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초대장
“오늘부터 안젤리나 님의 하녀로 일하게 된 로레인 패리스라고 해요.”
로레인은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이왕이면 제일 편한 일을 하고 싶었는데, 별궁 하녀라면 크게 힘들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안젤리나의 하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요즘 들어 부쩍 살갑게 대하는 걸 보면 힘든 일이나 험한 일을 시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리숙해 보이는 측근 하녀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저, 저는 해리스 데인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건네는 해리스의 모습을 로레인이 위아래로 훑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려 보이고, 이미 말투도 한껏 주눅든 게 좋았다.
새로운 사람을 들였다고 괜히 텃세를 부리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그 순간, 로레인은 그런 해리스의 자리를 조만간 자신이 꿰찰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반가워요. 나는 안젤리나랑 알고 지낸 지 아주 오래된 사이예요.”
“……네? 아, 네.”
해리스는 대답을 하면서도 로레인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안젤리나만큼이나 그녀의 눈빛은 매섭고 서늘했다.
그동안 안젤리나의 구박에 시달리던 해리스에겐 그 눈빛이 더 공포로 다가왔다.
“앞으로 잘 지내봐요.”
로레인이 환하게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위축돼있던 해리스도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네, 잘 지내봐요.”
“저기, 미안하지만 나 차 한 잔만 가져다줄래요?”
“네?”
“지금 목이 너무 마른데 아직 별궁 지리를 잘 몰라서…….”
그 말과 함께 로레인이 입꼬리를 한껏 끌어당겼다.
웃는 얼굴로 말하면 해리스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소심한 심성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역시나 예상대로 해리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물을 가지러 걸어갔다.
“혹시 간단한 요깃거리 있으면 그것도 가져와요!”
로레인이 멀어지는 해리스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그녀는 걸어가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하여튼 순진하긴. 황궁 안에만 있으니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
로레인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아랫사람 대하듯 하다 보면 저절로 서열이 바뀌겠지?”
현재 측근 하녀로 있는 해리스만 밀어내면 그녀의 황궁 생활은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안젤리나가 시키는 잔심부름들은 해리스에게 전부 맡겨두고, 자신은 편안히 하녀 지위만 유지할 생각이었다.
“역시 난 똑똑하다니까. 일도 돈도 다 버리고 이곳에 오길 잘했어. 몽수아에만 평생 처박혀 있기엔 아까운 몸이지.”
로레인은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얼른 해리스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녀가 가져올 차와 간식은 곧바로 안젤리나에게 전해주며, 자신이 직접 준비한 척할 생각이었다.
해리스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웃던 로레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황궁 생활도 꽤 재미있겠어.”
* * *
카르티스는 오랜만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요즘 황궁 안이 잠잠하다 했더니, 눈에 보이는 일이 없다고 아무 일도 없는 건 아니었다.
“황후가 벌써 정부 후보를 모두 뽑았다고?”
“예, 폐하. 조만간 정부 임명식을 진행하신다는 소문이 궁 안에 파다하게 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루비스 공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 두 명의 후보는 언제 뽑았단 말인가?”
카르티스는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에리튼 제국에 다녀온 이후 플로리아는 공식적으로 황궁 밖으로 나간 적도 없었고, 누군가 불러들였다는 얘기도 전해 듣지 못했었다.
그 순간, 그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모르크 후작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동안 폐하께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진행하신 듯합니다.”
“지금 그걸 누가 몰라서 묻는단 말이오?”
역시나 그에게 돌아오는 건 역정과 핀잔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서 정확한 날짜가 언제라는 거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카르티스의 기세에 눌린 모르크 후작이 곤란해하고 있던 그때,
“폐하,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황실 호위 기사의 목소리가 응접실 문밖에서 들렸다.
“……들어오시오.”
곧이어 카르티스의 신경질적인 대답이 끝나자, 플로리아가 응접실 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황후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모르크 후작, 잠시 자리 좀 비켜주겠어요?”
“……예, 황후 폐하.”
비서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자, 플로리아는 카르티스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섰다.
“곧 정부 임명식을 진행할 거라는 소문이 돌던데, 혹시 내게 초대장이라도 건네러 온 것이오?”
카르티스는 괜히 빈정거리는 말투로 떠보듯 물었다.
모든 게 황후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은 상황에 그의 심사가 뒤틀리고 있었다.
“정확히 짚으셨군요.”
플로리아가 여유롭게 웃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바로 어제 제리헤이드에게 보냈던 것처럼 주변이 황금색으로 장식된 파란색 봉투였다.
그녀는 이미 레너드 체셔 경과 헤미쉬 드밀레에게도 같은 서신을 보낸 상태였다.
“설마, 정말 초대장을 준비했다는 말은 아니겠지?”
카르티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봉투를 뜯었다.
그의 빠른 손놀림에 겉면의 장식이 거칠게 뜯겨 나갔다.
사실 카르티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다른 정부 후보들에게 보낸 것과 약간 달랐다. 하지만 요지는 같았다.
이번 주에 있을 정부 임명식에 꼭 참석해달라는 것.
타레트 제국의 황제 자격으로 참석해 그 자리를 빛내주길 바란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후, 이렇게 고집스럽게 진행해야만 하는 것이오? 급하게 아무나 정부로 들이다간 황후의 자리만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군.”
“걱정은 감사하지만, 그동안 직접 보고 배운 것이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정부를 들이는 게 황실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입니다.”
플로리아가 카르티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동안 수많은 정부에게만 빠져서 국정도 내팽개쳐버리곤 했던 그에게 꼭 하고 싶던 말이었다.
“사람 볼 줄 모르는 황후가 과연 누굴 뽑았을지 걱정이오.”
조금 전 플로리아의 말을 흘려들은 카르티스가 제리헤이드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에게 있어서 제리헤이드는 여전히 족제비만큼 얄미운 존재였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는 상태라 그런지, 카르티스는 플로리아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폐하께서 이렇게 저를 걱정해주시는 분인 줄 그동안 미처 몰랐네요. 그리 걱정되신다면 꼭 그 자리에 참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플로리아는 진심으로 그가 정부 임명식에 오길 바라고 있었다.
지금껏 열심히 정부를 들일 준비를 한 건 모두 그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나도 내 곁에서 힘이 되어줄 내 사람을 들인다고.
더 이상 혼자서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순진한 황후가 아니라고.
그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부탁한다고 해서 내가 그 자리에 진짜 참석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난 허수아비 황제가 아니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폐하께서 여러모로 제 정부들에 대해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초대장을 준비한 것인데, 예상이 틀렸나요?”
카르티스는 정곡을 찔린 기분에 뜨끔했다.
더 이상 플로리아 앞에서 상할 자존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긁어모아 대답했다.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 그만하시오.”
“역대 황제 폐하들께서도 황후 폐하의 정부 임명식엔 참석을 하셨더군요. 선례를 좋아하시는 분이니 이미 찾아 보셨으려나요?”
“이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소. 난 내 체면을 구기며 그런 자리에 참석할 생각은 없으니 가지고 돌아가시오.”
카르티스가 옆에 있는 탁자 위로 툭— 소리가 들리게 봉투를 내던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플로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선례를 그렇게 따지시던 분이 이리 말씀하시다니…….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겠군요.”
“…….”
“그럼 이만 돌아가지요.”
플로리아가 더 이상 별다른 대꾸 없이 버려진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문 쪽으로 향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 정부 임명식 날 전하지 못할 것 같아서 오늘 미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뭘 말이오? 더 할 말이 남았소?”
“따지고 보면, 폐하께서 넓은 아량으로 제게 정부 허가서를 내어주신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뜻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실 카르티스는 아직도 그날을 후회하고 있었다.
플로리아에게 너무 쉽게 서류를 내어준 날.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
후회와 짜증에 사로잡힌 카르티스는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플로리아는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를 한 후 방을 빠져나갔다.
“폐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때, 플로리아가 나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모르크 후작이 달려 들어오며 물었다.
카르티스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심각한 일이 생긴 듯했다.
“모르크 후작, 이번 수요일에 일정이 어떻게 되지?”
“……수요일이요?”
황제의 물음에 그가 품 안에 있던 일정 노트를 급히 꺼내 살폈다.
“오전과 오후에 관료 회의가 한 차례씩 예정되어 있습니다.”
“흐음.”
“왜 그러십니까?”
“……일단 그날 일정을 비워두시오.”
그렇게 말하는 카르티스는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플로리아가 직접 정부를 들이는 장면을 지켜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참석해봐야 괜히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 것도 너무 답답할 것 같았다. 회의에 집중도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조금 전엔 플로리아에게 괜히 홧김에 궁금하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어떤 남자들을 정부로 골랐을지 누구보다 궁금했다.
그래서 일단 혹시 모르니 일정을 정리해 둘 생각이었다.
“오전, 오후 전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모르크 후작은 습관처럼 그 이유를 물으려다가, 평소보다도 더 굳어있는 카르티스의 표정에 말을 멈췄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곤 일정을 정리해두기 위해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