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붉은 드레스
정부 임명식이 모두 끝나자, 어느새 해 질 녘이 되어 있었다.
오늘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준 사람들과 함께 저녁 만찬까지 마친 플로리아는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느낌이었다.
“조금 피곤하네요. 잠시 쉬어야겠군요.”
플로리아가 에르앙 백작 부인을 향해 얘기하자, 그녀가 곧바로 다가왔다.
“갈아입을 편한 드레스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부인.”
시녀의 도움을 받아 몸을 꽉 조이고 있던 하얀 드레스를 벗어낸 후, 플로리아가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이제 오늘 저녁에 남은 일정은 하나뿐이었다. 새로 들인 정부와의 첫날밤.
플로리아는 세 사람의 정부를 동시에 들이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세 번째 정부인 제리헤이드와 첫날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의 정부는 단기 계약을 한 상태이기에 굳이 함께 밤을 보내는 것까진 계획하지 않았다.
레너드 체셔 경과 헤미쉬 드밀레도 이 부분은 동의를 할 것이기에 별걱정이 없었지만, 문제는 제리헤이드였다.
그와의 첫날밤은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었다.
제리헤이드의 얼굴을 떠올리자 괜히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후우.”
플로리아가 심호흡을 하며 첫날밤의 기억을 잠시 잊으려던 그 순간, 응접실에 누군가 찾아왔다.
“황후 폐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바로 에이니 시슬리였다.
플로리아는 오늘 일부러 그녀를 불러들였다. 제리헤이드와의 첫날밤을 보내기 전에 잠시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이니, 마침 잘 왔구나.”
“오늘 정부 임명식은 잘 끝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려요, 황후 폐하.”
“그래, 덕분에 잘 마무리했단다. 고맙구나.”
“혹시라도 제가 방해가 될까 봐 참석하진 않았습니다. 부디 이해해주세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아마 네가 왔더라도 방해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플로리아가 이해한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이제 더 늦기 전에 네 차례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플로리아가 대답 대신 에쉬를 향해 눈짓을 하자, 그녀가 드레스 한 벌을 가지고 나타났다.
“이게 무엇입니까?”
“널 위해 준비한 것이다.”
사실 플로리아는 정부 임명식을 위한 드레스를 준비하며, 자신의 것 외에 에이니의 몫으로 따로 한 벌을 더 제작해 두었다.
“카르티스 황제 폐하께 복수를 하는 게 네 소원이라고 했었지?”
“……네?”
“그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느냐?”
“……그렇습니다. 아직도 그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 옷을 입고 오늘 밤 폐하께 찾아가거라.”
플로리아가 준비된 드레스를 에이니에게 건넸다.
어깨의 레이스 장식이 돋보이는 강렬한 붉은빛의 드레스였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는 당연히 내가 오늘 밤 정부와의 첫날밤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
“그럴 때 폐하의 곁에 나타나 위로를 해드린다면, 아마 에이니 네게 큰 의지를 하실 게 분명해.”
“폐하께서, 제게요?”
에이니는 이렇게 대놓고 정면 승부를 할 생각은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특히나 그동안 카르티스와 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었기에 약간의 두려움이 일었다.
그녀가 정부로 임명된 후, 카르티스에게 사랑을 받았던 기간은 채 3개월이 되지 않았다.
“언제까지 미루기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만…….”
“더 늦어지면 계획을 실행하는 게 어려워질지도 모르니, 때가 왔을 때 기회를 잡아야 해.”
에이니는 플로리아의 제안을 곧바로 따르긴 곤란했다.
그녀는 카르티스가 그렇게까지 단순한 사람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플로리아의 얘기를 듣고 있자, 점점 혹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제게 정말 의지를 하실까요?”
“한 번에 모든 걸 해낼 수는 없겠지만 분명 언젠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나를 믿거라.”
플로리아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에이니를 바라봤다.
지금껏 서로 애정 없는 사이였을지라도, 그의 아내로 옆에 있으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카르티스는 지금 안젤리나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정부 임명식을 계기로 플로리아와의 사이도 완전히 틀어진 만큼,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대길 원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 틈을 에이니가 잘 파고든다면 그녀가 원하던 복수가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 뜻에 따르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황후 폐하를 믿으니까요.”
“너는 분명 잘 해낼 테니 걱정 말거라, 에이니.”
“그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이니가 드레스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급히 별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후, 나도 이제 서둘러야겠어.”
그녀가 나간 후, 플로리아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곤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침실 옆에 있는 별실로 향했다.
* * *
잠시 후, 플로리아가 별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리헤이드가 그 앞으로 훅 튀어나왔다.
“……제드?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황후 폐하.”
“내 방에서 기다리려니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플로리아가 솔직하게 지금 심정을 고백했다.
그녀는 첫날밤을 앞두고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덩달아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같은 마음이긴 합니다.”
그의 대답에 플로리아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저기 황후 폐하, 아까 임명식에 늦어서 정말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괜찮아요. 그대가 이유 없이 늦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리헤이드가 가볍게 플로리아의 손을 잡았다.
“제드……?”
플로리아가 움찔하자 그가 손에 더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실은 황후 폐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쪽으로 와 보세요.”
“네? 어디 가는 거죠?”
“가 보시면 압니다.”
제리헤이드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어딘가로 이끌었고, 플로리아는 영문도 모르는 상태로 그를 따라 걸어갔다.
* * *
“이게 다 뭐죠? 언제 다 준비한 거예요?”
플로리아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자주 드나들던 서쪽 정원은 지금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적어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캔들과 작은 조명들, 향기로운 꽃과 몇몇 과일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마치 요정들이 드나드는 밤의 정원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요 며칠 이걸 준비하느라 좀 바빴습니다.”
“설마 이것 때문에 계속 피곤해하던 건가요?”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원을 꾸미는데 제일 많은 공을 들이긴 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공간이니까요. 마음에 드십니까?”
플로리아는, 여전히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정원을 둘러봤다.
오늘 하루 동안 긴장하느라 쌓였던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가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제드. 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첫날밤에 대한 부담이 있으실 것 같아서 일부러 준비한 것입니다.”
“아…….”
제리헤이드가 플로리아를 마주 보며 섰다. 그 순간 플로리아는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사실 그녀는 제리헤이드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게 사랑의 감정인지는 헷갈렸었다.
그래서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저 카르티스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만으로 그를 정부로 들인 거라면 그만큼 미안한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저는 오늘부터 아루비스 공작이 아닌 온전히 황후 폐하의 정부가 된 겁니다.”
“그러네요. 단둘이 기념 파티라도 할까요?”
“음……. 죄송하지만 술은 사양입니다.”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플로리아가 가볍게 웃었다.
“대신 저녁 시간에 허브티를 마시면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 밤, 저랑 차 한잔하시겠어요?”
여전히 남아 있는 플로리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제리헤이드가 물었다.
“좋아요.”
그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제리헤이드는 크리스털로 된 테이블 쪽으로 플로리아를 천천히 이끌었다.
* * *
같은 시각. 카르티스는 아직 집무실에 있었다.
그동안 플로리아가 그저 단순한 반항을 하는 거라 여겼는데 예상이 완벽하게 빗나갔다.
그녀는 고집대로 정말 세 명의 정부를 들였고, 카르티스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아내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지 않다고 느꼈다.
그동안은 어떻게든 플로리아의 마음을 돌려서 정부를 들이는 일을 취소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황손을 얻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플로리아고 뭐고 전부 다 귀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처럼 술이 생각나는 밤이 없는데, 같이 마실 마땅한 사람이 없다니…….”
임신 중인 안젤리나를 부를 수도 없었고 모르크 후작과 마시는 건 더더욱 싫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새 정부를 들여야 하나?”
아무리 그가 그동안 정부를 많이 들였다 해도, 안젤리나를 끝으로 더 이상 정부를 들일 생각은 없었다.
여섯이나 되는 이들을 관리하는 것도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외로운 기분이 드는 건 무척 견디기 힘들었다.
똑똑—.
그때,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에이니 님께서 오셨습니다.”
“……에이니? 들어오거라.”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에 카르티스가 커다란 책상 의자에서 일어났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이니는 플로리아에게 선물 받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평소엔 가리고 다니던 그녀의 가녀린 쇄골과 어깨라인이 아름답게 드러나 있었다.
카르티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이 시간엔 무슨 일이냐?”
그가 급하게 시선을 거뒀다.
“오랜만에 폐하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습니다. 혹시 바쁘신가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혼자 있고 싶구나. 많이 피곤해서 말이지.”
카르티스는 순간 마음이 흔들릴 뻔했지만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가 제일 아끼는 안젤리나도 돌려보낸 상황에, 밤늦은 시간을 에이니와 함께 보내는 것도 이상했다.
“폐하를 더 피곤하게 하지 않을게요.”
“…….”
“정말 아무 뜻 없이 찾아온 겁니다. 잠이 잘 오지 않는 긴 밤을 혼자 보내려니 힘들어서요.”
“…….”
카르티스는 흔들리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로는 에이니를 거부하면서도 마음은 뜻대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정 불편하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요.”
에이니는 체념한 것처럼 뒤를 돌았고 붉은 드레스 자락이 그녀를 따라 흔들렸다.
그때, 카르티스가 에이니를 향해 몇 걸음 움직여 그녀의 왼쪽 손목을 붙잡았다.
그조차 의도하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폐하?”
“혹시, 오늘 밤 나와 함께 술 한잔하겠느냐?”
그의 제안에 에이니가 당황한 것도 잠시, 곧바로 눈꼬리를 둥글게 휘어 보였다.
“그럼요. 함께 해 주신다면 영광입니다, 폐하.”
그 순간,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조용한 집무실 안에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