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정부 임명식 (2)
지난밤. 크레티안 경은 다른 호위기사들과 함께 귀빈실 근처를 구석구석 확인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몇 시간의 수색에도 별다른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근처엔 없는 것 같으니, 이제부터 각자 흩어져서 찾도록!”
“예, 알겠습니다.”
한참 동안 아무런 수확이 없자, 크레티안 경이 이제 막 본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바스락—.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들렸고 흩어지던 호위 기사들은 모두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크레티안 경을 필두로 어둠 속에 있던 사내 두 명을 포위했다.
“거기 누구지? 누가 보내서 온 것이냐?”
“…….”
입을 꾹 다문 남자 두 명은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누가 보내서 온 것이냐고 물었다.”
크레티안 경이 한 남자의 목에 예리한 검날을 갖다 댔다.
“…….”
그럼에도 남자가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자, 그가 검을 움직여 남자의 복면을 벗겨냈다.
처음 보는 얼굴인 듯했다.
“이 자들을 포박한 후, 당장 황후 폐하께 데려가도록 하거라.”
크레티안 경이 다른 호위 기사에게 명했다.
그러자 복면이 벗겨진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묻겠다. 누가 시킨 일이더냐?”
“그게…….”
남자는 한참을 주저한 끝에 결국 누군가의 이름을 뱉었다.
“……모, 모르크 후작님입니다.”
* * *
다음 날 아침. 모르크 후작은 카르티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그는 지금 카르티스에게 엄청난 칭찬을 받고 있어야 했다.
어젯밤 그는, 황궁 밖에서 외부인을 불러들여서 플로리아 황후의 정부 후보를 캐내려 했었다.
정부 후보들이 누구인지 미리 정체를 파악하고, 상황이 따라준다면 오늘 정부 임명식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그게 모르크 후작의 계획이었다.
두 가지의 계획 중에 하나만 성공을 한다 해도, 카르티스는 그의 능력과 지혜를 칭찬할 게 분명했다.
‘요즘 폐하와의 사이가 많이 틀어졌으니, 이 일을 계기로 예전으로 돌아가야만 해.’
모르크 후작이 평소 카르티스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으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눈 밖에 난 비서의 최후는 해피엔딩이 아닐 게 뻔했다.
그렇기에 황제의 신뢰를 얻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희망찬 계획은 예상과는 다르게 모두 엉망이 돼버렸다.
“설마 모르크 후작께서 이런 짓을 벌이신 겁니까?”
갑작스럽게 플로리아 황후의 호위 기사인 크레티안 경이 나타났을 때, 모르크 후작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가 고용했던 남자들은 얻어낸 수확 따윈 하나도 없이 일을 망쳐버렸다.
급하게 사람을 구하느라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한 탓이 컸다.
“크레티안 경. 부탁이니 제발 한 번만 없던 일로 해주시오.”
모르크 후작은 그저 호기심이었을 뿐 악의는 없었다며, 황제 폐하에게만큼은 비밀로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자 크레티안 경이 선뜻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네는 모르크 후작에게, 그가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내일 황후 폐하의 정부 임명식에 황제 폐하와 함께 참석하신다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해드리겠습니다.”
그건 마치 부탁 같은 협박이었다.
크레티안 경은 플로리아가 카르티스를 초대하기 위해 직접 찾아갔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플로리아를 위해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이었다.
그리고 곤란한 부탁이라 해도 당장 거절할 도리가 없던 모르크 후작은 얼떨결에 알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폐하, 이쪽입니다.”
비서인 모르크 후작의 안내에 따라 카르티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어느새 대신전 입구에 들어섰다.
카르티스의 표정은 모르크 후작보다 굳어 있었지만 발걸음은 빨랐다.
그는 처음엔 이곳에 절대 나타나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모르크 후작의 설득에 이번에도 넘어가고 말았다.
이미 정부 허가서를 내어준 상황에서 임명식에 불참할 경우, 플로리아와의 자존심 싸움에서 지는 거라는 말에 발끈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비서는, 역대 선대 황제들은 참석했던 자리에 본인만 불참한다면 분명 속 좁은 황제라는 소문이 퍼질 거라고 했다.
카르티스가 그렇게 아끼던 선례가 본인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라도 이곳에 찾아오고 말았다.
“이제 곧 플로리아 아리안느 황후 폐하의 정부 임명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마침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신전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플로리아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마치 여신이라도 된 듯 순백의 드레스 차림이었다.
“이쪽에 앉으시지요.”
모르크 후작은 이미 준비되어 있던 카르티스의 자리를 안내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건너편 쪽에 있는 크레티안 경과 눈이 마주쳤다.
모르크 후작이 무언의 눈짓을 보내자,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게 보였다.
이제 모든 게 해결됐다는 생각에 모르크 후작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 사이, 드디어 플로리아 황후의 정부 임명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황실 호위 기사인 레너드 체셔 경입니다.”
대신관의 말에 일순간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첫 번째 정부인 레너드 경이 입장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의 호위 기사?”
“저 사람이 황후 폐하의 정부라고?”
다들 놀란 눈치였고, 그중에서도 카르티스가 제일 놀란 표정이었다.
‘뭐?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황실 호위 기사를 개인 정부로 들이려 하다니…….’
그는 아직까지도 플로리아가 자신에게 반항하려 아무나 정부로 들이는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그렇게 잘난 척을 한 만큼 똑똑하게 정부 후보를 골랐다면, 굳이 호위 기사 중에서도 저렇게 말단 기사를 고를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행동이 우리 제국 황실의 체면을 다 깎아 먹는다는 걸 모르는군.’
환하게 웃고 있는 플로리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는 그 모습이 진심이 아니라 가식일 거라 여겼다.
“그럼 이제 정부 임명서 전달이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대신관의 말에 플로리아는 준비된 서류를 건넸고, 레너드 경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 서류를 넘겨받았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축하를 건넸고, 플로리아는 자신의 정부가 되어준 이에게 목걸이 하나를 걸어 주었다.
일종의 징표 같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레너드 경은 인사를 건넨 후,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한쪽으로 자리를 비켰다.
다음 순서를 위한 행동이었다.
“자, 이제 두 번째 정부를 임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관이 정해진 식순대로 소리쳤다.
그러자 오늘 플로리아가 여러 명의 정부를 들인다는 사실을 몰랐던 이들은 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기자들이 서 있는 쪽에서 크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엘론 영지 출신의 헤미쉬 드밀레 님입니다.”
헤미쉬가 해맑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평민인 남자가 황후의 정부가 될 거라는 예상은 못했었기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완전 특종이야!”
“내일 신문은 대박 나겠어!”
한 무리의 기자들만이 기쁨의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중이었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하다 하다 평민을 정부로 들인다고?”
카르티스는 저도 모르게 불만을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
그만큼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플로리아가 평범한 평민을 정부로 들일 줄은 몰랐었다.
아무리 급하게 들인 허울뿐인 정부라지만, 평민 출신의 힘없는 정부라면 어느 면에서나 큰 도움이 안 될 거라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걱정을 했던 내가 바보였군.”
그 순간 카르티스는, 자신이 이 공간에 있는 게 불필요한 시간 낭비라고 느껴졌다.
고작 저런 모습을 보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래서 그는 이만 집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어디 가십니까?”
“난 이만 돌아가야겠소.”
그렇게 카르티스가 모르크 후작을 내팽개치고 대신전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정부 임명식은 진행되고 있었다.
두 번째 정부 임명은 첫 번째 순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너드 경과는 다르게, 헤미쉬의 눈가에 감격의 눈물이 조금 맺혀있다는 것 외엔 모두 똑같았다.
그 또한 정부의 징표인 목걸이를 받은 후 정해진 자리로 돌아갔고 어느새 정부 임명식은 마지막 순서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플로리아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몇 분 전.
에쉬를 통해 제리헤이드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던 플로리아는 초조했지만 식을 미루지 않았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일 뿐, 제리헤이드가 일부러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분명 제시간에 나타날 거야. 그가 정말 사라졌을 리 없어.’
하지만 세 번째 정부 후보인 제리헤이드가 입장할 차례가 다 되었는데도 그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자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정부 임명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대신관이 또다시 소리쳤고 대신전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
하지만 앞선 두 명의 정부들과는 다르게 아무도 입장하는 이가 없자, 대신관은 다시 한번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지막 정부 임명식이 있겠습니다. 입장해 주시지요.”
하지만 이번에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플로리아는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 현실에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황후 폐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설마 아루비스 공께서 일부러 나타나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플로리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아루비스 공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가?”
그리고 같은 시각, 호위 기사 무리를 이끌고 자리를 떠나려던 카르티스는 대신관 입구 쪽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동안 제리헤이드를 볼 때마다, 에리튼 제국의 황족이자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왜 플로리아의 정부로 들어오려는 건지 늘 의문이었다.
“역시 진심으로 정부가 되려던 게 아니었던 거군.”
비어있는 플로리아의 옆자리를 보자 그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플로리아 앞에서 다정한 사랑꾼인 척하며 그녀의 마음을 홀리더니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도망가버린 제리헤이드가 우스웠다.
“내 예상보다 일이 재미있어졌소.”
카르티스가 어느새 옆자리에 다가온 모르크 후작을 향해 말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인 듯 플로리아의 표정도 굳어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서 황후를 도와주는 게 보기 좋을 것 같지 않나?”
“예, 그렇게 하신다면 누구보다 마음 넓은 황제 폐하처럼 보일 것입니다.”
모르크 후작의 맞장구에 기분이 좋아진 카르티스가 플로리아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황후 폐하!”
누군가 대신전의 문을 벌컥 열고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쏟아졌다.
“……하아, 하아.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거친 숨을 내뱉는 그는 바로, 플로리아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리헤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