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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정부 임명식 (1) (70/106)

70화. 정부 임명식 (1)

몇 시간 전. 에이니와 마주 앉은 안젤리나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아뇨, 걱정은 무슨…….”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젤리나의 얼굴엔 수심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혹시 그때 그 문제는 해결됐어요?”

지금 걱정하는 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에이니는 그녀를 떠보기로 했다.

어쩌면 로레인이라는 그 여자가 황궁 안에 들어와 있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문제요?”

“전에 나한테 돈 빌려간 적 있었잖아요. 누군가한테 협박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아.”

“그때 협박한다던 여자 이름이 로레인이던가요? 그 일은 잘 해결됐나 해서요.”

안젤리나는 순간 응접실 문 쪽을 바라봤다.

지금 그 앞에 서 있을 로레인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걸 들키는 순간, 우정이고 뭐고 다 날아가겠지?’

생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한 느낌이었다.

황궁 안에서 유일한 친구인 에이니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안젤리나는 거짓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을 또 지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 그 일은 덕분에 잘 해결됐어요. 안 그래도 이번 달 황실에서 받은 돈으로 에이니에게 빌린 돈 일부를 갚을 예정이었는데…….”

안젤리나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녀가 여태껏 로레인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긴장됐다.

그렇게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때 분명 로레인이 협박한다며 돈까지 빌려갔었는데, 지금은 별궁 하녀로 고용했다는 얘기를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간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네요. 또 어려운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 내게 얘기해요.”

“고마워요. 역시 에이니 밖에 없네요.”

하지만 반대로 에이니는 이 대화를 통해 안젤리나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는 하녀 로레인의 이름이 과거 안젤리나에게 들었던 그 이름과 같은지 확인하고 싶어서, 조금 전 일부러 이름을 넣어서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안젤리나는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를 협박했다던 그 여자 역시 ‘로레인’이 맞다는 얘기였다.

‘내가 기억한 그 이름이 확실하군.’

안젤리나가 거짓말에 능할 거라는 예상은 했었기에 그리 놀랍진 않았다.

오히려 그때의 거짓말 덕분에 로레인의 이름이라도 알아낸 게 다행이라 여겼다.

그래서 일단 에이니는 당분간 로레인을 눈여겨보기로 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안젤리나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안젤리나를 향해 마음에 없는 미소를 건네며, 에이니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 * *

한편. 황후궁에서 빠져나온 레너드 경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남쪽 귀빈실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던 헤미쉬는 빠른 걸음에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깁니다.”

어느새 걸음을 멈춘 레너드 경이 수많은 방들 사이에 있는 작은 방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서 오늘 밤을 보내는 건가요?”

“네. 누군가 이 근처까지는 알아낸다고 해도, 어느 방인지 알아내는 데까지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근데 여기가 제일 작은 방 같은데 왜 굳이…….”

헤미쉬의 물음에 레너드 경이 방문을 열며 대답했다.

“다들 같은 생각일 테니까요. 다른 드넓은 곳을 놔두고 굳이 이 방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을 겁니다.”

“아.”

설명을 마친 레너드 경이 방 안으로 팔을 뻗자, 헤미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후 그의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방 내부는 겉에서 보는 것보다 쾌적했다.

아주 넓진 않았지만 황궁의 귀빈실답게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와, 생각보다 정말 좋네요.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어요.”

“제가 있으니 마음 놓아도 됩니다.”

똑똑—.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작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

레너드 경은 곧바로 검집을 챙기며 문 앞으로 다가섰다.

조용히 문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또다시 노크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서 염려하시던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레너드 경이 작게 속삭였다.

“염려하시던 일이라면 나, 나, 납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온 건지 모르겠군요.”

“처, 처음부터 미행이라도 당한 거 아닐까요?”

하지만 그의 차분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헤미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런 것 같네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요. 제가 나갔다 올 테니…….”

“혼자는 위험해요! 저도 같이 가요!”

조금 전까지 울 것 같은 얼굴로 긴장해 있던 헤미쉬가 방 한쪽에 놓여있던 과일 바구니를 챙겼다.

귀빈실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이었다.

“지금 그건 왜…….”

“급할 땐 이거라도 써야죠. 내일 정부 임명식을 위해선 레너드 경의 몸도 다치면 안 되잖아요.”

진지하게 말하는 헤미쉬의 모습에 레너드 경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저는 괜찮을 겁니다. 호위 기사가 제 직업입니다.”

“아니요. 절대 지금 혼자 나가는 건 안 됩니다. 위험해요.”

“후, 그렇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그쪽이야말로 위험하니 조심하도록 해요. 내 뒤에 있어요.”

“네, 저는 걱정 마세요.”

헤미쉬가 노랗게 익은 오렌지를 손에 쥐며 대답했고, 레너드 경은 더 지체하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어둠 속에서 뭔가 길고 반짝이는 게 보였다.

누군가의 검날인 것 같았다.

“누구시오?”

“으아아악!”

레너드 경도 빠르게 자신의 검을 꺼내 내밀었고, 헤미쉬는 두려움에 질려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과일들을 마구 던졌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건 예상치 못한 다정한 목소리였기에, 그들은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헤미쉬가 들고 있던 포도송이를 내려놓고 주변을 살피자, 어둠 속에 크레티안 경과 그의 일행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크레티안 경은 오늘 헤미쉬를 이곳 황궁까지 조용히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플로리아의 호위 기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크레티안 바르디 경? 여긴 어떻게?”

그리고 황실 호위 기사로 일하는 레너드 경도 당연히 그와 안면이 있는 상태였다.

“조금 전 황후궁을 빠져나갈 때, 두 분에게 미행이 붙은 걸 봤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진짜 우릴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헤미쉬가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여전히 과일을 손에 꼭 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정체는 아직 저희도 모릅니다. 그냥 단순히 염탐하러 온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있으니 이곳은 걱정 말고 황궁 안을 좀 수색해 주십시오. 더 늦기 전에 의심스러운 자들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무사하신 걸 확인했으니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레너드 경의 부탁으로 크레티안 경이 다른 기사들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후우.”

“길고 긴 밤이 되겠네요.”

평소였다면 레너드 경도 본인이 직접 움직여야 마음이 편했겠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일 있을 정부 임명식을 위해서라도 오늘 밤 혼자 돌아다니다가 위험에 처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플로리아는 아주 풍성한 드레스를 골랐다.

새하얀 드레스 자락이 마치 결혼식을 하는 신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시작 시간까지 이제 딱 한 시간 남았습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이 시계를 살피며 말했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볼이 발그레하게 한껏 상기돼 있었다.

마치 딸을 결혼시키는 부모라도 된 것처럼 본인이 더 긴장하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한 얘기지만, 황후 폐하 결혼식 때보다도 괜히 더 떨리네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플로리아가 에르앙 백작 부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결혼식을 하던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공작가 영애로만 살았었기에 결혼에 대한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동반자를 들이는 이 행사가 묘하게 기대되고 떨렸다.

“다른 것보다 부디 무탈하게 식이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부인.”

플로리아가 에르앙 백작 부인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한 번 꼭 안아줬다.

“……황후 폐하?”

그동안 자세한 전후 사정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도, 늘 자신의 뜻을 믿고 따라준 것에 대한 감사함이 담겨있었다.

품에서 떼어낸 그녀를 마주 보고 있자니 몇 개월 전의 그날이 떠올랐다.

플로리아가 3일이라는 시간을 얻고 회귀했던 날.

한동안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었다.

그날의 회귀로 원치 않게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으셨으니, 오늘 하루는 편히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에르앙 백작 부인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플로리아 같은 자비롭고 다정한 황후가, 정부를 들이는 지금 현실이 슬프면서도 기쁜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럼요. 딱 하루인데 마음 편히 즐겨야지요.”

보통 황족의 결혼식은 짧으면 이주에서 길면 한 달까지도 행사를 진행했다.

지방의 작은 영지까지도 축하 파티가 끊이지 않고 열렸으니, 부부만의 결혼식이라기보다는 제국 전체의 큰 행사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정부 임명식은 그에 비하면 많이 달랐다.

특별히 정해진 다른 형식은 없었으나 임명식은 당일 하루만 진행됐다.

“분명 걱정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에르앙 백작 부인의 단호한 말에 플로리아가 느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폐하, 이제 그만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리고 때마침 밖에서 들려오는 하녀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서둘러 정부 임명식이 열리는 대신전으로 향했다.

* * *

그동안 카르티스는 정부 임명을 자주 했었기 때문에 형식 자체를 성대하게 진행하진 않았다.

안젤리나가 정부로 들어오던 날도 간소하게 약식으로 진행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플로리아도 그에 맞춰서 너무 성대하게 진행하진 않을 예정이었지만, 일부러 고위 귀족들과 일부 기자들을 초청해 둔 상태였다.

황후가 정부를 들이는 일은 흔히 벌어지는 게 아니었기에, 기자들은 저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혈안이었다.

“언니! 우리도 왔어!”

그때, 플로리아를 먼저 발견한 벨라가 뒤쪽에 서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 옆엔 파슈테와 라니에도 서 있었다.

플로리아가 벨라에게 미리 초대장을 보내두긴 했었지만, 부모님까지 오실 줄은 몰랐었다.

게다가 정부를 임명하는 당일임에도 파슈테의 표정은 전보다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족들과 눈짓으로 인사를 나눈 플로리아는 정해진 자리로 이동했다.

“이제 곧 플로리아 아리안느 황후 폐하의 정부 임명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식을 진행할 대신관의 목소리에 일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황후 폐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에쉬가 플로리아 옆으로 다가왔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의 온 얼굴이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에쉬, 무슨 일이 있느냐?”

“그게…….”

잠시 숨을 고른 에쉬가 파랗게 질려가는 얼굴로 플로리아를 향해 말했다.

“아루비스 공작 각하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리헤이드가 사라졌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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