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첫날밤
오늘 밤 에이니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다시 카르티스의 눈에 드는 것.
지금 당장 안젤리나의 자리까지 파고드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우선 헬렌보다는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이렇게 폐하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네요.”
조심스러운 에이니의 말에 와인잔을 들던 카르티스의 손이 멈칫했다.
“…….”
“그리웠습니다, 폐하.”
카르티스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과거 자신이 에이니에게 무심했던 건 알고 있었다.
헬렌이 황궁으로 들어오던 날, 그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도 뒤늦게 짐작이 갔다.
그렇기에 더 에이니를 피했던 것도 있었다.
이미 미안하다고 말을 하기엔 때를 놓쳤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분위기엔 그 말도 훨씬 쉬울 것 같았다.
소문과 다르게 에이니는 훨씬 더 차분해 보였다.
“……그땐 미안하게 됐구나.”
“아, 괜찮습니다. 다 지난 일 인걸요.”
“크흠,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다.”
에이니가 싱긋 웃었다. 평소엔 지은 적 없던 애교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카르티스는 괜히 더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무슨 속상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속상한 일은 무슨…….”
“혹시 힘든 일이 있으시다면 뭐든 제게 털어놓으세요. 오늘 밤엔 제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
카르티스는 에이니가 다시 채워놓은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직 술기운이 많이 올라오진 않은 것 같았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제국의 황제 자리에 있다는 건 정말 지치고 외로운 일일 것 같아요.”
“…….”
“혹시 제가 이렇게 종종 찾아와 폐하의 어깨 위에 놓인 짐을 나눠드려도 될까요?”
“내 어깨 위의 짐이라…….”
카르티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대답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생각보다 그가 마음을 쉽게 여는 것 같은 모습에, 에이니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드시겠어요?”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운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술잔에 남은 와인을 따랐다.
운 좋게 에이니와의 묵은 감정을 해소했다고 생각한 카르티스는, 그 후로도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의심 없이 그대로 들이켰다.
* * *
한편, 카르티스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모르고 있던 안젤리나는 다른 고민에 빠져있었다.
지금 그녀의 미간엔 깊은 주름도 패어 있었다.
“……로레인을 어떻게 처리해 버리지?”
그녀가 다짜고짜 황궁으로 찾아온 것도 불만이었지만, 이제 하다 하다 카르티스에게까지 접근하려고 하는 게 너무 거슬렸다.
그리고 이건 짐작일 뿐이지만, 로레인이 들어온 이후로 요즘 해리스조차도 뭔가 변한 것 같았다.
로레인에 비하면 그녀는 훨씬 부리기 좋은 하녀였다.
하지만 정작 필요할 때마다 옆에 없으니 불편한 게 너무 많았다.
“이러다 심부름 하나도 마음 편히 못 시키게 생겼잖아…….”
짜증이 밀려오자 잠도 오지 않았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처음엔 그냥 눈앞에서만 로레인을 없애버릴 궁리를 했다. 빠른 시일 내에 어디든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른 영지로 쫓아낼 방법만 찾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로레인의 성격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쫓아낸다 한들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 있는 한 다시 복수를 하겠다며 황궁으로 돌아올 게 뻔했다.
“그냥 단순히 쫓아내는 것만으론 안 돼. 더 좋은 방법이 필요한데…….”
그때, 안젤리나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래, 몽수아……!”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 초조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몽수아에 갈 일을 만들어서 로레인 언니랑 같이 내려가면 되잖아.”
청부 살인을 부탁할 용병을 구하거나, 다른 영지에 있을 흑마법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특히나 요즘엔 흑마법사의 수가 감소하고 있어서 그들을 만나는 자체가 어려웠다.
“차라리 내가 잘 아는 지역으로 가면 더 유리할 테지.”
몽수아는 로레인에게도 익숙한 장소지만, 안젤리나에게도 태어난 고향이자 평생을 살아온 곳이었다.
그곳에 사는 흑마법사의 위치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익숙한 지리를 이용해 로레인의 실종이나 사망을 자연스럽게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간 후에 조용히 로레인을 없앤다면, 아무 소문도 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당장 무슨 핑계를 대고 몽수아에 다녀온담…….”
일단 그게 제일 고민이었다.
그냥 몽수아에 놀러 가자고 한다면, 눈치 빠른 로레인이 의심을 할 수도 있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끝이 없네.”
머리는 아프지만 그래도 안젤리나는 전보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래도 앞으로 며칠만 있으면 로레인을 손쉽게 치워버릴 수 있을 거야.”
그 생각만으로도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각. 정부 임명식이 끝난 뒤 레너드 경은 별실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 있었다.
똑똑—.
조용한 노크 소리에 문을 열자 그 앞엔 헤미쉬가 서 있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오늘 밤엔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
“시간 괜찮으시다면 같이 술 한잔하시겠어요?”
헤미쉬가 웃으며 술병을 흔들었다.
그의 반대편 손엔 두 개의 크리스털 잔이 들려있었다.
“들어와요.”
레너드 경이 어색하게 옆으로 비켜나자, 헤미쉬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레너드 경?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뭡니까?”
“왜 매번 존대를 하십니까?”
“네?”
“사실 지금은 황후 폐하의 같은 정부라고 해도, 레너드 경께서는 귀족 출신이시잖아요. 저는 일개 평민일 뿐인데도 항상 제게 존댓말을 하시는 이유가 궁금했거든요.”
헤미쉬의 진지한 물음에 레너드 경이 어깨를 살짝 들어올렸다.
“별 뜻은 없습니다. 지금은 저도 그저 황실기사단원일 뿐인데, 평민이든 하녀든 다른 사람들한테 하대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느껴서요.”
“…….”
“대답이 됐습니까?”
레너드 경이 묻자, 헤미쉬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멋진 분이네요. 역시 황후 폐하께서 괜히 첫 번째 정부로 들이신 게 아니군요.”
“과찬입니다. 그냥 형식적인 정부일 뿐이니까요.”
“그럼 혹시…….”
“…….”
“계약 기간이 끝나고 한 달 후에 정말 정부 계약을 끝내실 건가요?”
“아마도요?”
레너드 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헤미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맞는 거겠죠?”
“왜 그러십니까?”
“사실 저는 예전부터 황후 폐하를 엄청 존경해 왔거든요. 그래서 이 계약을 흔쾌히 받아들인 거고요.”
“…….”
“실은 이렇게 계약 정부로라도 황후 폐하 옆에 계속 있을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예요.”
“……그게 도움이 될까요?”
“네?”
레너드 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영향으로 약간 흥분해 있던 헤미쉬도 금세 차분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황후 폐하께 도움이 되는 방향일지 물은 겁니다.”
“아, 저는 나쁠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계약 정부로 남아 있으려는 이유는 오직 하나, 황후 폐하께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
“아직 방법은 생각 못 했지만요. 황후 폐하께서 갑자기 정부를 세 명이나 들이려고 하시는 이유가 뭔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꼭 그 일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런 거라면 나도 찬성입니다.”
갑자기 바뀐 레너드 경의 말투에, 헤미쉬가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네?”
“황후 폐하 곁에서 더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기회라면, 계약을 연장하든 그냥 이대로 있든……. 정부 자리를 더 유지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말입니다.”
“오!”
헤미쉬가 감격한 표정으로 레너드 경을 향해 손바닥을 높게 들어 내밀었다.
“뭡니까?”
“같은 마음이 통한 기념이랄까요?”
레너드 경이 머뭇거리다가 가볍게 손바닥을 맞대자, 헤미쉬가 웃음을 건넸다.
“그럼 이제 축하주를 즐겨도 될까요?”
그에 대답이라도 하듯, 레너드 경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헤미쉬가 가져온 술병을 열었다.
* * *
별실에 머무르고 있던 제리헤이드와 플로리아는 어색하게 마주 서 있었다.
“이것도 황후 폐하를 위해 준비한 것들입니다.”
오늘 밤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낼 침실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흠, 그대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색함을 풀어보기 위해 플로리아가 농담 섞인 말투로 물었다.
“이런 보석들이 황후 폐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방안 곳곳에 장식된 보석과 꽃들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더 아름답게 보였다.
“고마워요.”
플로리아가 몇 걸음 옮겨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이 들자 기분이 좋아지면서도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이제 진짜 여름이라 그런가, 아무래도 좀 더운 것 같지 않나요?”
플로리아가 창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제리헤이드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당겨 플로리아를 제 쪽으로 이끌었다.
어느새 그의 품 안에 들어간 플로리아의 허리엔 제리헤이드의 팔이 단단히 감겨 있었다.
“가, 갑자기 왜……,”
“놀라셨습니까?”
“조, 조금요?”
플로리아가 말을 더듬거리자, 제리헤이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이내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 황후 폐하께서 제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약속드려요.”
플로리아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알면서도 기꺼이 정부가 되어준 제리헤이드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그 마음을 아는 건지 그가 그녀를 꽉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동시에 그녀의 심장은 요란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품에 안고 있을 때보다 더 심장이 세게 뛰었다.
“……괜찮으십니까?”
플로리아의 긴장한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는 걸 알아챈 제리헤이드가 물었다.
“…….”
“이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그가 플로리아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아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에요. 그냥 좀 긴장해서…….”
포옹 정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좀 달랐다.
제리헤이드에게서 느껴지는 숨결만으로도 취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혼란스러운 플로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자, 제리헤이드가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그럼 다시 다가가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플로리아는 발그레해진 뺨을 모른 척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심장이 멈춰버릴까 봐 걱정되는 마음은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