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그가 늦은 이유
“……하아, 하아.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뒤늦게 대신전에 들어선 제리헤이드의 모습에 카르티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표정도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 순간 플로리아의 얼굴엔 그와 대비되게 안도감이 퍼졌다.
“황후 폐하.”
제리헤이드는 급하게 뛰어 들어와 그녀의 옆자리에 섰다.
“제가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니겠죠?”
멀리서부터 뛰어온 건지 그의 백금발 머리칼이 심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아니에요. 와줘서 고마워요, 제드.”
플로리아가 그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져주며 대답했다.
“이해하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리헤이드가 웃으며 화답하자, 플로리아도 그를 따라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마음 졸이던 일이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져 버린 거 같았다.
“그럼 이제 마지막 정부 임명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준비되길 기다리던 대신관은 식순에 맞춰 진행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르티스의 이마엔 깊은 주름이 패이고 있었다.
“폐하…….”
모르크 후작은 혹시나 그가 돌발 행동이라도 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이만 가지.”
하지만 카르티스는 더 이상의 특별한 언급 없이 그대로 대신전을 빠져나가 버렸다.
이 자리에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비서와 호위 기사를 비롯해 한 무리의 인원이 우르르 움직이던 중, 누군가 카르티스와 어깨를 부딪쳤다.
호위기사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카르티스가 제일 먼저 출구 쪽으로 향한 탓이었다.
“아얏! 대체 누구……,”
그와 어깨를 부딪친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카르티스의 차림새를 보곤 말을 멈췄다.
“……화, 화, 황제 폐하?”
“당장 비켜서거라.”
카르티스 옆으로 급하게 달려온 모르크 후작의 말에, 앞에 서 있던 여자가 깜짝 놀라며 옆으로 한 걸음 비켜났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최근에 새로 들어와서 폐하를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일하는 자인가?”
카르티스가 모르크 후작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하며, 처음 보는 여자를 위아래로 살폈다.
“저는 별궁 안젤리나 님의 담당 하녀인, 로레인 패리스라고 합니다.”
로레인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카르티스를 올려다봤다.
“흐음, 안젤리나가 며칠 전에 얘기한 하녀인가 보군.”
“정말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이만 가 보거라.”
카르티스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지금 상황에 하녀에게 굳이 벌을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전부 짜증스럽고 귀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로레인은 아직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비켜날 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이대로 간다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냐?”
“폐하께서 시키시는 일이라면 뭐든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죠?”
그때, 로레인의 뒤쪽으로 안젤리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매우 화가 난 사람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로레인을 노려봤다.
“안젤리나 님, 실은 제가 실수로 폐하와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폐하께……,”
“제가 해결할 테니 이만 가 보세요. 다들 물러가 있거라!”
안젤리나가 로레인의 말을 끊으며, 다른 하녀 무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녀들은 전부 그만 자리를 비키라는 뜻이었다.
“네, 안젤리나 님.”
결국, 카르티스의 눈에 들어보려 노력하던 로레인은 아쉬움을 한가득 안은 채 자리를 비켜야 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안젤리나의 물음에 카르티스가 차갑게 대답했다.
“이만 집무실로 돌아가던 길이니, 안젤리나 너도 그만 별궁으로 돌아가거라.”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신 듯한데 제가 함께 있겠습니다.”
“아니다. 혼자 있고 싶구나. 조심히 가거라.”
“폐하…….”
안젤리나의 부름에도 카르티스는 그대로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대신전을 빠져나가 버렸다.
‘……혼자 있고 싶다고?’
카르티스에게 처음 듣는 말투였다.
안젤리나는 자신이 이렇게 푸대접을 받은 이유가 로레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정하게 대해주던 카르티스가 변했다고 느꼈다.
‘내가 나타나기 전에, 로레인 언니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폐하께서 이러시지?’
어쩌면 그가 하녀와 부딪힌 일을 속으로 불쾌해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황제와 어깨를 부딪친 하녀는 감옥에 갇히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고의든 실수든, 로레인의 개념 없는 행동으로 나까지 미움받기 시작하는 걸지도 몰라.’
비약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안젤리나의 불안감은 끝도 없이 커져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플로리아 황후의 정부 임명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염탐하러 왔던 안젤리나는, 결국 임명식은 지켜보지도 않은 채 다시 별궁으로 사라져 버렸다.
* * *
한편, 그 시각 제리헤이드는 플로리아에게 목걸이를 받았다.
앞의 정부들이 받았던 징표와 같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이제 정부 임명식도 그 끝을 향해가는 중이었다.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네요.”
플로리아가 안도하는 마음으로 작게 속삭였다.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네. 다행입니다.”
제리헤이드도 그에 화답하듯 대답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무사히 정부 임명식을 진행했지만, 플로리아에겐 차마 말하지 못한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전.
제리헤이드는 오늘 있을 정부 임명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바벨, 내가 부탁한 건 준비됐겠지?”
“그럼요, 공작님. 완벽히 해 놓았습니다.”
그는 바벨 경과 대화를 나누며 마지막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의 응접실을 빠져나가던 때였다.
“……아루비스 공작님?”
응접실 문 앞엔 익숙한 누군가가 하녀들 무리와 함께 서 있었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옆에 있던 하녀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고,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따라온 하녀들은 어느새 자리를 떠났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리헤이드의 옆에 있던 바벨 경이 물었다.
“……젠느 양?”
그러자 제리헤이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 같은 질문을 했다.
“네? 젠느라면…… 에리튼 제국의 젠느 백작가?”
“네. 혹시 못 만나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그녀는 에리튼 제국에 있어야 할 젠느 백작가의 영애, 일리아나였다.
과거 제리헤이드와 약혼을 진행할 뻔했던 사이여서 마냥 반가워하긴 어색했다.
제리헤이드는 그녀를 여기서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더 놀랐다.
“오늘 정부 임명식이 진행된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시던 길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마터면 진짜 길이 엇갈릴 뻔했네요.”
일리아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정말 제리헤이드를 못 볼까 봐 걱정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보다 여기까진 무슨 일입니까? 그것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제리헤이드가 저도 모르게 난처한 표정을 짓자, 일리아나가 급하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
“오해하진 마세요. 오래 붙잡진 않을 겁니다.”
“아.”
그의 표정을 읽은 일리아나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지금 여행을 다니는 중입니다. 마침 이번에 타레트 제국을 구경하려던 차에, 때가 맞아 공작님을 만나 뵈러 왔을 뿐입니다.”
“에리튼 제국에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게 실은 황제 폐하에 관한 얘기입니다…….”
일리아나의 표정은 얼핏 봐도 심각했다.
사람 많은 공간에서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리헤이드는 혹여나 정부 임명식에 늦을까 봐 초조했다.
하지만 루이스에 관련된 얘기라는 말에 그녀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 * *
바벨 경에게 응접실 밖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한 제리헤이드는, 일리아나와 마주 앉았다.
가운데 소파에 앉은 두 사람에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이제 얘기해 보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그게, 루이스 황제 폐하께서…… 지금 많이 위독하십니다.”
일리아나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제리헤이드는 자신의 친형인 루이스가 지병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장이 요동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빨리 그의 상태가 악화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위독하다면…… 어느 정도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까?”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려지셨다고 합니다. 제가 이곳에 출발할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계셨어요.”
“…….”
일리아나의 얘기에 제리헤이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공작님? 설마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또다시 표정에서 드러난 감정 때문인지 일리아나가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폐하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
“어쨌든 이렇게 찾아와서 알려줘서 고맙군요.”
제리헤이드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일리아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실은 폐하께서 쓰러지셨다는 소문이 기자들 귀에도 들어간 듯합니다. 이곳 타레트 제국에 퍼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니, 그 전에 공작님께 꼭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이런.”
그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지고 있었다.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카르티스의 귀에도 루이스의 병세에 대한 얘기가 들어갈 생각을 하니 답답했다.
“이제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군요.”
“아! 걱정 마세요. 저도 다 전달했으니 그만 가 보려 합니다.”
제리헤이드가 혼잣말처럼 뱉은 말이 자신에게 건넨 얘기라고 생각한 건지, 일리아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일리아나 젠느 양.”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뵙죠.”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고 곧바로 바벨 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대신전까지 가려면 서두르셔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그러게 말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네? 얼른 출발하시죠.”
바벨 경이 급하게 먼저 응접실을 빠져나갔고, 제리헤이드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순간 그는 루이스 황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플로리아의 정부가 되는 일이 더 간절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