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황후의 정부들
에이니는 오랜만에 안젤리나에게 찾아가던 길이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헬렌을 부추겨서 진행하려던 일은 계획이 틀어진 듯했다.
벌써 2주가 다 되어가는 데도 카르티스도 아무 반응이 없고, 안젤리나도 덩달아 잠잠했다.
“……내가 직접 움직여서 뭐라도 좀 캐내봐야지.”
에이니가 막 안젤리나의 응접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처음 보는 여자가 에이니의 앞을 막아섰다. 멈춰 서서 그녀를 훑어보니 새로 온 하녀인 듯했다.
“잠시 안젤리나를 만나러 왔다. 문을 열거라.”
에이니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이곳에 종종 찾아온다는 사실은 신입 하녀일지라도 이미 전달받았을 거라 여겼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먼저 밝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녀는 비켜설 생각이 없는 듯 에이니를 똑바로 주시했다.
“지금 에이니 님께 예의 없이 무슨 짓이죠? 이분은 황제 폐하의 정부이십니다. 당장 비키도록 해요.”
그때, 에이니의 뒤에 서 있던 하녀 베일리가 나섰다.
그러자 안젤리나의 하녀는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듯, 깜짝 놀라며 자리를 비켜섰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처음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잘 몰랐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베일리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하던 에이니가 앞에 있는 하녀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하녀가 곤란하다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느리게 대답했다.
“……저는 로레인 패리스라고 합니다, 에이니 님.”
로레인은 자신보다 강자로 보이는 에이니 앞에서 최대한 움츠러든 척했다.
‘마주치는 사람 중에 폐하의 정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해리스에게 기선제압을 하던 상황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 탓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레인의 이름을 들은 에이니도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잠깐, 내가 이 이름을 언제 들어봤었지?’
익숙한 느낌에 잠시 머릿속을 살피던 그녀는, 안젤리나가 자신에게 처음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로레인이라는 친한 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가 제 과거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비밀을 지켜줄 테니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지 뭐예요.”
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분명 그때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런 여자랑 상종도 하긴 싫지만 돈을 안 보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협박에 시달리고 있어요.”
안젤리나는 로레인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을 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우연한 동명이인일 리도 없고, 상종도 하기 싫다던 여자를 자신의 별궁 하녀로 들였다고?’
에이니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다.
안젤리나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던 건지, 아니면 로레인이 또 다른 협박을 빌미로 이곳에 들어온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기존 하녀는 어디로 가고 혼자 있는 것이냐?”
그래서 일단 로레인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로레인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녀와 친분을 쌓아볼 생각이었다.
“그게…… 잠시 쉬고 오겠다며 저보고 여길 지키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근무 중에 쉬러 갔다고?”
“네. 안젤리나 님께 해가 될 사람을 들이면 안 된다고 하도 당부하셔서, 잘해보려다 그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로레인은 급한 대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오늘도 그녀가 해리스에게 심부름을 시켜서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측근 하녀 자리를 뺏어오기 위해선 어차피 해리스가 일을 제대로 안 한다는 이미지를 별궁 내 여기저기에 흩뿌릴 필요도 있었다.
“이런, 그렇게 무책임한 하녀가 있다니. 내가 안젤리나에게 얘기해서 너를 도와주도록 하겠다.”
에이니가 안젤리나를 만나러 당장이라도 응접실로 들어갈 듯하자, 로레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를 말렸다.
“아닙니다, 에이니 님! 아직 제가 서툴러서 그런 것이니 제발 없던 일로 넘어가 주세요.”
로레인은 지금 당장은 안젤리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은 귀찮은 심부름을 떠넘길 해리스가 옆에 필요했다.
“……이제 갓 들어온 황궁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싶진 않습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느냐?”
에이니가 당황한 로레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안젤리나가 자신에게 찾아와 로레인을 욕하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예, 괜찮습니다.”
“뭐든 도와줄 테니 힘든 일이 있다면 내게 말하거라.”
“감사합니다, 에이니 님.”
로레인은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는 언젠가 안젤리나와 사이가 틀어지면 별궁에서 쫓겨나게 될까 걱정이었다.
황궁 안에서 믿을 구석이라곤 아무래도 한 사람뿐이었으니 더더욱 불안했다.
하지만 앞으로 잘만하면 에이니라는 든든한 뒷배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역시 난 운이 좋다니까.’
로레인은 자신이 실수로 저지른 무례가 이렇게 선의로 돌아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이제 문을 열거라.”
감격에 겨운 듯한 로레인을 뒤로하고 에이니가 얘기했다.
에이니 입장에선, 오늘 한 번의 만남으로는 로레인과 큰 친분을 쌓기 어려울 테니 이쯤에서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녀는 일단 남은 궁금증은 안젤리나를 통해서 해결하기로 하고, 응접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날 밤, 플로리아는 공식적으로 정부를 들이기 전에 미리 그들을 한 자리에 불러들였다.
제리헤이드를 비롯해 레너드 경과 헤미쉬가 함께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자,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체격의 헤미쉬는 나머지 두 사람 사이에 있으니 오늘따라 아담해 보이는 것 같았다.
“다들 바쁠 텐데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황후 폐하.”
“언제든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네, 그럼요!”
다들 저마다 대답을 꺼내자, 플로리아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정부 임명식입니다. 다들 알고는 있겠죠?”
“예, 황후 폐하.”
그들이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얘기해 두지만, 마지막에 입장하는 순간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말아요.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직접 만나서 당부하려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 폐하께서 혹여나 세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정부 임명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실까 걱정이 돼서요.”
사실 이건 최근 며칠 동안 플로리아가 제일 걱정하는 부분이었다.
내일 레너드 경이나 헤미쉬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제리헤이드를 세 번째 정부로 들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제리헤이드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모든 정부 임명 계획이 물거품이 될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를 정부로 들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세 사람 모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무사히 모여야 정부 임명식을 진행하는 게 가능한 상황이라 그런지,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폐하께서요?”
헤미쉬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듯 놀란 눈치였지만,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저도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레너드 경은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히 얘기했다.
“황제 폐하를 의심하는 건 황실 호위 기사로서 누구보다 부끄러운 일인 걸 알지만, 지금은 황후 폐하의 예비 정부로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해해요, 레너드 경. 내 앞에선 호위 기사의 지위는 잠시 내려놓아도 좋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레너드 경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사이, 헤미쉬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설마 납치하거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아니시죠?”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염두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밤, 황궁에서 머물면서 숨어있어야 할까요?”
헤미쉬는 자신이 혹시라도 정부 임명식을 망쳐버릴까 두려워졌다.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그를, 누군가 작정하고 납치하려고 한다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 같았다.
“그렇게 걱정이 크다면 오늘 밤 나와 함께 있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레너드 경이 헤미쉬에게 물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건 위험 부담이 두 배가 될 수도 있는 도박이었지만, 그중 한 사람이 황실 호위 기사라면 얘기는 달랐다.
아직 레너드 경과 헤미쉬가 플로리아의 정부로 들어온다는 사실은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에게 정체를 들킨다고 해도 레너드 경이 한 명의 호위 정도는 해낼 것 같았다.
“정말 그래도 돼요?”
“그게 좋겠군요.”
헤미쉬와 플로리아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나도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레너드 경을 믿으니까요.”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세 사람은 오늘 밤을 무탈히 보낼 계획을 세운 후, 동시에 제리헤이드를 바라봤다.
그는 오늘따라 말수도 적고 어딘가 많이 피곤해 보였다.
“아루비스 공, 괜찮나요?”
플로리아가 공적인 호칭으로 물었다.
다른 정부 후보들 앞에서 그를 애칭으로 부르긴 아직 어색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요즘 해결할 일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저도 내일 임명식은 무사히 늦지 않고 참석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대는 알아서 잘 해주리라 믿고 있어요.”
플로리아의 말에 제리헤이드가 지친 표정을 거두고 미소를 건넸다.
그런 노력에도, 플로리아는 그가 무슨 일 때문에 피곤해 하는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잠시 시간을 내야겠군.’
최근 며칠 동안 제리헤이드와 느긋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아쉽기도 했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아요. 내일 무사히 만나죠.”
플로리아의 말에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너드 경은 곧바로 헤미쉬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고, 제리헤이드도 플로리아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가려고 했다.
“제드, 나와 잠시 얘기 좀 할까요?”
플로리아의 물음에 제리헤이드가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후 폐하, 죄송하지만 다음을 기약해도 되겠습니까? 오늘은 제가 사정이 있어서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플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표정이 부쩍 어두워진 제리헤이드가 걱정스러웠다.
‘혹시 무슨 말 못 할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였다.
“황후 폐하!”
모두 나가자마자 크레티안 경이 급하게 달려들어 왔다.
“왜 그러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어딘가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게……제 부하들 말에 의하면, 지금 누군가 레너드 체셔 경과 헤미쉬 드밀레의 뒤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