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부탁
다음 날, 플로리아는 첫날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이른 아침부터 공식 일정에 참석해야 했다.
매주 목요일은 귀족 부인들과의 아침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평소엔 이런 자리를 불편해하던 그녀였지만, 다른 이들에게 이번 정부 임명식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빠지지 않고 참석한 상태였다.
“황후 폐하, 간밤에 편안히 보내셨는지요?”
“어제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세 명의 정부를 동시에 들이시다니요.”
“저도 아주 놀랐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에요.”
귀족 부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플로리아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던 건지 궁금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직접적으로 묻지 못하니 답답할 터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요.”
“아닙니다. 정말 멋지셨어요.”
“그럼요. 우리 타레트 제국에 길이 남을 명장면일 겁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제국의 황후 앞에서 쓴소리를 내뱉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그들은 정부 임명식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결국 플로리아가 이 자리에서 객관적인 제국민들의 평가를 듣는 걸 포기할 즈음이었다.
“그런데 다들 에리튼 제국 소식 들으셨습니까?”
할 이야기가 다 떨어진 건지 잠시 정적이 흐른 틈에, 누군가 먼저 새로운 대화 주제를 꺼냈다.
그녀는 모르크 후작의 아내인 몰리아였다.
“네? 무슨 소식 말입니까?”
귀를 쫑긋하는 다른 부인들과는 다르게, 플로리아는 앞에 놓인 빵을 한 조각 집어 들며 무덤덤하게 듣기만 하고 있었다.
“루이스 라블레아 황제께서 쓰러지셨다지 뭡니까?”
그 말에, 작은 나이프를 들고 빵에 버터를 바르던 플로리아는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루이스 황제가 쓰러졌다고?’
그가 제리헤이드의 친형이라는 사실은 플로리아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게 진짜라면 가볍게 여길 사안은 아닌 듯했다.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예, 황후 폐하. 오늘 아침에 신문에서 읽은 것입니다.”
평소였다면 플로리아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신문부터 확인했었겠지만, 어제는 제리헤이드와 함께 별실에서 밤을 보내느라 그럴 경황이 없었다.
“믿을 수 있는 신문사인가요? 요즘 진위 여부도 제대로 확인 안 하고 발행하는 신문 기사가 너무 많아서 말이에요.”
“그러게요. 거짓일 수도 있잖아요.”
“어머, 아니에요. 이건 마튼 신문사에서 낸 기사예요.”
“……정말요?”
“그렇다면 진짜로 에리튼의 황제 폐하가 쓰러지셨다는 거예요?”
억울하다는 듯 몰리아가 서둘러 신문사를 밝히자 귀족 부인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튼 신문사라면, 평소 진실만을 보도하기로 유명했다.
거짓 루머들을 여과 없이 기사로 실었다가 논란이 터지곤 하는 다른 신문사들과는 대비되는 곳이었다.
“크레티안 경, 오늘 아침에 나온 마튼 신문을 가져오도록 해요.”
“예, 황후 폐하.”
플로리아 곁에서 대기 중이던 호위 기사가 급하게 어딘가로 뛰어갔고, 그는 오래지 않아 신문 하나를 들고 왔다.
“여깄습니다.”
그것을 넘겨받은 플로리아는 몰리아가 얘기한 기사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크레티안 경이 내민 신문의 1면엔 오늘 날짜와 신문사의 이름이 크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에 에리튼 제국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었다.
몰리아의 얘기대로 루이스 황제가 쓰러졌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니겠지?’
아주 자세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기에 그가 지금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까지 알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만일 루이스 황제가 사경을 헤매는 급박한 상황이라면, 제리헤이드를 지금 당장 에리튼 제국으로 보내줘야 할 수도 있었다.
플로리아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너무 늦게 알게 돼서 더 큰 충격을 받기 전에, 서둘러 제리헤이드에게 소식을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만찬은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군요.”
플로리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지금이요?”
“황후 폐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급한 일이 생겨서요.”
“……그, 그러시죠.”
“이런, 어쩔 수 없네요.”
황후가 먼저 서둘러 자리를 뜨자, 귀족 부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플로리아는 그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카르티스는 어제에 이어 오전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오랜만에 황궁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왜인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근처에 가까이 있는 황실 사냥터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말없이 혼자 사냥에만 집중하다 보면 잡생각을 떨쳐내기 쉬웠다.
오늘은 다른 이에게 휴식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부러 최소한의 인원만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허전하긴 하군.’
분명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황궁을 벗어난 것이지만, 몇 시간째 멍하니 마차에 앉아 있다 보니 헛헛한 기분이 들었다.
사냥터에 도착할 때까진 마음이 심란할 것 같았다.
“…….”
그런데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던 그 순간, 카르티스의 머릿속에 갑자기 에이니의 모습이 스쳤다.
“왜……. 안젤리나가 아니라 에이니가 생각나는 거지?”
지난밤 함께 술을 몇 잔 마신 게 전부였지만 그녀와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에이니를 정부로 들인 이후로 함께 보낸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마치 새 정부를 들이기라도 한 듯 마음이 설렜다.
“……아무래도 요즘 안젤리나와 너무 떨어져 있었던 것 같군.”
카르티스가 자신의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자신이 에이니에게 신경을 쓰는 걸 안젤리나가 알게 된다면, 분명 예민하게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다섯 번째 정부인 헬렌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듯했다.
황제가 자신의 정부를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른 정부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다.
황궁 안에서 정부들은 저마다 황제의 눈에 더 들기 위해서 경쟁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가 에이니에게 관심을 더 주는 만큼, 다른 정부들이 불만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생각에 카르티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이 순간, 황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많은 정부를 들인 일이 후회됐다.
“후우, 그래. 그냥 전처럼 지내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지.”
그는 지난밤 에이니와 함께 술을 마신 일은 기억에서 지우기로 했다.
괜히 뒤늦게 모든 걸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몇 달 안에 안젤리나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 상황도 정리되리라 믿었다.
“오늘은 다른 생각은 말아야겠어.”
그렇게 애써 정부들에 대한 기억을 떨쳐내는 사이,
“폐하, 도착했습니다.”
마차 밖에선 사냥터 도착을 알리는 모르크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만찬장에서 빠져나간 플로리아는 제리헤이드에게 중요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곧바로 그를 찾아갔다.
“혹시 이걸 봤나요?”
가져온 신문을 그에게 내밀자, 제리헤이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용을 살폈다.
“이건…….”
“에리튼 제국에 대한 기사예요.”
“…….”
어두워진 그의 표정을 살피던 플로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늦기 전에 서둘러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제리헤이드는 이내 평온한 말투로 돌아왔다. 더불어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덤덤한 표정도 함께였다.
“저는 이제 에리튼 제국을 떠난 사람인걸요. 제가 지금 찾아간다 해도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요.”
“…….”
“폐하께서는 금세 훌훌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제리헤이드는 그만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플로리아는 그가 오히려 걱정되는 마음을 감추려고 애써 밝은 척하는 걸 아닐까 싶었다.
아닌 척해도 지금 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알기에, 더 이상 이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괜히 그를 급하게 정부로 데려와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오히려 이럴 땐 지나친 걱정이 더 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제드에게도 생각이 있겠지.’
며칠 내로 루이스 황제가 괜찮아졌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기만을 바라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그때였다.
“황후 폐하, 헤미쉬 님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그녀의 두 번째 정부가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시에 제리헤이드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 테니 편히 대화하세요.”
“그래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해요.”
잠시 후, 제리헤이드가 응접실을 빠져나가자마자 헤미쉬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거라.”
플로리아는 그 전의 대화는 잊은 듯 밝은 목소리로 헤미쉬를 반겼다.
“잠시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그래. 저쪽으로 앉도록 하거라.”
플로리아가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그러자 긴장한 듯한 헤미쉬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실은 예전부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플로리아도 그를 따라 소파에 자리를 잡자, 헤미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지?”
“……혹시 3년 전, 길에서 빚쟁이에게 쫓기던 남자를 도와준 일을 기억하시나요?”
헤미쉬의 말에 플로리아가 잠시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곤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그를 바라봤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플로리아에게도 선명히 남아있던 기억이었다. 그런 일이 평소 흔하게 벌어지는 건 아니었기에.
“그때 황후 폐하께서 도움을 주신 사람이 바로, 접니다.”
“……!”
플로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정말이냐? 이런 우연이 있을 줄이야…….”
“네, 정말입니다.”
“무사히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헤미쉬.”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너무 늦게 말씀드려서 죄송해요.”
“아니다. 난 그저 황후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
“아닙니다. 그날 황후 폐하 덕분에 제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헤미쉬가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제게 부탁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부탁?”
“네. 그 말씀을 드리려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이 도움 될 일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부디 황후 폐하께 뭐라도 보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음, 부탁이라…….”
플로리아는 헤미쉬에게 특별히 원하는 게 없기에, 당장 요구할 뭔가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누군가의 간절한 얼굴이 떠올랐었다.
“황제 폐하가 아닌 황후 폐하께서 궁의를 불러 직접 안젤리나의 몸 상태를 확인해 주세요.”
며칠 전 헬렌이 찾아왔던 때의 일이었다.
날짜를 다시 세어보자, 벌써 그날로부터 이주일 가까이 흘러 있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매달릴 곳은 황후 폐하밖에 없어요.”
자신에게 매달리며 부탁하는 헬렌에게 플로리아는 분명히 그러겠다고 약속을 건넸었다.
약속은 약속이기에 이제 정말 헬렌을 도와줄 때인 것 같았다.
물론 아직까지도 카르티스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아무래도 안젤리나의 임신을 다시 확인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헤미쉬, 네가 나를 도와줄 일이 있을 것 같구나.”
“정말인가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는 소식에 눈을 빛내는 그를 향해 플로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밤, 황제 폐하의 응접실로 황실 궁의를 데려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