황제의 응접실로 불렀을 때만 해도, 안젤리나는 별일이 아닌 줄 알았다.
하지만 궁의와 함께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이후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플로리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뭔가 작정을 하기라도 한 듯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폐하께서 오시면 다 해결되겠지? 아무도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카르티스마저 플로리아와 같은 마음일 줄은 몰랐다. 이제 정말 피할 곳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진료를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궁의가 조심스럽게 묻자, 플로리아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오.”
카르티스의 허락도 떨어지자,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챙겨온 진료 도구들을 하나씩 응접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준비를 끝낸 궁의가 안젤리나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내 몸에 손끝 하나 대기만 해 봐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
궁의는 안젤리나의 협박 섞인 말에 멈칫하며 카르티스의 눈치를 살폈다.
“안젤리나. 당장 궁의의 진료를 받도록 하거라.”
“싫습니다, 폐하!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요?”
“널 아끼는 만큼 지켜주기 위해 이러는 것이다. 언제까지 황궁 안에 떠도는 헛소문들을 그냥 둘 생각인 것이냐?”
“그 소문을 낸 자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저는 진짜 임신을 한……,”
안젤리나가 억울하다며 카르티스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바닥에 뭔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그건…….”
제일 먼저 그걸 발견한 플로리아가 손을 뻗어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두툼한 흰 천으로 만든 복대였다.
“이, 이건 그러니까…….”
안젤리나는 핏기없는 얼굴로 플로리아의 손에 들린 복대만 바라봤다.
“당장 진료를 시작하시오!”
그 모습을 본 카르티스도 전과 다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그도 안젤리나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간 상태였다.
“폐하!”
안젤리나가 울부짖는 소리를 냈지만, 카르티스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마음속엔 이미 그녀에 대한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어느새 안젤리나도 체념한 듯 조용해졌다.
고요한 응접실 안에서 카르티스는 고민에 빠졌다.
만일 거짓 임신이 확실해 진다면, 안젤리나에게 대체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할지 말이다.
그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였다.
“……저기, 폐하.”
응접실 소파에 앉은 안젤리나를 이리저리 살피던 궁의가 조심스럽게 카르티스를 불렀다.
“왜 그러시오?”
“……그게, 맥박이 조금 이상합니다.”
조심스러운 궁의의 말에 카르티스와 안젤리나, 그리고 플로리아까지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복대가 벗겨져 더 이상 부풀어 있지 않은 안젤리나의 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